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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존하는 여성성

에이스를 노려라

by 아라베스크

지금으로부터 12년 전. 제8회 일본 영화제 테마는 여성이었다. 당시 내가 본 영화제 작품 대다수는 여성이 자기 의지로 편견에 가득 찬 세상을 헤쳐나가는 여러 모습을 보여주는 작품들이었는데 그중 강한 여성상의 기원이라 할 수 있는 작품 극장판 에이스를 노려라 79년작이 있었다. 이 작품은 원작도 너무나 유명하지만 79년 극장판으로 현재의 명성을 구축한 것이기도 하다. 그 인기가 결국엔 1988년도에 이르러 전설로 회자되는 명작. 톱을 노려라 건버스터를 세상에 내놓게 되는 동기가 된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안노의 에반게리온을 두고 결국 너에겐 아무것도 없다는 걸 증명해 냈다는 말처럼 안노 히데아키가 처음 제대로 감독한 톱을 노려라 건버스터는 모든 게 에이스를 노려라의 오마주이고 패러디였다. 플롯도 구성도 감성도. 하지만 엔딩만은 달랐는데 16년 후, 전작의 엔딩으로 가이낙스 창립 20주년 톱을 노려라 2 다이버스터를 완성. 창발적 진화로 진짜를 증명하게 된다.


에이스를 노려라는 오카 히로미란 소녀가 고교 여자 테니스에서 전 경기 무패를 이어가는 류자키 레이카를 동경해 레이카가 다니는 학교로 진학, 테니스 부에 입부하면서 시작된다. 평범하게 고교 생활을 즐기면서 선배들과 어울리던 히로미의 삶은 무나카타 진이란 코치가 새로 입부하면서 극변 한다. 무나카타 코치는 여자 테니스도 파워 게임으로 바뀔 거라고 표명하며 모든 팀원의 경력을 무시한 채 혹독한 훈련을 시키고, 이 과정에서 본인의 기준에 부합하는 한 사람을 류자키 레이카의 복식 파트너로 지명하게 되는데 테니스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소녀, 주인공 오카 히로미였다. 오카 히로미는 복식 파트너로 선출되고 난 뒤 더욱 가혹한 훈련을 받게 된다. 주변 사람들의 불신과 스스로도 납득할 수 없는 선출이 오카 히로미를 괴롭히고 결국 훈련 중 도망치고 테니스를 그만두다시피 하지만. 테니스를 다시 하고 싶어 돌아가고 싶은 밤마다 무나카타 진에게 전화를 걸고 말없이 끊고를 반복하던 중 어느 밤. 무나카타 진에게 또다시 전화를 거는 히로미. 이 장면에서 희대의 명대사가 나온다.


“그런데 항상 이상했어요. 코치님은 제가 전화를 걸면 먼저 말하지 않았는데도 저인걸 매번 어떻게 아시는 거죠?”


“항상 네 생각만 하니까?”


현재의 상식으로 성인 남성이 여고생에게 하기에 부적절한 대사가 아무렇지 않게, 사실 무엇보다 더 극적으로 연출되는 장면에선 할 말을 잊었지만 근성물이란 틀에서 보면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 이것 못지않게 사람을 할 말 없게 하는 것은 류자키 레이카를 향한 히로미의 동경과 존경이다. 나비 부인이란 별명으로 일본 주니어 대표팀에 선발되는 류자키 레이카가 히로미의 복식 파트너 등락 여부를 결정짓는 테스트 대결 상대로 나서게 되는데 이 대결 전까지 레이카의 서브 하나도 제대로 받아내지 못했던 히로미가 놀랍게도 레이카를 따라붙는다.


“오카. 난 절대 한 게임도 네게 주지 않을 거야. 그것이 나의 사랑. 너를 향한 나의 사랑이야.”


사랑에 관한 엄청난 해석. 이 대사와 함께 날리는 사랑의 서브.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서브를 히로미는 드디어 받아낸다. 히로미는 존경하는 선배이자 동경하는 언니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말에 놀라운 괴력을 보여주는데 그 힘으로 결국 류자키 레이카를 이겨버린다. 승리의 순간. 무나카타의 표정. 자신은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는 표정. 정상적인 사고라면 생각하는 순간 절대 말해선 안 된다고 다짐할 만한 대사조차 굉장히 쿨하게, 또한 열정적이게 말하는 남자. 거대하고 거칠지만 엄청난 선견 지명과 능력에 잘생기기까지 한 이 남자가 병약하다는 사실을 우린 왜 그리 쉽게 받아들이는 걸까? 무나카타 코치가 히로미를 선출하게 되는 중요 요인 중 하나가 마지막, 무나카타의 죽음에 이르러 밝혀지는데, 그가 어머니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돌아가신 어머니와 너무 닮은 히로미를 주목했다는 점이다. 주변의 극강한 반대를 무릅쓰고 히로미를 선출하고 보필한 이유가, 그래도 재능 때문이라 생각했던 내 기대를 무너뜨린 이 사실. 내겐 아주 충격적이었던 마마보이의 엄청난 독백형 고백이 그래도 의미만은 아주 절실했는데, 어머니가 여성으로서 나약할 수밖에 없었기에 히로미는 남자에 버금갈 아주 강한 여성, 인물로 세상을 헤쳐나가게 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더욱더 강하게 키웠다는 천명. 난 이 장면이 여성에게 여성성을 소거하고 남성성을 강조한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여성으로서 강하게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 그렇다면 힘. 그건 삶의 열정으로 비롯되는 필연적 요소라는 것이다. 무나카타 코치가 히로미를 불타오르게 만드는 건 쉽지 않았다. 히로미는 오늘도 더 이상 할 수 없단 마음으로 매번 무나카타 코치를 찾아간다. 그런 히로미를 격려하는 무나카타 진은 뜨겁다. 앞서 언급한 전화의 대사처럼 매 순간 진지하게 오늘의 히로미를 향한 열정을 감추지 않는다. 그런 무나카타 진에게 결국엔 감명받은 오카 히로미는 한 번 결심하자 끝까지 돌진한다. 그 당시 통상적인 남자의 열정과 다른 점이 있다면 오카 히로미는 돌진하면서도 주변을 돌본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염없이 넓은 바다의 모습. 그리고 우리가 사랑이라 부르는 관계의 모습이다.


난 무나카타 진이 오카 히로미에게서 여성성을 지우고 싶어 힘, 테니스에서 파워를 강조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무나카타 진이 병약한 어머니와 달리 어머니의 모습을 한 오카 히로미가 세상을 헤쳐나가며 그 누구보다 강하게 살아가길 바랐다는 건 어머니의 다정하고 아름다운 여성성이 세상에 오래 남아 있길 바랐다는 걸로 이해한다. 오카 히로미에게서 다시 누군가에게로 전해져 특유의 강함으로 이 세상에 영원히 남아 있길 바랐다는 걸로. 나도 그러기를 바라고 있다. 12년 전 비로소 스크린에서 처음 봤던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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