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
35살. 미국인 백인 미혼 독신 임시 사무직. 친구도 없이 가족과 연을 끊고 사는 여자. 의료 보험이 없어 병원조차 갈 수 없는 가난함. 한때 명문대 장학생이었지만 중퇴를 했고, 마음을 다해 사랑했던 사람과 헤어졌으며 자살을 기도한 적 있다. “헤어지고 나서야 알았어요. 그 사람은 진실로 나를 사랑했고, 가족들은 그만큼 날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을.” 가족들의 반대로 자신을 진실로 사랑했던 흑인과 헤어졌던 일을 떠올리며 윤리적이라 생각했던 선택을 - 이별을 - 후회하는 대사. 가족들은 그녀가 흑인과 결혼한다면 의절할 거라고 경고했고 베키는 가족들과 함께 해야 한다는 ‘의식‘으로 이별을 선택했지만 결국 어떠한 문제가 - 이것은 베키의 독백으로 암시될 뿐인데 일방적인 의절이 아닌 결국엔 의절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베키와 가족 모두에게 있었다. 베키를 가족과 의절시켰고 베키는 혼자가 되었다.
베키는 많은 걸 솔직하게 표현하지만 맥스는 베키의 마음에 의도가 있는 건지, 아님 흔히 말하는 진실한 사랑인지 의심한다. 베키는 직장 동료 앤드류의 소개로 앤드류의 아내 수잔의 오빠 맥스를 소개받는다. 맥스는 입양아로 수잔과 함께 자랐지만 현실감으로 실리를 판단하고 냉철하게 관계를 분석하는 사람이다. 베키는 맥스를 처음 본 순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맥스를 사랑한다는 것을. 수지와 앤드류가 마련한 소개. 잠깐의 만남. 이어진 하룻밤 정사. 이 모든 일이 맥스와 함께할 수 있다는 사랑의 근거가 되었기에. 그리고 이 사랑이 자신을 취약 계층에서 벗어나게 해 줄 것임을.
맥스는 돈과 남자를 밝히는 여자의 속물근성이라 싸잡지만 베키의 확고한 믿음에 그녀를 향한 거부를 잠깐 포기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어쩌면 이 여자는 진실로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지 모른다며. 베키는 순수함을 잃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걸 드러내며 타인에게 동정을 얻으려 하고 그것으로 도움을 받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랑이 자신을 걱정 없이 살아가게 해 줄 것임을 감추지 않는다. “사람들은 내가 약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난 단지 쉽게 상처받을 뿐이에요.” 베키는 맥스에게 끊임없이 요구한다. 자신은 쉽게 상처받지만 우린 사랑하니까 사랑으로 자신을 보살펴달라는 것을.
“21세기 배우 지망생들이 35세에 접어들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들이 그때가 되어서도 원하던 위치에 오르지 못한다면 아마 눈은 분노로 이글거리고 미쳐가기 직전이겠죠. ”이 일을 따야 돼. 반드시 따야만 돼!“ 하면서요.” 작가 지나 지온프리도는 나이가 들어도 조명받지 못하는 여배우들의 조바심에서 영감을 받아 베키 쇼를 집필을 했다고 한다. 절박함은 베키 쇼의 사랑에 매우 중요한 정서다. 여자로서 나이가 들어 더는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이 된다면 궁핍한 삶의 괴로움에서 영영 벗어나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 이 두려움은 베키가 맥스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원동력이 된다. 어쩌면 베키는 자기기만으로 필요를 사랑으로 착각하는 건지 모른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하지만 베키가 자기 삶이 비루하고 비천할지라도 그래도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믿음으로, 우린 사랑할 수 있다고, 그래서 맥스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모습에서 나는 감동했다. 정신적 교감, 설명할 수 없는 끌림, 성적 충동만이 진실한 사랑이라 말하는 것은 이 세상 절대적 거짓말 중 하나일지 모른다. 사랑이란 성경처럼 각자에게 맞는 의미를 내포한 채 각기 다른 모습으로, 이 세상 사람들의 숫자만큼 세상에 존재하기에. 사랑은 일시적이면서 영원하고 가시적이면서 보이지 않는다. 어떤 사람의 사랑은 세상 어느 기준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며, 매우 하찮을 수 있고 상식을 넘어선 숭고함을 보일 수도 있다. “이때껏 당신은 어떤 위급한 순간에 누구도 부를 수 없었지만 나는 여기에 있어요.” 베키가 한 말에 맥스가 흔들렸던 만큼 내 마음도 흔들렸던 순간 언뜻, 희망이라 규정할 수 있는 것이 언뜻 보였을 때,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희망이고 희망만 있다면 그 어떤 모습이든, 사랑이든 다 상관없단 생각이 들었다. 중요한 건 희망인 것이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 어떤 형태든 어떤 가치든 간에 사람은 그것으로 살아갈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