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창구는 튼튼한데, 뒷골목은 안녕하십니까?

by 구미잉

어제 연준 리사 쿡 이사의 발언을 듣고 고개를 갸웃하신 분들이 많으셨을 겁니다. 자산 가격이 크게 하락할 위험이 있다고 경고하면서도, 동시에 금융 시스템은 안전하다고 했으니까요. 주가가 폭락하고 기업이 무너지는데 시스템은 멀쩡하다니, 이게 도대체 무슨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소리인가 싶으실 텐데요. 오늘은 이 발언 속에 숨겨진 진짜 의미, 바로 사모 신용이라는 거대한 빙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볼까 합니다.


우선 시계를 잠깐 2008년이나 2023년 실리콘밸리은행 사태 때로 돌려보죠. 그때 위기의 진원지는 명확했습니다. 바로 은행이었죠. 은행이 무너지면 돈줄이 막히고 경제가 마비되니, 정부와 연준이 부랴부랴 돈을 풀어 살려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로 은행들은 몸을 사리기 시작했습니다. 규제도 심해지고 겁도 나니 기업들에게 돈을 잘 안 빌려주게 된 거죠. 그럼 돈이 급한 기업들은 어디로 갔을까요? 네, 바로 은행의 규제를 받지 않는 사모 펀드나 자산운용사 같은 뒷골목의 큰손들을 찾아갔습니다. 이게 바로 지금 3조 달러, 우리 돈으로 약 4천조 원 규모로 불어난 사모 신용 시장의 정체입니다.


문제는 이 시장이 그림자 속에 있다는 점입니다. 은행 대출은 연체율이 매일매일 투명하게 공개되지만, 사모 신용은 운용사와 기업 둘만의 비밀 계약이라 밖에서는 속사정을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최근 들려오는 소식들이 심상치 않습니다. 고금리가 2년 넘게 이어지면서, 돈을 빌려 간 기업 중 4분의 1 이상이 벌어들인 돈으로 이자조차 못 갚는 상황, 전문 용어로 이자보상배율이 1 미만인 좀비 상태에 빠졌다는 데이터가 나오고 있거든요.


더 놀라운 건 이들이 생존하는 방식입니다. 이자를 갚을 현금이 없으니 PIK라는 아주 독특한 방식을 씁니다. 쉽게 말해 이번 달 이자는 못 주니까, 그만큼 빚을 더 늘려달라고 하는 겁니다. 빚으로 빚을 막는, 사실상 카드 돌려 막기와 다를 게 없죠. 그런데도 장부상으로는 연체가 아니라 정상 대출로 분류됩니다. 덕분에 겉으로 보기엔 시장이 아주 평온해 보이죠. 이걸 두고 월가의 어떤 전문가들은 변동성 세탁이라고 비꼬기도 하는데요. 썩어가고 있는데 향수를 뿌려 냄새를 감추고 있는 셈입니다.


그렇다면 리사 쿡 이사는 왜 시스템이 안전하다고 했을까요? 여기서 아주 잔인한 진실이 드러납니다. 만약 이 좀비 기업들이 무너져도, 그 손실을 떠안는 건 은행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 누가 떠안느냐. 바로 수익률에 목말라 이 상품에 투자한 보험사와 연기금, 그리고 최근 고수익을 쫓아 들어온 개인 투자자들입니다. 은행이 망하면 정부가 세금으로 막아주지만, 사모 펀드에 투자했다가 손실이 나는 건 투자의 책임으로 귀결됩니다. 즉, 금융 시스템은 안전하다는 말은 정부가 나서서 구해줄 위기는 아니라는 뜻이자, 그 고통은 투자자들이 오롯이 짊어져야 한다는 경고인 것이죠.


우리는 흔히 위기라고 하면 2008년처럼 모든 게 한순간에 멈추는 심정지를 떠올립니다. 하지만 이번에 다가오는 위기는 다를 수 있습니다. 급성 질환이 아니라, 서서히 몸이 망가지는 만성 질환에 가깝습니다. 기업들이 이자를 못 갚아 하나둘씩 쓰러지고, 그 손실이 연금 계좌와 보험 만기 환급금에 반영되면서 천천히, 하지만 아주 깊숙하게 경제의 활력을 갉아먹는 시나리오죠. 연준이 금리를 내려서 유동성을 공급해 줄 수는 있어도, 이미 망가진 기업의 경쟁력을 되살려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결국 지금의 평온함은 진짜 안정이 아니라, 장부 평가가 현실을 반영하기까지 걸리는 시차 덕분일지도 모릅니다. 2026년부터 만기가 대거 돌아온다고 하는데요. 그때가 되면 향수로 가려둔 냄새가 진동을 하게 될 겁니다. 은행 창구가 튼튼하다고 해서 경제가 안전한 건 아닙니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 위험은 가장 안전하다고 믿었던 우리들의 노후 자산 속으로 조용히 옮겨와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니까요. 리사 쿡 이사의 주시해야 한다는 건조한 말속에 담긴 진짜 공포를, 이제는 직시해야 할 때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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