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은의 고독한 싸움: 금리로는 막을 수 없는 '대탈출'

by 구미잉

한국은행은 어제 기준금리를 동결했습니다. 겉으로 내세운 명분은 1.8%라는 나쁘지 않은 성장률과 물가 우려였지만, 진짜 속내는 따로 있다는 걸 이제 시장은 다 압니다. 바로 1,480원을 위협하는 환율과 좀처럼 잡히지 않는 가계 부채 때문이죠. 한은 총재의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금리를 내리자니 환율과 집값이 튀어 오를까 겁나고, 그렇다고 올리자니 가뜩이나 얼어붙은 내수가 무너질까 두려운 진퇴양난의 형국이니까요.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건 한은의 결정이 아닙니다. 진짜 문제는 한은이 금리라는 댐을 막고 서 있는 동안, 시장 참여자들은 이미 다른 곳으로 물길을 돌려 탈출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서학개미들의 엑소더스입니다.


보통 환율이 1,480원까지 오르면 달러가 비싸서라도 해외 투자를 주저하게 됩니다. 그런데 지금은 정반대 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지난 2주간 개인 투자자들은 무려 5조 3천억 원어치의 해외 주식을 순매수했습니다. 이는 역대급 기록이었던 10월보다도 두 배나 빠른 속도입니다. 환율이 오르건 말건, 한국 주식 팔고 미국 주식으로 떠나겠다는 의지가 그 어느 때보다 강한 겁니다. 한은이 금리를 묶어놔도, 이미 자본은 국경을 넘고 있습니다. 금리 정책이 무력해지는 순간이죠.


부동산 시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부가 10.15 대책으로 서울 아파트 대출을 옥죄자, 시장은 보란 듯이 경기도 구리나 화성으로, 아파트가 아닌 오피스텔로 튀어 올랐습니다. 서울 거래량이 67% 급감하는 동안, 오피스텔 거래량은 2.6배나 폭증했죠. 1 금융권 대출이 막히니 2 금융권으로, 그것도 안 되니 주식 담보 대출까지 끌어다 쓰는 풍선효과가 적나라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한은이 금리로 집값을 잡으려 해도, 사람들은 규제의 틈새를 찾아 기어이 유동성을 흘려보내고 있는 겁니다.


한은은 내년 성장률 전망치를 1.8%로 올렸습니다. 숫자만 보면 괜찮아 보입니다. 하지만 이 숫자의 껍질을 벗겨보면, 반도체 혼자서 멱살 잡고 끌고 가는 착시 현상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반도체를 빼면 성장률은 1.4%로 뚝 떨어집니다. 건설 투자는 마이너스 8.7%로 사실상 붕괴 직전이고, 자영업자들의 폐업은 속출하고 있습니다.


결국 지금 한국 경제는 트리플 디커플링에 빠져 있습니다. 수출은 잘되는데 내수는 죽어가고, 한은은 막으려는데 자본은 빠져나가고, 규제를 해도 집값 불씨는 꺼지지 않는 엇박자의 연속입니다. 한은 총재가 금융 안정을 위해 금리가 적정하다고 말할 때, 시장 참여자들은 한국 탈출이 적정하다며 짐을 싸고 있는 이 아이러니한 상황. 과연 금리 동결이라는 처방전 하나로 이 거대한 대탈출의 흐름을 막을 수 있을까요? 1,480원이라는 환율 숫자보다 더 무서운 건, 한국 시장에 대한 믿음을 잃어가고 있는 투자자들의 차가운 뒷모습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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