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 나라의 가난한 환율, 재투자의 덫에 걸린 원화

by 구미잉

12월의 첫 번째 화요일입니다. 날씨가 부쩍 추워졌네요. 다음 주에는 영하 5도까지 떨어진다니 옷깃을 단단히 여미셔야겠습니다. 날씨만큼이나 우리 경제를 춥게 만드는 숫자가 있죠. 바로 환율입니다. 지난주 1,460원 이야기를 드렸는데, 여전히 환율은 높은 수준에서 요지부동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통계를 보면 우리나라는 분명 돈을 잘 벌고 있거든요. 올해 9월까지 경상수지 흑자만 646억 달러가 넘고, 특히 해외 투자로 벌어들인 소득수지 흑자는 243억 달러로 사상 최대입니다. 장부상으로는 달러가 넘쳐나는데, 왜 외환시장에서는 달러가 없어서 난리일까요?


그 비밀은 바로 재투자의 덫에 있습니다. 기업들이 해외에서 돈을 벌어도 그 돈을 한국으로 가져오지 않고, 현지 공장을 짓거나 빚을 갚는 데 다시 써버리기 때문입니다. 지난 10월 거주자 외화예금이 52억 달러나 줄어든 것도 기업들이 빚 갚는 데 달러를 썼기 때문이죠. 게다가 개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서학개미들이 벌어들인 미국 주식 수익금은 원화로 환전되지 않고, 엔비디아나 테슬라를 더 사는 데 재투자됩니다. 결국 장부상 흑자는 숫자일 뿐, 실제로 시장에 풀리는 현찰은 없는 셈입니다.


이런 현상은 우리보다 앞서 일본이 겪고 있는 문제입니다. 일본은 올 상반기에만 경상수지 흑자가 17조 엔이 넘었지만, 엔화는 여전히 역사적 저점입니다. 일본 기업들이 해외에서 번 돈을 현지 재투자에 쓰고, 일본 국민들은 넷플릭스와 유튜브 같은 미국 디지털 서비스에 막대한 돈을 쓰느라 달러가 밖으로 새 나가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지금 일본의 디지털 적자와 재투자의 덫을 그대로 닮아가고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미래에 닥칠 국민연금의 시간입니다. 이창용 한은 총재가 국민연금을 31번이나 언급하며 환헤지를 강조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국민연금은 2041년부터 적자로 돌아설 것으로 예상됩니다. 즉, 연금을 주기 위해 그동안 모아둔 해외 자산을 팔아야 할 시기가 온다는 뜻이죠. 지금은 달러를 사느라 환율을 올리지만, 그때가 되면 반대로 수백조 원의 달러를 한꺼번에 팔아야 할 수도 있습니다. 20년 뒤에는 지금과는 정반대로 원화가 너무 비싸져서 수출 기업들이 비명을 지르는 상황이 올 수도 있는 겁니다.


결국 지금의 고환율은 단순한 위기가 아니라, 우리 경제가 투자 대국으로 체질이 바뀌면서 겪는 성장통이자 구조적인 변화입니다. 환율 1,400원은 이제 비정상이 아니라 새로운 표준일지도 모릅니다. 이제는 환율 숫자에 일희일비하기보다, 밖으로 나간 돈이 한국으로 다시 돌아오게 만들 매력적인 유인책을 고민하고, 다가올 국민연금의 거대한 파도에 대비해 방파제를 쌓아야 할 시점입니다. 부자 나라의 가난한 환율, 이 역설을 풀지 못하면 우리는 서류상 부자에 머물게 될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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