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성은 90년대, 지갑은 전쟁터
어제 FOMC는 묘한 여운을 남겼습니다. 연준은 금리를 내리면서도 내년 성장률 전망을 대폭 올렸습니다. 파월 의장은 그 근거로 1990년대를 소환했죠. AI 혁명이 생산성을 끌어올려 물가 상승 없는 고성장을 가능하게 할 거라는, 이른바 골디락스의 귀환을 선언한 셈입니다. 시장 일각에서는 환호했지만, 채권 시장은 냉담했습니다. 아니, 오히려 발작을 일으키며 30년물 금리를 4.8%까지 끌어올렸습니다. 도대체 왜 시장은 연준의 장밋빛 전망에 배팅하지 않는 걸까요?
팩트체크를 해보면 파월 의장의 말이 틀린 건 아닙니다. 데이터상으로도 미국의 노동생산성은 1년 전보다 3% 가까이 오르며 1990년대 인터넷 혁명기와 비슷한 궤적을 그리고 있습니다. AI가 기업의 효율성을 높여주고 있는 건 분명한 사실이고, 이는 물가를 낮추는 좋은 요인입니다. 여기까지는 연준의 말이 맞습니다.
하지만 연준이 말하지 않은, 혹은 애써 외면한 결정적인 차이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정부의 지갑 사정, 즉 재정입니다. 1990년대 후반 미국은 냉전이 끝나고 IT 붐이 일면서 재정 흑자를 기록했습니다. 정부가 돈을 벌어서 빚(국채)을 갚던 시절이었죠. 국채가 귀해지니 금리는 자연스럽게 내려갔고, 이것이 생산성 혁명과 맞물려 골디락스를 완성했습니다.
반면 2025년의 미국은 어떤가요? 전시 상황도 아닌데 GDP 대비 재정 적자가 6%를 넘습니다. 흑자는커녕 빚을 내서 빚을 막는 형국이라 국채를 미친 듯이 찍어내고 있죠. 1990년대가 국채 희소성의 시대였다면, 지금은 국채 과잉의 시대입니다. 아무리 AI가 물건값을 낮춰도, 정부가 쏟아내는 막대한 국채 물량이 돈의 값(금리)을 밀어 올리고 있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어제 금리 인하에도 불구하고 장기 금리가 튀어 오른 진짜 이유, 텀 프리미엄(기간 프리미엄)의 습격입니다. 텀 프리미엄은 투자자들이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해 요구하는 웃돈입니다. 90년대에는 재정이 건전하니 이 웃돈이 거의 없었지만, 지금은 재정 적자가 심각하니 투자자들이 국채를 보유하는 대가로 0.78% 포인트나 되는 막대한 웃돈을 요구하고 있는 겁니다.
결국 지금 우리는 아주 위험한 착시 속에 있습니다. 연준은 생산성이라는 한쪽 날개만 보고 90년대처럼 날아오를 수 있다고 믿지만, 시장은 재정 적자라는 다른 쪽 날개가 부러져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생산성은 90년대를 닮았을지 몰라도, 정부의 재정 상태는 전쟁터와 다름없습니다. 연준이 기준금리를 내려도 우리가 체감하는 대출 금리가 좀처럼 내려가지 않는 건, 바로 이 망가진 재정이라는 닻이 금리를 꽉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