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할 것 같던 믿음이 깨질 때

시장 내러티브의 생애주기

by 구미잉

주변에 미국 주식을 하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시장을 지배하는 거대한 ‘믿음’의 힘을 느끼곤 하는데요. 한때는 ‘미국 예외주의’가 진리였다가, 어느새 ‘Sell America’가 상식이 되기도 하죠. 이러한 거대한 흐름, 즉 ‘시장 내러티브’는 어떻게 태어나고, 자라나고, 또 사라지는 걸까요? 오늘은 그 생애주기를, 우리에게 가장 아픈 기억으로 남아있는 2021년의 ‘일시적 인플레이션’ 내러티브를 통해 복기해 보려 합니다.


모든 내러티브는 ‘불확실성’이라는 안갯속에서 태어납니다. 2021년 초, 팬데믹에서 막 벗어난 경제는 곳곳에서 물가가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시장은 혼란에 빠졌죠. ‘이 인플레이션은 진짜일까? 연준이 곧 금리를 올리는 것 아닐까?’ 모두가 두려워할 때, 연준과 재무부는 아주 단순하고 매력적인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인플레이션은 코로나로 인한 일시적인 공급망 병목 현상일 뿐, ‘일시적(Transitory)’입니다. 곧 정상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이것은 시장이 가장 듣고 싶어 했던 이야기였습니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명쾌한 설명이자, ‘제로 금리’와 ‘유동성 파티’가 계속될 것이라는 달콤한 약속이었죠.


하나의 내러티브가 힘을 얻기 시작하면, 모든 현상들이 그 내러티브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해석되기 시작합니다. 2021년 중반, 매달 발표되는 소비자물가지수(CPI)는 계속해서 높게 나왔지만, 시장은 이를 ‘일시적’이라는 프레임 안에서 해석했습니다. “공급망 문제 때문이야”, “중고차 가격 때문이야” 라면서 요. 이 내러티브는 너무나 강력해서, 반대의 목소리는 ‘시장을 모르는 사람’들의 외침으로 치부되었습니다. ‘나쁜 뉴스(경기 둔화 우려)는 좋은 뉴스(연준의 유동성 공급)’라는 공식이 힘을 얻었고, 시장은 인플레이션 공포를 애써 외면하며 상승 랠리를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영원한 내러티브는 없었는데요. 이야기가 더 이상 현실을 설명하지 못하는 ‘불편한 진실’들이 계속해서 쌓이면, 믿음에는 균열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2021년 하반기, CPI 숫자는 ‘일시적’이라고 보기엔 너무나 높고 끈질기게 나타났습니다. ‘일시적’이라는 단어의 유효기간이 끝나가고 있었죠. 그리고 마침내, 이야기를 만들었던 사람 스스로가 이야기를 부정하는 순간, 내러티브는 붕괴합니다. 2021년 11월, 제롬 파월 의장이 의회에서, 인플레이션이 예상보다 훨씬 더 끈질기다는 것을 인정하며 “이제 ‘일시적’이라는 단어를 거둬들일 때가 된 것 같다”라고 말한 순간이 바로 그 변곡점이었습니다. 왕이 스스로 ‘나는 벌거벗었다’고 외친 셈이죠.


하나의 내러티브가 무너지면, 그 자리에는 곧바로 정반대의 내러티브가 들어섭니다. ‘일시적 인플레이션’의 시대가 끝나자, ‘인플레이션은 통제 불능의 괴물이며, 연준은 폴 볼커가 되어야 한다’는 새로운 내러티브가 시장을 지배하기 시작했습니다. ‘Bad is Good’의 시대는 막을 내렸고, ‘Bad is Bad(성장 둔화도 나쁘고, 물가도 나쁘다)’의 시대가 열리며 2022년의 고통스러운 하락장을 이끌었습니다.


역사는 똑같이 반복되지는 않지만, 비슷한 운율을 갖는다고 하죠. 2021년의 고통스러운 기억은, 지금 시장을 지배하는 낙관적인 내러티브 역시 영원할 수는 없다는 점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그렇다고 해서 시장을 비관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는데요. 다만, 지금의 이야기에 완전히 매몰되기보다는, 다음 내러티브가 시작될 가능성을 항상 염두에 두고 다양한 시나리오에 대비하는 지혜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지금 내가 믿고 있는 이 이야기가 바뀔 때, 나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이 질문을 항상 가슴에 품고 시장을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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