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통제'에 중독된 시장의 끝은?
어제(8월 14일) 미국 시장, 참 이상하지 않았나요? 겉으로만 보면 S&P 500 지수는 사상 최고치를 또 경신했으니 강세장이 이어지는구나 싶으셨을 텐데요. 그런데 그 속을 들여다보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마치 평온한 호수 밑에서 뜨거운 용암이 부글거리는 듯한 모습이었죠.
사건의 발단은 개장 전에 발표된 7월 생산자물가지수(PPI)였습니다. 시장은 기껏해야 0.2% 오를 거라고 봤는데, 뚜껑을 열어보니 무려 0.9%나 급등했는데요. 예상치의 4배가 넘는 '쇼크' 수준이었죠. 변동성이 큰 항목을 뺀 근원 PPI마저 0.9%나 뛰었고요. 이건 단순한 숫자의 문제가 아닙니다. 시장이 그토록 믿고 있던 '인플레이션은 잡혀가고 있다'는 이야기의 전제 자체를 흔들어버리는, 아주 불편한 데이터죠. 당연히 시장은 하락 출발했습니다. 채권 금리는 정직하게 반응하며 꽤 큰 폭으로 올랐고요. 여기까지는 우리가 아는 경제학 교과서 그대로였죠.
그런데 이상한 일은 그다음부터 벌어졌습니다. 그렇게 큰 충격을 받았던 주식 시장이 슬금슬금 낙폭을 줄이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제자리로 돌아와 버린 겁니다. 심지어 S&P 500 지수는 상승 마감하며 사상 최고치를 갈아치웠습니다. 나쁜 소식이 나왔는데, 시장이 그걸 그냥 못 본 척 눈을 감아버린 셈이죠.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요?
지금 시장을 지배하는 단 하나의 키워드를 꼽으라면, 그건 바로 '연준의 금리 인하'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일 겁니다. 시장은 이미 "경기 둔화 신호가 나오고 있으니, 연준은 9월에 무조건 금리를 내릴 거야"라는 결론을 내려놓은 듯합니다. 그러다 보니 모든 경제 지표를 '금리 인하'라는 단 하나의 렌즈로만 해석하는 거죠. 어제의 PPI 쇼크마저도 "이건 일시적인 소음일 뿐, 연준의 결심을 바꾸진 못해"라고 애써 외면해 버린 겁니다.
이런 현상을 우리는 'Bad is Good', 즉 나쁜 소식이 오히려 좋은 소식이 되는 역설적인 상황이라고 부릅니다. 경기가 나빠져야 연준이 돈을 푼다는 논리죠. 하지만 이 논리가 작동하려면 아주 중요한 전제 조건이 하나 필요합니다. 바로 '인플레이션이 통제되고 있다'는 믿음이죠. 그런데 어제의 PPI는 바로 그 믿음에 균열을 내는 강력한 경고등이었는데요. 특히 이번 물가 상승을 주도한 것이 유가나 중고차가 아니라, 한번 오르면 잘 내려오지 않는 '서비스' 물가였다는 점이 더욱 찝찝합니다.
비유를 들어볼까요? 지금 시장은 '경기 둔화'라는 만성 통증을 앓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통증을 잠재우기 위해 '금리 인하'라는 강력한 '진통제'만 애타게 찾고 있죠. 그런데 어제 나온 혈액검사 결과지(PPI)를 보니, 통증의 진짜 원인이 '만성 염증'(인플레이션) 때문이며, 염증 수치가 아주 위험한 수준이라고 경고등이 켜진 겁니다. 의사(연준) 입장에서는 당장의 통증을 잡자고 진통제를 계속 처방했다가는, 근본 원인인 염증을 더 악화시켜 나중에 환자를 더 큰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상황이 된 거죠. 하지만 시장은 "괜찮아, 염증 치료는 나중 문제고 일단 아픈 것부터 해결해 줘!"라고 떼를 쓰는 환자와 같습니다.
우리는 이런 논리가 처참하게 깨졌던 경험을 불과 몇 년 전에 했습니다. 바로 2022년이었죠. 당시에도 시장은 경기 둔화 신호를 보며 연준의 태도 변화를 기대했지만, 9%가 넘는 인플레이션 수치 앞에서 그 기대는 산산조각 났습니다. '만성 염증'이 너무 심각해지자, 연준은 '진통제' 처방을 중단하고 고통스러운 수술(강력한 긴축)에 나설 수밖에 없었고, 시장은 큰 폭의 조정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어제 시장의 모습은 마치 강력한 진통제 효과에 취해 잠시 고통을 잊은 것과 같아 보입니다. 금리 인하라는 강력한 기대감에 취해 인플레이션이라는 불편한 근본 원인을 외면하고 있죠. 단기적으로는 이 진통제 효과가 시장을 더 밀어 올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염증 수치가 계속 오르는데도 이를 무시하고 진통제에만 의존한다면, 그 끝은 결국 더 큰 고통과 부작용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쩌면 시장은 지금 아주 위험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것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