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준의 새로운 나침반, '유연성'이라는 함정

by 구미잉

이번 주로 다가온 잭슨홀 미팅에 시장의 모든 시선이 쏠리고 있는데요. 지난 5년간 연준 통화정책의 나침반 역할을 했던 ‘평균물가목표제(FAIT)’가 사실상 실패로 끝났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죠. 이제 연준은 앞으로의 5년을 이끌어갈 새로운 나침반을 선보여야만 합니다.


최근 파월 의장을 비롯한 여러 연준 인사들의 발언을 종합해 보면, 그 새로운 나침반의 핵심 키워드는 바로 ‘유연성(Flexibility)’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과거처럼 하나의 고정된 규칙에 얽매이기보다는, 경제 상황에 맞춰 여러 시나리오별로 다르게 대응하겠다는 것이죠. 예를 들어 ‘고성장-고물가’ 상황에서는 매파적으로, ‘저성장-저물가’ 상황에서는 비둘기파적으로 움직이겠다는 계획을 미리 알려주겠다는 겁니다. 언뜻 들으면 참 합리적이고 세련된 방식처럼 들립니다. 시장의 불확실성을 줄여주는 친절한 가이드맵 같기도 하고요.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그 ‘유연성’이라는 말이 시장에 약이 될까요, 아니면 독이 될까요? 그 유연성이라는 말이, 어쩌면 ‘갈팡질팡’의 다른 이름으로 비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기 때문입니다.


바로 지난 금요일(8월 15일) 시장이 그 완벽한 예시를 보여줬습니다. 실제 소비는 뜨거운데, 소비자의 마음은 차갑게 식어버린 데이터가 동시에 나왔죠. 자, 이런 애매한 상황은 대체 어떤 시나리오에 해당할까요? 이제 시장은 경제 데이터뿐만 아니라, “연준이 이 데이터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라는 2차 방정식을 풀어야만 합니다. 결국 ‘지금 어떤 시나리오인가’를 판단하는 것은 연준의 ‘재량’이 되고, 시장은 연준 위원들의 발언 하나하나에 더 크게 출렁이는, 예측 불가능성이 더 커지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 ‘유연한 프레임워크’는 2021년 인플레이션 예측 실패로 호되게 당했던 연준의 자기 방어 수단일지도 모릅니다. 나중에 틀렸다고 비판받을지언정, 현재의 분석에 기반해 명확한 방향을 제시하고 그 결과를 책임지는 것이 중앙은행의 역할 아닐까요? 모호함 뒤에 숨어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은, 단기적으로는 비판을 피할 수 있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연준의 가장 소중한 자산인 ‘신뢰’를 갉아먹는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1980년대 폴 볼커의 위대한 전쟁을 기억합니다. 그의 힘은 유연성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인플레이션을 잡겠다”는 단 하나의 목표를 향해, 그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결단력’을 보여주었죠. 그의 정책은 고통스러웠지만, 시장은 적어도 그의 다음 행보를 명확하게 예측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그 예측 가능성이 연준의 신뢰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결국 중앙은행의 신뢰는 모든 상황에 대한 메뉴판을 제시하는 복잡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원칙을 지키겠다는 단순하고 우직한 책임감에서 비롯됩니다. 이번 잭슨홀에서 연준이 선보일 새로운 나침반이, 시장의 혼란을 잠재우는 명확한 길잡이가 될지, 아니면 해석의 여지만 늘리는 더 복잡한 수수께끼가 될지,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신중하게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불안한 마음과 뜨거운 지갑, 시장의 동상이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