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사이, 스콧 베센트 미 재무장관의 입이 아주 이례적으로 동맹국인 일본을 향했습니다. 그는 일본은행(BOJ)을 향해 "시류에 뒤처져 있다"며 "금리를 인상할 필요가 있다"라고 아주 노골적인 압박을 가했죠. G7 국가 사이에서, 그것도 재무장관이 특정 국가의 중앙은행을 콕 집어 정책 방향을 지시하는 것은 극히 드문 일입니다. 단순한 외교적 발언을 넘어선, 어떤 거대한 게임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처럼 보이기도 하는데요.
미국은 왜 갑자기 일본을 압박하는 걸까요? 그 속내를 들여다보려면 트럼프 행정부의 가장 중요한 경제 목표를 이해해야 합니다. 바로 ‘미국 제조업의 부활’과 ‘수출 증대’죠.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가장 빠르고 강력한 무기가 바로 ‘약달러’입니다. 달러 가치가 내려가야 미국산 제품의 가격 경쟁력이 살아나고, 자연스럽게 미국 내 공장이 활기를 띠게 되니까요.
그렇다면 달러를 약하게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달러의 가치를 나타내는 달러 인덱스(DXY)의 구성을 살펴보는 겁니다. 달러 인덱스는 유로, 엔, 파운드 등 6개 통화 대비 달러의 가치를 보여주는데, 이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유로화(57.6%)입니다. 하지만 유럽은 미국이 함부로 압박하기 어려운 상대죠. 중국 위안화는 이미 무역전쟁의 한복판에 있고요. 결국 미국의 눈에 들어온 가장 만만한 상대가 바로 두 번째로 높은 비중(13.6%)을 차지하는 일본 엔화인 셈입니다. 안보적으로 미국에 크게 의존하고 있고, 경제적으로도 취약한 일본이야말로 달러 약세를 만들기 위한 ‘최소 저항 경로’인 것이죠.
하지만 미국의 이런 요구는 일본 경제의 가장 아픈 곳을 찌르는 ‘체크메이트’와 같습니다. 일본 경제는 지난 30년간 ‘엔저(약한 엔화)’라는 산소호흡기에 의존해 겨우 버텨왔습니다. 엔화가 약해야 도요타 같은 수출 기업들이 가격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었죠. 만약 미국의 압박에 굴복해 금리를 올리고 엔화 강세를 용인한다면, 일본의 수출은 무너지고 경제는 다시 깊은 침체의 늪에 빠질 수 있습니다. GDP의 230%가 넘는 천문학적인 정부 부채 역시 금리 인상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거대한 족쇄입니다. 금리를 올리는 순간, 일본 정부가 내야 할 이자 부담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국가 재정과 금융 시스템 전체를 마비시키는 ‘둠 루프(doom loop)’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일본은 미국의 요구를 들어주자니 경제적 자멸에 이르고, 거부하자니 미국의 무역 보복이라는 외교적 파국을 맞이할 수 있는 진퇴양난의 상황에 놓였는데요.
이 사건은 단순히 미국과 일본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는 미국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언제든 환율을 무기화할 수 있다는, ‘돌아온 환율전쟁의 시대’를 예고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1985년, 미국이 일본과 독일을 압박해 달러 약세를 유도했던 ‘플라자 합의’의 유령이 떠오르기도 하죠. 다만 그때는 ‘합의’라는 형식을 빌렸지만, 지금은 노골적인 ‘압박’이라는 점이 다릅니다.
이 거대한 힘의 충돌 속에서 글로벌 외환시장의 변동성은 극도로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는 일본과 수출 시장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는 우리에게 양날의 검으로 다가올 텐데요. 엔화가 강세가 되면 자동차, 선박 등 일본과 겹치는 품목에서 우리 기업의 가격 경쟁력은 살아나겠지만, 동시에 우리가 일본에서 수입하는 핵심 부품·소재의 가격이 올라 생산 비용 부담이 커지는 딜레마에 빠지게 되죠. 엔화의 향방이 앞으로 우리 경제에 어떤 파장을 몰고 올지, 그 어느 때보다 면밀하게 지켜봐야 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