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플라자 합의는 일본 경제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는데요. 급격한 엔화 강세로 인한 ‘엔고 불황’을 막기 위해, 일본은행은 1986년부터 1년여 만에 금리를 다섯 차례나 인하하며 사상 최저 수준인 2.5%까지 내리는 극약 처방을 내놓았죠. 이 결정은 일본 경제에 전례 없는 유동성의 홍수를 불러왔습니다. 하지만 엔고로 인해 제조업의 투자 매력이 떨어진 상황에서, 갈 곳을 잃은 막대한 돈은 더 빠르고 쉬운 수익을 좇아 주식과 부동산 시장으로 흘러 들어갔습니다.
그렇게 역사상 가장 거대한 버블의 서막이 올랐습니다. 당시 일본 사회는 ‘세계 1등 일본(Japan as No. 1)’이라는 자신감에 취해 있었습니다. 이 강력한 낙관론은 ‘일본의 땅값은 절대 떨어지지 않는다’는 ‘토지 불패 신화’와 결합하여 시장의 모든 이성을 마비시켰죠. 은행들은 규제 완화의 흐름 속에서 부동산 개발업체에 경쟁적으로 대출을 늘렸고, 이는 불길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습니다.
숫자들은 당시의 광기를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는데요. 1985년 말 13,000 수준이었던 닛케이 주가 지수는 불과 4년 만인 1989년 말, 38,915라는 역사적 고점을 기록하며 3배나 폭등했습니다. 당시 일본 주식의 평균 주가수익비율(PER)은 60배를 훌쩍 넘어서며 다른 선진국 시장의 몇 배에 달했습니다. 부동산 가격은 더욱 비현실적이었습니다. 당시 “도쿄의 땅을 전부 팔면 미국 전체를 살 수 있다”는 말은 단순한 농담이 아니었죠. 버블의 정점에서 도쿄 황궁 부지의 가치가 캐나다 국토 전체의 가치보다 높게 평가될 정도였으니까요. 기업들은 본업인 제조업보다 ‘재테크(財テク)’라 불리는 금융 투기로 더 많은 돈을 벌었고, 평범한 시민들까지 빚을 내 주식과 부동산 시장에 뛰어들었습니다.
영원한 축제는 없었는데요. 자산 가격이 통제 불가능한 수준에 이르자, 뒤늦게 정신을 차린 일본은행은 1989년 5월부터 1년여 만에 금리를 2.5%에서 6.0%까지 가파르게 인상하기 시작했습니다. 너무 늦었고, 또 너무 빨랐던 이 충격 요법은 광란의 파티에 찬물을 끼얹는 격이었죠. 1990년 새해가 밝자마자 도쿄 증시는 대폭락을 시작했고, 닛케이 지수는 2003년에 8,000선 아래로 추락하며 고점 대비 80%의 가치가 증발했습니다. 부동산 시장의 붕괴는 더 길고 고통스러웠습니다. 땅값은 15년 연속으로 하락하며 ‘토지 불패 신화’에 종언을 고했습니다.
문제는 버블 붕괴 그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진짜 비극은 그 이후의 정책 대응 실패에 있었죠. 일본의 은행들은 담보 가치가 폭락한 막대한 부실채권을 끌어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규모 파산이 가져올 사회적 충격을 두려워한 정부와 은행은, 부실을 정리하는 고통스러운 수술 대신 실질적으로 파산 상태인 기업들에게 계속 돈을 빌려주며 생명을 연장시키는 길을 택했습니다. 가장 약한 금융기관도 낙오하지 않도록 강한 기관들이 함께 속도를 맞추는, 이른바 ‘호송선단 방식’의 관행이 ‘좀비 기업’을 탄생시킨 겁니다.
이 결정은 일본 경제를 수십 년간 지속된 ‘디플레이션’과 저성장의 늪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버블 붕괴로 자산 가치는 폭락했지만 빚은 그대로 남은 기업과 가계는, 더 이상 돈을 빌려 투자하거나 소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유일한 목표는 이익 극대화가 아닌, 빚을 갚아 망가진 재무 상태를 복구하는 ‘부채 최소화’가 되었죠. 경제 전체가 빚 갚기에만 몰두하는 ‘대차대조표 불황(Balance Sheet Recession)’이 시작된 겁니다. 중앙은행이 금리를 제로까지 낮춰도 아무도 돈을 빌리려 하지 않는, 통화 정책이 완전히 무력화되는 끔찍한 함정에 빠진 것입니다.
결국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남겨주는데요. 거대한 버블의 붕괴 이후, 고통스럽더라도 부실을 신속하게 정리하는 ‘창조적 파괴’를 외면한 대가가 얼마나 참혹했는지를 말이죠. 이 오래된 거울은, 오늘날 또 다른 자산 버블의 위험에 직면한 세계 경제에 여전히 유효한 경고를 보내고 있는 것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