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의 눈물, 아시아 외환위기와 IMF

by 구미잉

1990년대 중반, 세계 경제의 찬사는 온통 아시아를 향해 있었습니다. 대한민국을 필두로 한 ‘아시아의 호랑이들(Asian Tigers)’은 경이로운 성장률을 기록하며 ‘아시아의 기적’이라는 신화를 써 내려갔죠. 1995년 1인당 국민소득 1만 달러를 달성하고, 이듬해인 1996년에는 ‘선진국 클럽’이라 불리는 OECD에 가입했을 때, 그 자신감은 절정에 달했는데요.


하지만 이 화려한 성공의 이면에는 치명적인 균열이 숨어 있었습니다. 정부 주도의 성장 모델은 정부, 은행, 재벌 간의 긴밀한 유착 관계를 만들었고, 이는 ‘대기업은 망하지 않는다’는 ‘대마불사’의 믿음과 함께 심각한 도덕적 해이를 낳게 되었죠. 재벌들은 수익성보다는 외형 확장에만 몰두하며 빚을 내어 무분별한 투자를 이어갔죠. 여기에 김영삼 정부가 추진한 성급한 금융 자유화는, 저금리의 해외 단기 자본이 한국으로 밀려 들어오는 수문을 활짝 열어젖혔습니다. 기업들은 환율 변동의 위험을 무시한 채 달러 빚을 내어 사업을 확장했고, 정부는 ‘국민소득 1만 달러’라는 상징을 지키기 위해 원화 가치를 인위적으로 높게 유지하며 귀중한 외환보유고를 낭비하고 있었습니다.


모래 위에 지어진 성은 작은 충격에도 무너지는 법이죠. 1997년 7월, 태국에서 시작된 바트화 폭락 사태는 국제 투기 자본에게 아시아 경제의 취약점을 일깨우는 ‘모닝콜’이 되었습니다. 태국에서 확인된 문제점들, 즉 과도한 단기 외채와 부실한 금융 시스템이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서도 똑같이 발견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국제 자본은 썰물처럼 빠져나가기 시작했죠. 위기는 전염병처럼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를 거쳐 마침내 한국으로 번져나갔습니다.


1997년 초 한보철강의 부도를 시작으로 위기의 전조는 계속되었지만, 정부와 기업, 국민 모두 ‘설마’ 하는 안일함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외국 은행들이 일제히 빌려준 돈을 회수하기 시작하자, 한국의 외환보유고는 한 달여 만에 바닥을 드러냈습니다. 11월 17일, 원/달러 환율은 심리적 저항선이던 1,000원을 돌파했고, ‘국가 부도의 날’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죠. 결국 11월 21일,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공식 요청하기에 이릅니다.


IMF의 구제금융은 당장 급한 불을 끌 수 있는 유일한 소방수였지만, 그 대가는 혹독했습니다. IMF는 자금을 지원하는 조건으로 한국 경제 시스템에 대한 대대적인 수술을 요구했죠. 30%에 육박하는 초고금리 정책, 부실기업과 금융기관의 퇴출, 그리고 평생직장의 신화를 무너뜨린 정리해고제 법제화 등이 바로 그 ‘고통스러운 처방전’이었습니다.


이 처방이 과연 최선이었는지를 두고는 여전히 논쟁이 뜨거운데요. 당시 세계은행 부총재였던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IMF가 한국의 위기를 민간 부문의 갑작스러운 자본 유출로 인한 ‘유동성 위기’가 아닌, 정부의 재정 파탄에서 비롯된 ‘재정 위기’로 오진했다고 맹비판했습니다. 이미 과도한 부채로 신음하던 기업들에게 초고금리는 유동성을 공급하기는커녕, 멀쩡한 기업들마저 연쇄적으로 파산시키는 ‘독약’과 같았다는 것이죠. 불난 집에 휘발유를 붓는 격인 긴축 정책을 강요했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분명한 것은, ‘IMF 시대’가 한국 사회에 깊은 상처와 영구적인 변화를 남겼다는 사실입니다. ‘금 모으기 운동’으로 상징되는 국민적 단합을 통해 위기를 조기에 극복했지만, 그 과정에서 수많은 중산층이 붕괴했고 비정규직이 보편화되었으며 사회 양극화는 돌이킬 수 없이 심화되었습니다. 1997년의 눈물은 우리에게 거시 경제의 건전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준비되지 않은 세계화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뼈아프게 가르쳐준,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위기의 거울’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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