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아시아 외환위기의 여진이 채 가시지 않은 세계 금융 시장에 또 다른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는데요. 이번 위기의 진원지는 신흥국이 아닌, 월스트리트의 심장부, 그중에서도 가장 똑똑하다고 여겨졌던 집단이었습니다. 바로 롱텀캐피털매니지먼트(LTCM)라는 이름의 헤지펀드였죠.
LTCM은 단순한 헤지펀드가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금융계의 ‘어벤저스’라 불리는 드림팀이었습니다. ‘채권의 왕’이라 불리던 존 메리웨더를 필두로, 현대 금융 이론의 토대를 닦은 공로로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로버트 머튼과 마이런 숄즈, 그리고 전직 연준 부의장까지 합류했죠. 이들의 이름값은 그 자체로 ‘절대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는 강력한 신뢰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들의 핵심 무기는 ‘시장 중립 차익거래’라는, 이론적으로는 거의 위험이 없는 완벽한 전략처럼 보였습니다. 시장의 방향에 베팅하는 대신, 서로 관련된 두 자산 간의 미세한 가격 차이가 결국 정상으로 ‘수렴’할 것이라는 데 베팅하는 방식이었죠. 마이런 숄즈는 자신들의 전략을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동전들을 진공청소기로 빨아들이는 것"에 비유했습니다. 문제는 이 미세한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그들이 사용한 방법이었습니다. 바로 ‘레버리지’였죠. LTCM은 자기 자본의 30배, 장부에 드러나지 않는 파생상품까지 포함하면 실질 레버리지가 100배가 넘는 극단적인 차입을 일으켜 투자를 감행했습니다.
완벽해 보였던 이 돈 버는 기계의 방아쇠를 당긴 것은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블랙 스완’이었습니다. 1998년 8월 17일, 러시아가 국가 부도를 선언한 겁니다. LTCM의 정교한 수학 모델은 주요 국가가 자국 통화 부채에 대해 채무 불이행을 선언할 확률을 사실상 '0'으로 간주하고 있었죠. 이 사건은 전 세계 금융 시장에 패닉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투자자들은 이성적인 판단 대신 모든 위험자산을 내던지고, 오직 가장 안전한 미국 국채로만 몰려드는 ‘안전자산 선호 현상’을 보였습니다.
이러한 시장의 움직임은 LTCM의 모든 베팅과 정반대였습니다. 그들이 수렴할 것이라 믿었던 모든 가격 차이는 역사상 유례없는 수준으로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레버리지의 역습은 끔찍했습니다. 자산 가치가 단 3%만 하락해도 자본 전체가 사라지는 구조에서, 8월 한 달 만에 자본의 44%가 증발했고, 9월에는 하루에 5억 5천만 달러가 넘는 손실을 기록하며 파산 직전까지 내몰렸습니다.
문제는 LTCM 하나의 파산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LTCM은 월스트리트의 거의 모든 대형 투자은행들과 1조 2,500억 달러가 넘는 파생상품 계약으로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습니다. 만약 LTCM이 파산하여 보유 자산을 시장에 헐값으로 쏟아낸다면, 자산 가격은 연쇄적으로 폭락하고 거래 상대방이었던 은행들까지 줄도산하며 금융 시스템 전체가 마비될 수 있었죠. 바로 ‘시스템 리스크’의 공포였습니다.
결국 뉴욕 연준이 직접 나서 월스트리트의 주요 은행들을 소집했고, 그들의 돈으로 LTCM을 구제하는 전례 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 사건은 금융 시장에 아주 위험한 선례를 남겼는데요. 바로 ‘대마불사(Too Big to Fail)’, 즉 너무 커서 망하게 둘 수 없다는 논리였죠. 이 믿음은 금융기관들의 도덕적 해이를 부추겼고, 10년 뒤 더 큰 재앙인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LTCM의 붕괴는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남깁니다. 아무리 정교한 수학적 모델도, 예측 불가능한 인간의 집단적 공포 앞에서는 한낱 종이호랑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말이죠. 그리고 시스템 전체를 인질로 잡을 수 있는 거대한 위험은, 종종 가장 똑똑한 사람들의 오만 속에서 조용히 자라난다는 것을 이 오래된 거울은 보여주고 있는 것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