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오랫동안 주식과 채권을 ‘보완재’라고 배워왔죠. 주식이 위험한 대신 높은 수익을, 채권은 안전한 대신 낮은 수익을 주는, 포트폴리오의 균형을 맞춰주는 짝꿍처럼요. 하지만 최근 시장을 보면 이 공식이 깨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주식은 연일 고공행진을 하는데, 안전자산의 대명사였던 채권은 힘을 쓰지 못하고 있죠.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걸까요? 어쩌면 우리는 지금, 정부와 중앙은행이 ‘성장’이라는 단 하나의 목표를 위해 ‘물가 안정’, 즉 채권의 가치를 희생시키는 거대한 시대적 전환의 한복판에 서 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이 문제의 근원에는 정부와 중앙은행의 ‘동상이몽’이 있습니다. 중앙은행의 최우선 목표는 ‘물가 안정’이지만, 선거로 평가받는 정부의 최우선 목표는 ‘성장’과 ‘고용’이죠. 이 두 목표는 종종 충돌합니다. 마치 한 집안에서, 중앙은행이라는 엄마는 “신용카드 빚(인플레이션)이 너무 많으니 씀씀이를 줄이자”라고 걱정하는데, 정부라는 아빠는 “애들 기죽게 왜 그래! 일단 파티(성장)부터 하고 빚은 나중에 생각하자”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상황입니다. 과거에는 이 둘 사이에 어느 정도 균형이 있었지만, 지금은 정부가 ‘성장’에 목을 맬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이유들이 생겨났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바로 팬데믹 이후 각국 정부가 짊어지게 된 천문학적인 빚입니다. 이 빚을 갚는 가장 손쉬운 방법 중 하나는 바로 ‘인플레이션’이죠. 물가가 오르면 돈의 가치가 떨어지니, 빚의 실질적인 무게도 가벼워지는 효과가 있습니다. 여기에 고령화로 인해 연금이나 의료비처럼 정부가 써야 할 돈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납니다. 이 비용을 감당하려면 결국 경제가 성장해 세금이 더 많이 걷혀야만 하죠.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 정부는 약간의 인플레이션을 용인해서라도 성장을 택하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습니다.
정부가 성장을 위해 인플레이션을 용인하는 환경, 이것을 경제학에서는 ‘금융 억압(Financial Repression)’이라고 합니다. 정부와 중앙은행이 암묵적으로 협력하여 금리를 인플레이션보다 낮은 수준으로 유지하는 것이죠. 이는 마치 구멍 뚫린 물통과 같습니다. 은행 예금이나 채권에 돈을 넣어두면 이자가 붙어 물이 채워지는 것처럼 보이지만(명목 금리), 인플레이션이라는 보이지 않는 구멍으로 그보다 더 많은 물이 새어 나가고 있는(실질 금리 마이너스) 상황입니다. 이 과정에서 부(富)는 예금자나 채권 투자자로부터 정부(가장 큰 빚쟁이)에게로 조용히 이전됩니다. 사실상 ‘보이지 않는 세금’을 걷는 셈이죠.
이러한 ‘금융 억압’의 시대에, 자산 시장의 규칙은 완전히 바뀝니다. 인플레이션은 채권의 가장 큰 적입니다. 채권의 가치가 구조적으로 훼손되는 환경이 만들어지면서 ‘채권의 눈물’이 시작되는 겁니다. 반면, 인플레이션을 제품 가격에 전가할 수 있는 기업(주식)이나 물가 상승과 함께 가치가 오르는 부동산, 원자재(실물자산)는 상대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되죠. 지난 40년간 이어져 온 채권 투자의 황금기가 저물고, 포트폴리오의 무게 중심을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하는 시대가 온 것일 수 있습니다. ‘안전자산’의 정의가 흔들리는 지금, 우리는 과연 어디에서 투자의 닻을 내려야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