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어떻게 당신의 돈을 조용히 가져가는가

by 구미잉

요즘 미국에서는 트럼프 행정부와 연준 사이의 갈등이 시장의 가장 큰 화두가 되고 있죠. 성장을 위해 금리를 내려야 한다는 행정부와, 물가 안정을 위해 신중해야 한다는 연준의 팽팽한 줄다리기는 이제 익숙한 풍경이 되었는데요. 그런데 최근 베센트 재무장관이 조금은 결이 다른 이야기를 꺼내놓았습니다. 연준의 기준금리와는 별개로, 행정부가 직접 10년 만기 장기 국채 금리를 낮추는 데 집중하겠다는 것이었죠. 정부가 직접 시장 금리를 통제하겠다는 이 말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어쩌면 우리는 지금, 정부가 세금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도 세금을 걷는 아주 오래되고 교묘한 정책, 바로 '금융억압(Financial Repression)'의 서막을 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금융억압이라는 말이 조금은 생소하게 들리실 겁니다. 가장 쉽게 비유하자면, 이는 정부가 징수 사실을 알리지 않고 걷어가는 ‘보이지 않는 세금(Stealth Tax)’과 같습니다. 정부는 막대한 빚을 지고 있는 세상에서 가장 큰 채무자 중 하나죠. 당연히 이 빚에 대한 이자를 최대한 싸게 내고 싶을 겁니다. 이때 정부는 시장에 보이지 않는 손을 뻗어, 시중에 흘러 다니는 돈들이 원래 가야 할 곳, 즉 더 높은 수익을 낼 수 있는 곳으로 가지 못하게 막고, 그 돈을 정부의 빚을 갚는 데 쓰이도록 물길을 돌려버립니다. 바로 이 과정에서 예금자나 채권 투자자처럼 돈을 빌려준 사람들의 부가, 정부처럼 돈을 빌린 사람에게로 조용히 이전되는 현상이 나타나죠.


그렇다면 대체 어떤 원리로 예금자의 손해가 정부의 빚을 갚는 데 쓰인다는 것일까요? 이 연결고리를 이해하는 것이 금융억압의 핵심입니다. 가령 물가상승률이 5%인데, 정부가 시장에 개입해 예금 금리를 2% 수준으로 억누르는 상황을 상상해 보시죠. 은행에 100만 원을 넣어두면 1년 뒤 102만 원이 되지만, 그 돈으로 살 수 있는 물건의 가격은 105만 원이 되어버리니, 예금자는 가만히 앉아서 구매력을 잃는 실질적인 손해를 보게 됩니다. 여기까지는 우리가 흔히 아는 이야기죠. 하지만 그 손해는 공기 중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은행은 예금으로 받은 돈을 어딘가에 투자해 수익을 내야 합니다. 당연히 수익률이 5%도 넘지 못하는 정부 국채는 쳐다보지도 않고, 더 높은 수익을 낼 수 있는 곳에 투자하고 싶을 겁니다. 바로 이때 정부의 '보이는 손'이 작동합니다. 정부는 은행들에게 "다른 데 투자하지 말고, 우리가 발행한 2%짜리 안전한 국채를 사라"라고 강요하기 시작합니다. 각종 규제와 법안을 통해 은행들이 국채를 일정 비율 이상 의무적으로 보유하게 만드는 것이죠. 은행 입장에서는 매력 없는 상품을 강매당하는 셈이지만, 정부는 이렇게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수요를 바탕으로 국채 가격을 방어하고 금리를 아주 낮은 수준으로 억누를 수 있게 됩니다. 결국, 제가 원래 받았어야 할 더 높은 이자를 받지 못하게 된 그 '손해분'이, 고스란히 '정부가 아낀 이자 비용'으로 이전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날카로운 질문이 나올 수 있습니다. 은행도 자선단체가 아닌데, 예금을 받을수록 손해를 보는 이런 장사를 왜 계속하는 것일까요? 여기에 금융억압의 두 번째 비밀이 숨어있는데요. 첫째, 정부는 ‘자본 통제’라는 벽을 세워 은행의 돈이 더 높은 수익을 찾아 해외로 빠져나가는 길을 막아버립니다. 국내에 갇힌 은행은 위험한 기업 대출과 안전하지만 손해인 국채 사이에서 울며 겨자 먹기로 국채를 담을 수밖에 없죠. 둘째, 더 중요한 것은 은행이 국채 투자에서 보는 실질 손실을 다른 곳에서 메꾼다는 점입니다. 바로 '예대마진'의 확대를 통해서죠. 은행은 정부 정책으로 발생한 비용을 대출자들에게 전가합니다. 국채 투자로 인한 실질 손실을 메우기 위해 기업과 개인에게 더 높은 대출 이자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예금자들에게 주는 이자를 더 낮춰버릴 수도 있죠.


결국 이 시스템의 진짜 피해자는 은행이 아닙니다. 피해는 고스란히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에게 돌아갑니다. 자산이 없는 평범한 사람들은 '낮아지는 예금 이자'와 '높아지는 대출 이자'라는 양쪽에서의 압박을 동시에 받게 되죠. 기업들은 높아진 대출 문턱에 투자를 망설이게 되고, 경제의 활력은 떨어집니다. 반면, 주식이나 부동산 같은 실물 자산을 가진 사람들은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자산 가격이 오르면서 자신의 부를 지키거나 오히려 늘려나갑니다. 이 조용한 부의 이전 과정 속에서, 빈부격차와 양극화는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너무 극단적인 소설처럼 들리신다면, 우리는 역사의 거울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미국은 GDP의 120%가 넘는 막대한 전쟁 빚을 청산하기 위해 수십 년에 걸쳐 바로 이 금융억압 정책을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더 가까운 현재의 사례도 있죠. 바로 일본입니다. 일본은행은 오랫동안 '수익률 곡선 제어(YCC)'라는 이름으로 10년물 국채 금리를 0% 근처에 묶어두는 현대판 금융억압을 실행해 왔습니다. 그 결과 시장 기능은 왜곡되었고, 경제는 활력을 잃었죠. 정부가 시장의 흐름을 인위적으로 막으려 할 때 어떤 부작용이 생기는지를 우리는 역사를 통해 똑똑히 봐온 셈입니다.


오늘 이야기가 무척 길었는데요. 흐름을 정리해 보죠. 정부의 막대한 부채는 언제나 금리를 인위적으로 억눌러 빚의 부담을 줄이고 싶다는 '금융억압'의 유혹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리고 그 비용은 '보이지 않는 세금'의 형태로, 자산 없는 서민들의 부를 조용히 이전시키는 방식으로 치러지곤 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마주한 저금리 시대와 다시 고개를 드는 정부의 시장 개입 움직임 속에서, 과연 우리는 역사의 교훈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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