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화의 보이지 않는 손: 워싱턴과 도쿄의 동상이몽

by 구미잉

최근 엔화의 움직임이 왜 그토록 답답하고 느리게 느껴지는 걸까요? 그 답은 일본은행이 아닌, 미국 워싱턴 D.C. 와의 복잡한 관계 속에 숨어있을지 모릅니다. 지금 엔화는 세계 1위와 3위 경제 대국의 상반된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거대한 줄다리기 한가운데 놓여 있습니다.


줄의 한쪽 끝은 미국이 잡고 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통화 가치를 계속 떨어뜨릴 수 없다"라며 '관세'라는 몽둥이를 직접적으로 위협합니다. 더 정교한 압박은 재무부에서 나옵니다. 스콧 베센트 재무장관은 "일본은행은 (인플레이션 대응에) 뒤처져 있다"며 금리 인상을 촉구했죠. 이는 단순히 일본 경제를 걱정해서가 아닙니다. 일본의 인플레이션이 일본 국채 금리를 밀어 올리고, 그 '누수(leakage)' 효과가 결국 미국 국채 금리까지 불안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반대편 끝은 일본이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습니다. 일본은 마치 한 대의 자동차를 운전하는 두 명의 운전자와 같습니다. 일본은행의 우에다 총재는 '엔화 강세'라는 급격한 좌회전이 이제 막 회복하려는 일본 경제를 다시 절벽으로 밀어 넣을까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금리 인상 대신 '100년이 걸릴 것'이라는 ETF 매각 같은 소심한 긴축을 발표하며 브레이크를 밟습니다. 동시에 재무성의 가토 재무상은 엔화가 너무 약해지면 미국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투기적 움직임'을 경고하며 사이드 미러를 살피는 역할을 하죠.


이 아슬아슬한 줄다리기가 영원히 계속될 수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미국 역시 줄을 무작정 세게 당길 수만은 없습니다. '엔 캐리 트레이드'라는 수조 달러 규모의 자금이 얽혀있기 때문입니다. 급격한 엔화 강세는 이 자금의 대규모 청산을 유발해, 전 세계 금융시장을 뒤흔드는 '상호확증파괴'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결국 양국은 '과도한 변동이나 무질서한 움직임'에만 대응한다는 미묘한 합의점에 도달했습니다. 이는 사실상 엔화의 움직임에 보이지 않는 '회랑(Corridor)'을 만들어 낸 셈입니다. 미국은 엔화가 더 약해지지 않도록 '바닥'을 막고, 일본은 엔화가 너무 빠르게 강해지지 않도록 '천장'을 관리하는 형국이죠.


결국 엔화의 길은 정해져 있는지도 모릅니다. 다만 그 길은 투자자들의 애를 태우는, 매우 길고 느린 오르막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보이지 않는 회랑 속에서, 과연 우리는 인내심을 갖고 최종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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