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 예찬 혹은연애 예찬, 다국어 커플이 서로를 이해하는 법
다국어 커플이 서로를 이해하는 법
언제부턴가 나의 영어는 낯선 사람들과 있을수록 유창해졌다. 영어로 말하는 상황에서 편안한 사람들과 있을 땐 주저리주저리, 횡설수설 말이 늘어진다. '언어를 배우는 것은 새로운 자아를 형성하는 일이다'는 말이 있다. 낯선 이들과 함께하는 영어 환경에서의 나는 한국인의 자아를 잠시 접어두고 영어를 쓰는 자아를 꺼내는 듯하다. 느끼는 방식도 생각하는 방식도 한국어로 말할 때와는 조금 다르다. 반면, 영어로 소통해야 하지만 편안한 사람들과 있을 때는 한국인의 자아와 영어를 하는 자아가 섞이는 듯하다. 특히, 베를린 사 씨(5년 된 독일인 남자 친구이다. 자주 등장할 예정이다.)와 함께 있을 때는 나의 영어실력에 의구심이 들만큼 엉터리 영어를 쓴다.
한국어는 감정과 감각을 풍부하게 표현하는 언어다. 영어는 상황과 사물을 풍부하게 표현하는 언어다. (이것이 영어를 배우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런 탓에 나의 한국어 자아와 영어 자아가 섞이면, 감정과 감각은 지극히 한국적으로 느끼는 반면 말은 영어로 하려니 주저리주저리 말이 길어진다.
답답하다. 입이 심심하다. 아쉽다. 안타깝다. 마음이 가볍다. 싱숭생숭하다. 몽글몽글하다.
이런 표현들은 한 단어로, 영어로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이렇게 번역이 어려운 느낌을 마주할 때마다 말이 길어진다. 베를린 사 씨와 있을 땐 보고, 듣고, 느끼는 것 대부분(다는 아니고)을 나누고픈 마음에 한 없이 길어진다.
어젠 이런 일이 있었다.
베를린 사 씨와 나는 함께 빈센조 10화를 봤다. 상황이 잘 풀리지 않던 주인공들은 편의점에 나란히 앉아 사이다를 마셨다. 이 장면의 깊은 의미를 그와 함께 나누고 싶은 나머지, 영상을 멈추었다. 한국인 성씨(나)는 설명을 시작하는데...
(사 씨는 한국어를 잘 못한다. 영어로 한 대화이지만 한국어로 번역해보았다.)
한국인 성씨: 이건 있잖아 굉장히 비유적인 장면이야. 지금 주인공들 상황이 어때? 일이 잘 안 풀리고, 막 나쁜 놈들 혼내주고 싶은데, 앞으로 어떻게 될지도 모르겠고 그러잖아. (kinda stuck, frustrated... and.. suffocated, right?... not quite right in Korean though.) 그런 걸 한국어로는 답답하다고 해. 이렇게 답답하다고 느낄 땐 요즘엔 고구마 같다고 해. 고구마 먹으면 목이 턱턱 막히잖아. 그럼 사이다가 뻥 뚫어줘야 돼! 그래서 저 주인공들이 사이다를 마시고 있는 거라고!
베를린 사 씨: 아, 그런 거야~ make sense 해. 지금 스쁘롸잇 엄청 필요한 거야!
다행히도 그는 나의 긴 설명을 항상 흥미롭게 들어준다.
그런 탓에,
그는 끓는 김치찌개를 보며 'Soup이 보글보글해.'라고 말할 줄 알고,
'아! 진짜~'라는 나의 한마디에도 장난을 멈추어야 할 때임을 안다.
베를린 사 씨 안에 '한국어 자아가 새록새록 피어나고 있구나' 싶은 마음이 든다.
그런 그는 내가 국물을 떠먹고는 'It's great. Cool!'이라고 말하면 '아, 맛있다. 좋아!'가 아니라 '시원해!'를 뜻한다는 것을 안다. 나는 그가 중요한 일을 앞두고 'I'm excited.'라고 말하면 '기대돼, 신이 나'가 아니라 독일어 'aufgeregt 흥분된, 긴장된 (영어로 excited 혹은 nervous와 비슷한 듯 다른 느낌이다)'을 뜻한다는 것을 안다.
이렇게 서로의 언어를 배우며 20+n 년 간 느껴보지도 못했거나, 느껴본 적은 있지만 표현해본 적이 없는 감각과 감정에 대해 말하는 법을 배운다. 신기하게도 단어를 새로 배우면, 그 단어를 위한 마음의 방이 생겨나는 것만 같다. 평생을 그 단어가 없이도 잘 살아왔으면서, 꼭 그 단어로 표현해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이 생겨난다. 그러다 보면 이런 의문이 든다. '언어가 먼저일까? 마음이 먼저일까?', '언어가 없다면, 우리의 감각과 감정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럼, '행복하다고 말하기 때문에 행복한 것일까? 행복하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일까?'.
확실한 것은, 한국말로 말해도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은 사람이 있는 한편, 낯선 언어로 이야기를 나누어도 같은 마음을 나누고 있는 것만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그의 언어와 한국어의 차이를 느낄수록, 베를린 사 씨가 영어에 담아낸 감정은 그 원형을 찾아내려는 나의 시도에 매번 새롭게 번역된다. 그 과정에서 새로 배운 감정을 위한 방을 내 마음속에도 만들어 둔다. 언어가 먼저인지, 마음이 먼저인지는 모르겠지만, '언어를 배우는 것은 자아를 확장하는 일'이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서로의 언어를 배우며, 독일어 자아와 한국어 자아가 뒤엉킨 채 우리는 세상을 느끼는 새로운 방법을 익히며 닮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