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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키나 pickina May 15. 2023

It's my lucky day today

노력하는 자에게 행운이 따른다 - 미시즈 해리스 파리에 가다

이상하리 만치 모든 일이 잘 풀리는 날이 있다.

귀인을 만나고, 평소에 고민했던 것이 아무렇지 않게 해결되고, 꿈꾸기만 했던 일이 일어나는 날.

나에게는 2023년 05월 15일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1년 전, 나는 인생에 권태기가 온 것에 대해 여러 가지 원인을 찾고자 했다.

용하다는 곳에서 사주도 보고, 아홉수 때문은 아닐까 원망도 해보았다. 분명히 나는 회사에서 해야 하는 것 이상으로 열심히 일을 하고 있고 인정받고 있었다. 돈도 부족하지 않게 벌고 있었고 가족과 주변 지인들도 건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인생이 잘 풀리지 않는 느낌이 드는지 말로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그 후 1년간의 치열한 고민과 준비 끝에 올해 5월 퇴사를 하게 되었고, 8월 출국 준비를 하면서 주변을 정리하고 평소에 해보고 싶었던 것을 이것저것 해보고 있다. 안정적인 직장을 떠나면서 두려움이 아예 없었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무엇보다 나에게 온전히 주어지는 하루 24시간, 잠자는 시간을 제하면 17시간 정도를 어떻게 알차게 꾸려나가야 할지가 신나면서도 두려웠다. 분명히 빠르게 지나갈 시간임을 알기에 허투루 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오히려 회사에 다닐 때보다도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쉬웠고, 더욱 긴장된 상태로 눈을 떴다.


오늘 하루의 시작도 그러했다. 새벽에 잠들었지만 9시에 눈이 번쩍 떠졌고, 미리 짜놓은 계획이 있었지만 (한국어 교원 과제하기) 왠지 서랍 정리를 하고 싶어졌다. 잡동사니들을 버리고, 필요한 것만 남기는 작업을 했다. 그리고 서랍 한편에 영업직으로 일하면서 쌓아둔 몇백 개의 명함이 있었는데, 리멤버로 옮기는 디지털화 작업 드디어 했다. 미루고 미루다가 퇴사를 하고 나서야 하는구나. 점심은 간단하게 불닭볶음면 컵라면으로 때우고, 비자 사진을 인화하기 위해 홍대로 향했다. 사진을 맡기고 20분 후에 오라고 하셔서 옆에 있는 카페에 가보기로 했다. 입구에서 길냥이들에게 밥을 주는 사장님이 보였다. 카페를 들어서자마자 사장님의 커피에 대한 짙은 애정이 느껴졌다. 마음이 따뜻해지면서 문득 내가 퇴사를 하고 이런 여유를 즐기고 있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아아 한잔을 마시고 사진을 찾은 후 예정되어 있던 홍대입구역 당근 거래에 나섰다. 입지 않는 옷들을 당근에 모조리 내놓고 있는 와중에 어제 핑크 레이스 원피스를 올리자마자 구입하신다는 감사한 분이 있었다. 근데 채팅으로 본인은 '당근으로 구입한 것을 무료로 나눔 하고 있다. 후기글을 보시면 감이 오실 거다.'라고 하시는 게 아니겠는가. 당근으로 무료 나눔을 받아 돈을 받고 파는 파렴치한에 대한 이야기는 들어봤어도 그 반대는 처음이었기에 궁금한 마음으로 후기를 보았다. 매너 온도가 74.2도인 이분께 남겨져있는 후기들은 특별했다.



그리고 거래하기 전 본인의 착장과 함께 70대 할아버지라는 메시지를 받았다. 여성 원피스라 당연히 여자 분일 줄 알았는데 직거래 시 놀랄까 봐 미리 말씀해 주신 것 같았다.

궁금함 반 긴장감 반을 안고 약속 장소에 갔는데 이미 약속된 또 다른 거래를 마치시고 급하게 오시는 모습이 보였다. 옷을 드리기도 전에 들고 계시던 소금빵 하나와 돈이 들은 봉투를 주시면서 맛있는 집에서 사 온 거니 먹어보라고 하셨다. 돈을 세어보라는 말씀도 잊지 않으셨다. 어디 사냐는 말씀에 동네를 말씀드렸더니 그쪽에 유명한 맛집 정보도 알려주시고는, 덕분에 좋은 일을 한다고 잘 쓰겠다고 하셨다. 옷을 필요한 분에게 무료로 주는 일을 하고 계신다고 했다. 마치 오래전 알던 사이처럼 이야기를 나누고는 그렇게 쿨하게 인사를 하시며 가셨다.


팍팍한 서울살이에서 이렇게 모르는 사람과 가슴 따뜻한 대화를 나눠본지가 얼마만인지, 정말 별 것 아닌데 왠지 모를 감동을 받았다. 소금빵과 오천 원짜리 2개가 담긴 봉투를 들고 걸어오면서 그 몽글몽글한 감정을 담아 감사하다는 후기를 남겼다. 오늘 나에게 일어난 첫 번째 행운이었다.


집에 가는 길에 브런치 앱을 봤는데, 오늘 하루 조회수가 300이 넘어있었다. 특히 기타 유입으로 들어오신 분들이 많아서 이게 무슨 일인가 하고 여기저기 서칭을 해봤더니 다음 메인에 노출되면 기타 유입이 크게 늘어난다는 포스팅이 있었다. "에이 설마, 이제 시작한 지 며칠 되지도 않은 작가인데 다음 메인에 노출이 웬 말이야."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내 글이 다음 메인에 걸려 있는 것이 아닌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정말 너무 놀랍고 신기하고 또 내 글을 선정해 주신 담당자분께, 그리고 읽어주시는 분들께 감사했다. 


너무 자랑스러우니 박제해 둘 거다! 나에게 일어난 놀라운 두 번째 행운이었다.


이렇게 행복감에 취해있을 때 정말 예기치 않은 세 번째 행운이 찾아왔다.

해외에 가게 되면서 많은 고민 끝에 지금 살고 있는 전셋집을 내놓았다. 요즘 전세 사기로 인해 빌라 전세 수요에 영향이 없지 않을 것 같아 집주인에게 무려 5개월이나 먼저 퇴거 통보를 하였고, 계약 만료 전에 빨리 나갈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집주인이 다행히 바로 협조하여 부동산에 내놓아주었고, 집을 예쁘게 꾸며놓고 쓰고 있고 2억 언더 매물이라 4월부터 꽤 많은 팀 (10팀 이상) 이 집을 보러 왔지만 입주일자를 7월로 설정해 두어서인지 대출 금리가 높아서인지 이상하리만치 계약을 한다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나도 당근과 피터팬에 직접 매물을 내놓았고, 이 집이 좋은 이유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을 적었다. 많은 채팅과 관심을 받았고 그렇게 4팀 정도에게 직접 집을 보여주게 되었다. 이전에 하던 일이 부동산 쪽이라 투어에는 도가 터서 그런지 직접 열정 넘치게 쇼잉을 하니 반응이 오는 듯했다. 근데 그마저도 바로 계약을 하겠다는 사람이 나타나지는 않아서 애가 타던 무렵, 오늘 저녁 6시 반에 손님을 받게 됐다. 여성 2분이 오셨고, 집의 세세한 부분과 옵션, 한강뷰 옥상, 역까지 이동 방법, 한강공원과의 접근성, 그리고 중요한 대출과 전세보증보험 등에 대해 꼼꼼하게 설명을 해드렸고 바로 부동산에 연결해 드렸다. 몇 번 투어를 해보니, 집을 본 당일에 부동산까지 연결을 해주어야 다른 옵션에 눈을 돌리지 않고 계약을 하겠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동산에서 기다리던 연락이 왔다. "연결해 주셔서 감사해요. 연결해 주신 분들이 내일 오후 3시까지 대출 알아보고 계약하신대요. 그때까지는 다른 데에 집 보여주지 말아 주세요~" 


아직 8월 출국까지 기간이 좀 남았다고 생각하면서도 집이 이렇게 안 나가는 건 아니겠지 걱정이 스멀스멀 올라오던 차에 정말 이보다 좋은 소식이 없었다. 오늘 나에게 일어난 세 번째 행운이었다.




얼마 전 넷플릭스에서 "미시즈 해리스 파리에 가다"라는 영화를 보았다.

엄마가 보고 나서 재밌었다며 추천했고, 내 취향과의 일치도가 98%였기 때문에 고민 없이 재생 버튼을 눌렀다. 그 영화에서 주인공이 버스를 타면서 안부를 묻는 버스기사에게 하는 첫 대사가 "It's my lucky day today"였다. 이에 버스 기사는 "Same as everyday"라고 답한다. 주인공은 매일이 행운 같은 날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이었다. 남편은 전쟁에서 전사하고, 부잣집에서 하녀 노릇을 하며 빠듯하게 살아가는 데도 말이다. 그런데 어느 날 그녀에게 정말 거짓말 같이 행운이 한 번에 찾아오기 시작한다. 남편에게 미지급되어 있었던 연금을 일시급으로 받게 되고, 주인 잃은 귀걸이를 찾아준 후 사례금을 받게 되고, 돈을 잃은 줄만 알았던 경마에서 친구 덕에 본전 이상으로 돈을 따게 된다. 그 돈으로 평소 꿈꾸던 크리스천 디올 드레스를 사기 위해 무작정 파리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숙소에서 잘 돈도 없어서 기차역에서 노숙을 하고 노숙자의 안내를 받아 디올 하우스에 도착하였지만, 해리스는 홀대를 받는다. 디올은 아무나 입는 옷이 아니니 분수에 맞는 옷을 입으라고. (중략) 하지만 결국 해리스는 디올 하우스 직원 모두의 존경을 받게 되고, 금전적으로 어려워 직원을 자를 위기에 처한 디올 하우스를 살리게 된다. 그리고 런던으로 돌아와 본인이 꿈꾸던 드레스를 미처 입어보기도 전에 난처한 상황에 처한 주인집 딸에게 드레스를 빌려주는데, 주인집 딸은 그 드레스를 다 태워먹고 만다. 선행을 베풀었을 뿐인데 꿈의 드레스를 입어보지도 못하고 버려버리게 된 해리스는 절망에 빠지지만, 이내 더 좋은 소식이 그녀를 찾아온다.




오늘 하루를 보내며 이 영화가 떠올랐다.


1년 전만 해도 나는 이렇게 노력하는데 왜 인생이 재미가 없을까. 나에게는 행운이 찾아오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직장에서 벗어나 내 나름대로의 노력을 하면서 살아보니, 두 가지 깨달음이 생겼다. 


1. 행복은 생각하기 나름이다. 내가 직장을 다니고 있었다면 오늘 일어난 세 가지 행운을 행운이라 생각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스스로 하루하루를 꾸려나가다 보니 행복에 대한 역치가 낮아진 것 같다. 요즘은 사소한 일도 나에게는 행운으로 느껴진다.

2. 스스로 노력하는 자에게 행운이 찾아온다. 내가 브런치를 시작하지 않았더라면, 이제는 안 입는 옷들을 당근에 내놓지 않았더라면, 부동산에만 의지하면서 여러 플랫폼에 집을 마케팅하지 않았더라면 오늘 일어난 3가지 행운 모두 없었을 것이다.


2023년 05월 15일은 당분간 내 삶의 원동력이 될 것 같다. 오늘 이 기분을 기억하면서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보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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