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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하 Sep 21. 2019

[인디애니 페스트 2019 : '볾'] 구현하는 사람들

포디엄에서 초청을 받고 인디애니페스트 개막식에 참석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나는 그간 이런 행사가 존재하는지도 몰랐었기에 더욱 뜻깊은 자리였다.

 


<인디애니페스트>는 한국의 인디 애니메이션 전문 영화제이다. 그리고 또 한 발짝 더 나아가 아시아권으로 그 범위를 확대했다. 9월 19일에 개막식을 시작으로 24일까지 'CGV 명동역점('CGV명동'점과 헛갈려서는 안 된다)'에서 열린다. 관심이 있는 분들은 꼭 관람하기를 권한다. 다양한 색깔의 단편 애니메이션의 집합을 매 세션마다 고루 관람할 수 있다.

 


개막식에서는 각 감독의 소개와 <슈퍼키드>의 허첵님 공연으로 시작되었다. 흥미로웠던 점은 '릴레이 애니메이션'의 BGM을 직접 현장에서 라이브로 불렀다는 점이다. 제목은 <그래도 돼>로, 좌절하고 지쳐있는 사람들의 상황을 서술하고 위로와 응원을 전한다는 것. 여러 작가들이 각각의 파트에서 자신의 색깔을 드러내면서도 전후로 이어지는 서사를 유기적으로 연결하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시작된 것은 개막식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개막작의 상영이었다.



질바로디스 긴츠의 <어웨이>라는 작품으로, 무려 1시간 15분가량의 장편 애니메이션이었다. 대단한 점은 그의 모든 작업이 홀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그는 모든 것을 만드는데 무려 4년가량이 걸렸다고 한다.  점에서 나는 애니메이션이 아주 정직한 장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있다는 이야기는, 그 사람이 적어도 자신이 만드는 것에 아주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있는 것임을 보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인디애니페스트>에 참여하여 작품을 출품한 사람들은 모두 그런 일들에 장인 정신을 발휘하고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무언가를 만들고 창조하는 사람들이 그렇게나 많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큰 감동으로 다가온다.


내가 애니메이션에서 기대하는 것은, 애니메이션이야말로 가장 무제약적인 장르라는 점에 있다. 현대에 이르러 배우가 직접 등장하는 영화도 CG의 발달에 힘입어 뭐든지 보여줄 수 있게 되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실사영화의 한계로부터 자유로웠던 것은 애니메이션이었다. 우리는 인간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을 애니메이션으로 구현할 수 있고, 동물로 둔갑하는 것, 동물이 말하는 것들도 구현할 수 있었다. 특히 동물이나 사물을 의인화해낼 수 있는 것은 애니메이션의 가장 두드러진 장점 중에 하나일 것이다. CG가 아무리 발달한다고 해도 만화영화의 의인화된 표정과 같은 기법들은 애니메이션만이 해낼 수 있는 것이다. 그 덕목을 망각한 채 만들어진 <라이온킹> 실사-CG 영화가 혹평을 받았던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질 바로 디 긴츠의 작품에서 그러한 상상력, 그가 구현해내고자 하는 세계에 대한 무제약적 자유가 드러나기를 기대했다. 그리고 그의 장편 애니메이션은 분명히 그러한 덕목을 두루 갖춘 좋은 작품이었다고 생각했다. 외딴 황무지에 불시착한 한 소년이 검은 괴물로부터 끊임없이 추격당한다. 그 소년의 여정은 여러 가지 은유와 메타포를 함의하고 있는듯하였다. 그러나 그 상징의 해석은 차치하고서라도, 그가 보여준 세계는 아름다웠다. 새들이 날아다니고, 거울 같은 호수에 파란 하늘이 반사되며, 주인공은 오토바이를 타고 몽환적인 세계를 질주하며 자신을 추적하는 불안으로부터 탈출한다.


그러나 그만큼 인디 애니메이션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우선 장점으로 꼽을 수 있는 아름답고 몽환적인 풍경 때문에 기꺼이 감내할 수는 있었지만, 지나치게 루즈했다. 장면과 장면 사이에 정적과 공백이 피로함을 덜 수 있는 템포가 되어주기보다도, 되려 피로함을 유발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인디 애니메이션이 가지는 어쩔 수 없는 한계라고 생각했다. 추격 장면만 하더라도 여러 사람이 달라붙고 자본이 투입된다면 조금 더 긴박하게 만드는 디테일들을 삽입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작업은 혼자만의 힘으로는 한계가 있다. 하나의 장편 애니메이션에 투입되는 스태프들의 수만 보아도 그것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다음처럼 묻는 것은 과연 정당한가 : 독립-애니메이션이라는 것이 자본을 투입한 그것을 능가할 수 있을까? 혹은 능가할 수 없다고 자인하면서, 그 정도로 되었다고 칭찬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은 사실상 그 자리에 실제로 오게 되면 별로 중요한 질문은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홀로 만들어낸 그 집착적 태도로부터 느낄 수 있는 것들은 분명했다.


한 사람의 내면적 상상력을 실제로 구현하고자 하는 그런 태도가 가능하고, 그런 사람들이 영화제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 사실이, 나로 하여금 여전히 나의 꿈을 꿀 수 있도록 하는 힘이 되어준다. 그들은 상상하고 기획하고, 그리고 만들어낸다. 그러한 실물적 '구현'의 욕구와 그 욕구에 기인하는 극단적인 결과물은 분명히 다른 장르의 예술과는 구분되는 부분이다. 마음만 먹으면 애니메이션은 심오한 의미와 시적인 의미에 다가갈 수도 있을 테지만, 그 이전에 그들이 시와 문학이 아닌 '애니메이션'을 선택한 이유는 그들이 소년과 소녀의 그것과 같은 원초적인 구현의 욕구에 의해서일 것이다.


그들에게 자신들이 만들어내는 것의 가치를 묻는 것은 어떤 점에서는 사소한 것처럼 보인다. 구현의 욕구는 구현하고자 하는 그것이 먼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이유는 그들이 만들어내고 싶기 때문이며, 그것이 과연 가치로운가 하는 점은 부차적인 것이 된다. 가치는 그저 하나의 결과물일 뿐인 것이다. 그래서 가치를 묻지 않고도 그들은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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