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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하 Sep 15. 2019

영화 <조커> 프리뷰 : DC의 생존전략과 해석가능성

<배트맨 V 슈퍼맨>이 폭망한 이후, <저스티스 리그>도 좆망했다. 사람들은 그 패인을 마블과 비교하며 성급하게 유니버스를 구성하려 한 점을 꼽았다. <아이언맨>의 성공이 보여주듯이, 차근차근 하나씩 밟아 나가면서 캐릭터성을 구축했어야 되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DC 유니버스'가 설득력 있게 구성되기 어려운 이유가 단지 "DC가 마블처럼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배트맨과 슈퍼맨에게서 분명히 다른 것을 기대하고 있다. 팀 버튼의 배트맨과, 놀란의 배트맨을 보면서 우리가 열광한 이유는 그들이 다각적으로 그 캐릭터를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DC 히어로의 핵심은 그러한 '해석 가능성'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해석은 결코 한 캐릭터의 영원한 활약을 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캐릭터의 흥망성쇠를 통해서 드러난 '의미'를 보려고 한다. 그러한 '의미'는 지속이 아니라 '완결'과 '선언'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DC의 캐릭터가 심오해 보이는 이유는, 다각적인 해석 가능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미 그 자체로 상징적이다. 그리고 그러한 하나의 상징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드러날 수 있다. 배트맨과 조커는 인격체로서 오락성을 선사한다기보다도 서로가 서로에 대한 대립물로써 조명하며, 그러한 자신들은 각각 어떠한 입장과 의미를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팀 버튼의 <배트맨>에서 조커와 배트맨의 관계는 서로가 서로를 "창조"해낸 관계였다. 조커는 배트맨의 부모를 죽인 원흉으로써, 그리고 배트맨은 조커를 화학 약품으로 밀쳐서 오염시킴으로써 서로가 서로를 만들어 낸 것이다. 서로가 서로의 '생성의 근거'가 된다는 것은 음양이 상호에 의해 가능하다는 근원적인 상징에 관련되어 있다.


한편, 놀란의 <다크나이트>에서 배트맨과 조커는 '생성'이 아니라 '완성'의 근거가 된다. 조커는 배트맨에게 말한다 : "너는 나를 완전하게 만들어" - 이것은 발생론적인 근거가 아니라, 형식적인 근거가 된다는 것을 말한다. 놀란의 배트맨은 '질서'를 상징한다. 그는 혼돈을 일으키는 자들에게 두려움을 심어주고 사람들에게는 희망의 근거가 되어 질서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도래했다. 그러나 그러한 질서에 대한 희구는 반드시 선재하는 혼돈을 요구한다. 팀 버튼의 조커가 사이코 패스적이며 예술적 살인마였다면, 놀란의 조커는 배트맨의 질서를 다시 어지럽히는 무정부주의적 순수 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발생시킨다는 점에서는 서로의 근거가 되지는 못한다. 그 둘은 각기 다른 곳에서 독립적으로 자라났다. 그러나 그 둘은 서로가 서로의 존재 의미가 된다는 점에서는 서로를 완성시키며, 상호 근거가 된다.


한편 반드시 기생적인 악의 존재에 의해서 질서를 드러내고자 하는 배트맨에게는 또 다른 의미로의 대립자가 존재한다. 그것은 '슈퍼맨'이다. 미국에서 결국 가장 인기 있는 히어로는 '슈퍼맨'이고, 그 이유는 슈퍼맨이야말로 가장 서구적이며 기독교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는 음양의 의존성을 통해서 의미를 지니는 '배트맨'과 '조커'와는 달리 그 자체로 독존하는 한 명의 완전한 신적 존재를 표방한다. 그는 외계에서 온 이질적인 존재이며, 절망을 딛고 올라온 인간적인 영웅 '부르스 웨인'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는 태생적으로 히어로였고, 태생적으로 강인하다. 그런 그의 존재는 배트맨에게 있어 자신의 적이면서도 자신을 완성 시켜주는 '조커'보다도 치명적이다. 왜냐하면 너무나도 인간적인 그가 자신의 한계에 도달하려는 암벽등만을 해낼 때, 슈퍼맨은 그저 하늘에서 강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슈퍼맨'의 존재는 배트맨에게 있어서 조커보다도 더 고까운 존재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해석적 차원에서 사람들은 '배트맨 v 슈퍼맨'을 기대했던 것이고, . DC 유니버스에 사람들이 경악한 이유는, 캐릭터성의 붕괴에 있지 않고, 그러한 해석법의 기초를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한 해석법을 지키지 않으니 자연스럽게 캐릭터성은 따라서 붕괴된다. 가령 <배트맨 v 슈퍼맨>에서 배트맨은 '불살'의 규칙을 지키지 않는다. 혹은 그것을 지키려는 모습 자체가 등장하지를 않는다. 이것은 캐릭터성의 붕괴이기 이전에, 배트맨에게 반드시 들어가야 할 상징적인 부분들을 거세시켜 버리는 것이다. 그런 것 하나하나가 슈퍼맨과 배트맨 사이에 존재해야 할 대립들의 해석적 요소들을 붕괴시켜 버린다. 반면에 팀 버튼과 놀란은 배트맨과 조커의 관계가 다분히 상징적이고, 그러한 해석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각자의 시각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둘의 해석은 상이한 방식으로 이루어졌지만, 사람들은 그에 납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DC의 활로가 피상적인 캐릭터의 구축에서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러한 모습을 DC 히어로들에게서 기대하지 않는다. 적어도 DC 히어로 영화의 역사에 있어서는 그렇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이번에 개봉할 호아킴 피닉스의 '조커'에 기대를 걸고 있다. 사람들은 '자레드 레토'의 조커 이후 '호아킴 피닉스'의 조커의 소식을 듣고 우려했다. 혼란스럽기 때문이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아이언맨'은 한 명인데, 이제 우리는 동시대에 두 명의 조커를 마주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러한 혼란은 DC 유니버스도 일관된 스토리 라인을 밟아나가야 한다는 마블을 투영한 하나의 요구였을 것이다. 


그러나 애당초 우리가 알고 있는 조커는 이미 한두 명이 아니라 여럿이었다. 그리고 각자의 조커는 '반복'이 아니라 '재해석'으로 재 탄생했다. 잭 니콜슨의 조커는 '사이코 패스 예술가'였고, 히스 레저의 조커는 '혼돈의 무정부주의자'였으며, 자레드 레토의 조커는 '광적인 로멘티스트'였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 모두가 어떤 점에서는 배트맨에 기생하는 대립물로서의 존재자였다는 점이다. 잭 스나이더의 배트맨이 아무리 해석에 실패했다고 할지언정, 자레드 레토의 조커와 밴 에플렉의 배트맨 역시도 어떠한 대립적인 측면이 있었다. 그리고 결국 이 관계에도 상징과 해석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이번에 개봉할 영화 <조커>는 조커의 발생론 독자적으로 다루고 있다. 나는 조커가 배트맨 없이 독존하며 자생하는 것에 대해서는 조금 우려한다. 왜냐하면 조커라는 존재를 자연 발생적 측면에서 인간적인 면모를 통해 보이는 것이 어떤 그림이 될 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조커는 동정과 이해를 요구하는 자가 아니라, 철저히 이해를 거부하는 그 자체로 두려운 혼돈과 같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만큼 상상해보지 못한 방식으로, 그러나 설득력 있는 방식으로 그 '해석'이 어찌 가능할 수 있는지는 영화를 보고 나서야 알게 될 것이다. 기존 해석에 대한 고집과 편견을 뒤집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바라본 여러 조커에 대한 변천사였다. 그리고 그것이 캐릭터가 내포하는 상징들을 풍부한 방식으로 드러내며, 동시에 우리가 사는 세계를 다시 볼 수 있는 하나의 틀을 제공한다.


앞으로도 '조커'는 해석될 것이고, 또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유니버스를 구축하는 것보다, 그러한 해석 가능성의 여지를 열어두는 것이 DC에게 있어서 더 유리한 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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