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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하 Aug 14. 2019

영화 <우리집> : 잊고 있던 어린 날의 불안들




부모님의 불화와 이별을 겪고 자란 누군가는 말했다.


"나는 이제 그런 게 결혼생활이라면 염증이 나요. 그래서 안 할 거예요. 그런 관계."


아서라, 섣불리 생각하지 말아라. 앞으로 네가 가질 관계가 꼭 너의 부모님의 관계와 같을 수는 없다 - 그렇게 말하는 것은 쉽지만, 실제로 그러한 회의주의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의 마음들을 제대로 이해하기란 조금 더 어려운 문제이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어떻게든 유지되어 온 가족 안에서 자라왔든, "결과적으로" 분열된 가족 관계 속에서 자라왔든, 우리의 유년 시절은 모두 가족의 분열에 대한 불안을 겪을 수밖에는 없었다. 누군가는 양친 간의 불화 속에서, 누군가는 부모의 병상 앞에서 그러한 불안을 지나치게 이른 날에 겪는다. 그리고 그 일을 우리가 어떻게든 극복했다고 해도, 여전히 우리는 그 불안의 추억들을 기억하고 있다. 단지 더는 그러한 불안보다도 눈앞에 놓인 내 삶의 불안이 더욱 커지는 시점에서 그것들을 묻어버리고 앞을 향해 나아왔을 뿐이다. 영화 <우리집>은 그 시절에 우리가 겪었던 불안에 대한 이야기다. 어린 세 여자아이의 "우리집" 지키기에 대한 여정이다.


나는 어린아이들을 대하는 데에 서툴기도 하고, 아이들의 마음들에 이입하는 것을 잘 하지 못한다. 그래서인지 어린 아 배우들로만 구성된 이 영화에 대해서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영화는 뚜렷한 매력과 장점들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이 적당할 것이다. 유려하지는 않지만, 맑고 깨끗한 영화다. 그 어떤 사상이나 이념에 대해서도 자유롭고, 그러나 보편적인 정서적 공감을 이끌어낸다. 애틋한 어린 배우들의 연기는 능숙하지는 않지만, 그들의 미숙함은 애틋하고 불안한 영혼을 떠올리게 하는 데에 더욱 적절했던 듯이 보인다. 아이들이 너무 예쁘다. 그 안에서 자신들의 집을 지키기 위한 여정을 나도 모르게 따라가게 된다.


브런치 무비 패스로 시사회에서 관람했다. 8월 22일 개봉이다. 상영관이 많지 않으리라 예감한다. 관심이 있다면 서둘러 기억해 두었다 관람하기를 권한다. 그럴만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러다 입소문을 타고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이 관람하기를 바란다.


이하는 스포일러를 포함한 리뷰가 될 것이다. 주의를 요한다.



1. 우리 + 집


부모님의 잦은 다툼을 늘 불안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한 여자아이가 있다. 그녀의 이름은 하나다. 이제 막 12살이 된 그녀가 그러한 부모님 사이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은 많지 않다. 한창 사춘기를 나고 있는 그녀의 오빠는 부모님의 다툼에 있어서는 차라리 체념한 체 자신의 연애에만 전념하고 있다. 그 가운데에서 하나는 유일하게 가정의 평화를 신경 쓰는 구성원이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가족들을 위해서 장을 보고 식사를 준비하는 것이다. 그런 그녀는 부모님이 화해하기를 바란다. 그를 위한 하나의 묘수는 '가족 여행'을 가는 거다. 예전에 다 함께 바닷가에서 다 함께 찍었던 사진을 보면서 그녀는 생각하는 것이다. 가족 여행이 다시 가족에게 화목을 되찾아 줄 것이라고.


그런 날들 속에서, 하나는 우연히 자신보다 어린 자매를 만나게 된다. 유미와 유진이다. 그 자매는 일 때문에 집에 오지 않는 부모님을 두고 둘이서 옥탑방에서 살고 있다. 하나는 유미, 유진 자매와 친해지게 된다. 요리를 잘 하는 하나는 두 자매에게 요리도 해 주고 함께 물놀이도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슬프게도 그 관계는 오래도록 이어지지 못할 것이었다. 왜냐하면 유미와 유진은 곧 이사를 갈 운명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 둘은 부모님의 사정 때문에 늘 이사를 다녀왔고 또 앞으로도 다녀야 했던 것이다.


우리는 늘 그랬다. 엄마와 아빠가 싸울 때, 그 둘이 따로 살게 되면 어떨지를 늘 불안에 떨면서 고민했다. 그 양상은 아마도 다양할 것이다. 누군가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방 안에 틀어박혀서 방문 너머로 들리는 죽일듯한 소리를 남모르게 듣고 있었고, 누군가는 나서서 적극적으로 말렸으며, 누군가는 지긋지긋한 방구석이 박차고 일어나 가출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구성원]"가 흔들리면 아이들은 불안하다. 그리고 "집[공간]이 흔들려도 마찬가지다. 함께 지내는 친구가 이사를 가는 것도, 또 내가 이사를 가는 것도 불안하다. 처음 부모의 손을 떠나서 집을 나서던 순간. 떨리는 마음과 불안을 이겨내고 가까스로 친해지던 그 친구들. 그들과 다시 떨어져서 외딴 공간으로 간다는 것은 서럽고도 불안한 일이었다.


영화는 이 두 가정을 동시에 보여준다. "우리 집"이라는 것은 두 가지의 조합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는 "우리"로서의 구성원이고, 다른 하나는 구 구성원이 놓이는 "집"으로서의 공간이다. 그 두 가지가 온전할 때에 아이들은 가장 기초적인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2. 불안에서 체념으로 이르는 어린 날의 성장


우리는 나이를 먹어가며 잊어간다. 그때 우리가 얼마나 얼마큼 불안했는지다. 방문 너머로 들리는 모든 소리를 우리가 얼마나 자세하게 듣고 있는지 당신들은 몰랐을 것이다. 조금 더 솔직한 아이들은 엄마와 아빠가 헤어지면 어떡하냐며 펑펑 울었고, 조금 더 이르게 성숙한 아이들은 차라리 그 둘이 헤어졌을 때 자신은 어느 쪽을 따라나서야 하는지를 잠까지 잊은 채로 생각하고 또 생각했을 것이다.


누군가는 가족끼리 화기애애한 그림을 그려서 당신들에게 선물하고, 누군가는 상장을 받아서 당신들에게 자랑하기도 했다. 내가 원하잖아요. 내가 엄마와 아빠가 사이좋게 지내기를 이렇게 바라잖아요. -라고. 조금이라도 당신들의 표정이 누그러지는 것을 보면서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순간들. 그러나 그 안에서 누군가는 "결과적으로" 평화를 지켜냈다고 하더라도, 어쩌면 그 모든 것들은 어린 자식의 손을 떠나 있던 것이었다. 누군가는 온갖 노력을 다하고 난 뒤에도, 결국 '우리집'을 지켜내지 못했고, 결국 체념과 함께 어른이 된다.


하나가 하고자 하는 노력을 하나의 오빠는 비웃고 무시한다. 그 이유는 그가 가족의 평화에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다. 잦은 부부 싸움에 그도 나와서 소리를 지른다. "이럴 거면 따로 살라"라며 그들에게 윽박지르는 것이다. 그런 마음이 있다. 우리는 그 마음이 무엇인지 이미 잘 알고 있다. 그렇게 싸울 것이라면 차라리 따로 사는 것이 낫다고 믿는 순간이다. 그러나 그 마음에 이르기까지 사실은 "함께 살기를" 얼마나 바랐는지는 그만큼 우리는 잊고 있기도 하다. 다만, 벌벌 떨며 방문 뒤에서 자신의 미래를 점쳐보다가, 그리고 그 불안을 견딜 수 있을 정도로 커버린 뒤에, 마침내 모든 것이 지긋지긋해져 버린 사춘기의 마음은, 관계를 그렇게 놓아버리려고 했던 것이다.



3. 절대로 못 가지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어린 날의 체념


어떤 부모는 아이가 아무리 울어도 장난감을 사주지 않았다. 아무리 떼를 써도 가질 수 없다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장난감 하나로만 배울 수 있었다면 행운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살아가며 절대로 접합될 수 없는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때 느껴지던 우리의 무력감. 한 명의 어른이 되기를 바랐던 이유는 내가 무언가를 결정할 수 있는 인간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런 힘을 가지게 되었을 때에는 무엇을 바랐는지를 천천히 잊어버리게 된다.


부모의 칭찬과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쉴 새 없이 불안해하다가, 사춘기가 되자마자 이제는 좋아하는 사람의 마음을 가지기 위해서 갖은 애를 쓴다. 그리고 또 나중에는 대학에 가기 위해서, 취직을 하기 위해서, 내가 나를 벌어 먹일 수 있기 위해서. 우리의 불안을 늘 변화한다. 지치고 지친 마음은 그 안에서 하나의 힘을 가진 어른으로 우리를 만들었던 것이 아니라, 체념하는 방법을 익힌 어른으로 만들었다.


순진하게 바랐던 날들에 그냥 펑펑 울어버리던 날들은 어디로 갔었던가. 장난감을 사달라고 주저앉아 울어버리고, 부부 싸움 앞에서 엉엉 울며 그들을 말려보다가, 그리고 나서도 내가 절대로 바라지 않는 미래는 내 앞에 있어서는 안 된다고 떼를 써보던, 그런 마음들은 어디로 갔다는 말인가.


그럴 거면 따로 살아. 다 필요 없으니까. 이럴 거면 나를 왜 낳았어. 괜찮아. 어느 쪽이든 어디서 누구랑 살든 상관없어. - 그렇게 말해버린 체념의 마음 아래서는 깊은 실망이 유년 시절의 마음을 묻어버린 뒤다.


4. 체념에 이르기 전까지 우리가 잊고 있던 마음들


조금 더 성숙했으며 또 강해졌다고 말하고, 내 삶은 내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한 뒤에, 그럴 부부 관계라면 차라리 헤어져 버리라고 말한 뒤에, 우리가 잊고 있던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하고 싶었던 순수한 노력들. 하나는 늘 밥을 지어서 가족들이 함께 앉아 식사하기를 바랐다. 그녀가 이른 날에 더 빨리 성숙해진 이유는, 사실은 더 순진하고 맑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종종 불안을 이기기 위해서 도피하기도 했다. 그래, 차라리 혼자 살자. 엄마랑 살든 아빠랑 살든 그렇게 살자. 그냥 관심을 꺼 버리자.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희망을 가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장을 보고 요리를 하고 가족들을 한 데 앉힌다. 그리고 함께 가족여행을 떠나자고 조른다. 그녀가 학교에서 타온 선행상까지 보여주면서, 소원을 하나 들어달라고 말하면서.


그녀들의 순수한 노력들. 그것은 정말로 무력했지만, 그렇기에 순수하고도 강력했다. 아빠에게 술에 취해 전화한 여직원에게 전화를 걸어 되지도 않는 윽박(장난전화)을 지르고, 아빠의 핸드폰을 숨겨 버린다. 이사를 가야 하는 유미와 유진은 집이 팔리지 않게 소동을 벌이기도 한다. 여름에는 덥다고 말하고, 겨울에는 춥다고 말한다. 바퀴벌레가 득실거린다고 말하기도 한다. 전혀 소용없을 것을 우리는 알고 있지만, 그것은 그녀들에게 있어서는 최선인 그런 선택이다.


우리는 어른이 되어가면서 계산을 하기 때문이다. 주판을 두드리기 때문에 체념할 수 있다. 해도 안 될 노력은 하지 않는다. 하나의 오빠처럼, 어차피 이혼할 엄마와 아빠의 관계일 뿐이라고 믿으며, 그녀가 손수 싼 도시락도, 가족여행에 관한 모든 노력들을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우리는 그런 방식으로 자라왔고,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 기대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그만큼 사실은 하고 싶었던 노력들이 있었고, 그 노력들이 이루고자 했던 가정 안의 작은 행복과 소원들이 있었다.


5. 우리가 다시 희망을 가질 수 있을까요?


결국 엄마와 아빠가 이혼한 다는 것을 알게 된 하나. 가족여행 하루 전 날이다. 그녀는 무작정 집을 나와서 유미 유진 자매와 함께 보리해수욕장으로 향한다. 그곳에 유미와 유진의 엄마와 아빠가 있기 때문이다. 그녀들이 여행을 떠나는 과정은 자신들이 바꿀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위한 방황의 과정이다. 그러나 그 여행의 끝에 그녀들이 원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만든 종이 집을 밟으며 바다 앞에서 펑펑 운다. 유미와 유진은 결국 이사를 가게 될 것이다. 하나가 부모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아무리 원해도 이룰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진정으로 깨닫게 된 사람들은 그때 어른이 된다.


우리는 생각한다. 우리는 무엇을 배우고 또 무엇을 잊었는가. 내가 본 엄마 아빠는 나의 엄마 아빠 밖에는 없다. 내가 살았던 우리 집은 내가 살았던 우리 집 밖에는 없다. 그런 뒤에 내가 가진 어린 날의 상처와 상실 같은 것들을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좌절된 희망은 다시 접합되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그 어린 날 무엇이건 간에 왜 우겨보았던가? 왜 불안하고 왜 두려움에 벌벌 떨었던가? 그리고 그런 나는 왜 어른이 되고 싶었으며, 또 어떤 어른이 되고 싶었던가? 그리고 그런 어른이 나는 되어가는 걸까? 나는 다시 희망을 가질 수 있을까? 나는 회의를 멈추고, 그때 그 시절 내가 원하던 그런 우리 집을, 그리고 그런 우리 집과 유사한 그런 집을, 오로지 나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누군가에게 선물할 수 있을까?


삶이 힘든 이유는, 여전히 그 대답을 내가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어느새 어른이 되고, 누군가가 자신의 가정을 자신이 붙들 수 없다고 느끼는 것만큼, 그들은 사랑을 하고 이별을 하면서 한 사람과 사랑하는 것조차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결코 이해하고 싶지 않았던 부모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그 안에서 우리는 성숙을 대가로 너무 많은 희망들을 지불해야만 했던 것은 아닌가?


섣부른 희망을 정초할 수 없다. 영화도 섣부른 희망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냥 맑고 순수하게 그 시절의 마음들을 상기시킨다. 하나는 작은 가출 소동을 벌인 뒤에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계란 프라이를 한다. 그녀가 사라지자 경찰에 연락하고 온통 혼란했던 가족들. 아무리 싸워도 결국 저 자식은 사랑하는 가족들. 그리고 그러한 사랑이 "뚜렷하게 존재한다는 사실"과는 상관없이도 이별할 수 있을 가족들. 그들 앞에서 그녀는 천연덕스럽게 말한다.


"밥 먹자, 앉아, 얼른- "


그때 그 마음을 상기할 수 있다면, 내가 바라지 않았던 그런 어른이 되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원하던 그런 작은 권리를 가지고서 다시 무언가 해볼 수 있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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