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수한 외로움이라고 썼다.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어쩌면 먼저 세상을 떠난 친구의 빈자리와 같은 것. 그것은 대상을 향하고, 그 대상의 빈자리는 내 옆의 빈자리다. 그 빈자리 이외에 이 세상은 다른 무언가로 가득 차 있지만, 나는 그 빈자리 하나를 응시하는 것이다. 그러며 떠올리는 것은 갈 곳 잃은 마음이 아니라 갈 곳은 이미 예전부터 정해져 있었던 마음이다.
그러나 이제 그 마음이 다가서는 그 자리는 비어있다. 그곳은 텅 비어있지만 텅 빈 공간을 다시 내 마음이 채워 그 빈자리에 있어야 할 것을 떠올리는 마음이다. 그때 마음은 한 사람의 눈빛과 말투와 손짓과 몸짓을 떠올린다. 특수한 외로움이 거대해질수록 그 마음은 더욱 세세하고 세심한 것들을 떠올릴 수 있다. 마음은 반추한다. 길을 걸을 때에도 공허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지난 기억들을 발견한다. 텅 빈 방안으로 들어올 때에도 그 방안은 텅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기억들이 메우고 있다. 벽장에는 무언가를 다닥다닥 붙여 두었고, 서랍장에는 내가 받았던 마음들이 종이에 쓰여 봉투 안에 잠들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그 안에서 마음은 세계의 공허가 아니라 아주 작은 무언가의 공허를 그리고 있다.
사람들은 누군가의 특수한 외로움을 메워주기 위해서 종종 한자리에 모인다. 그는 지금 괴로워하고 있다. 그는 지금 울고 있다. 그 사람 곁에 놓인 빈자리는 너무나도 자명해서, 보편적인 외로움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그 사람의 특수한 외로움을 지탱하기 위해서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그러나 그때마다 그들은 그 특수한 외로움을 위로하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의 보편적인 외로움을 위로하고 있다.
마음은 측은함으로 함께 울고 싶다가도, 누군가는 분위기를 살려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그들은 어느새 저 텅 빈자리에 애도를 표하다가도 다시 한번 취기에 웃음을 띠기 시작하며, 그들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며 지루하고 불안한 시간들을 죽인다. 시간을 죽이고 또 죽여서, 그러나 시간을 죽일수록 그 시간은 즐거워지고 또 아쉬워져서, 그들은 죽이고 죽인 시간 뒤에 다시 남을 그 보편적인 외로움은 다시금 우리를 찾아오지 말아라, 그래서 취하고 또 취해서 필름이라도 끊겨 버리거든, 홀로 걷는 밤길이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 나의 귀갓길은 나의 기억으로부터 사라져 버려라. 그리 말하며 결국 모두 다 취해버리고서는 웃어버리지 않았는가.
보편적인 외로움이라고 썼다.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어쩌면 사랑한다는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 그런 권태와 같은 것. 그것은 대상이라도 향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무언가를 마주치고 난 뒤에도 채워지지 않는 마음이다. 그것은 무엇이 결핍되어 있는지를 알 수 없지만, 세상은 빈틈 없이 가득 차 있는데도 불구하고 텅 비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 마음은 갈 곳을 모르고 방황하기 시작한다. 실컷 고래 고래 소리 지르고 난 뒤에도, 홀로 걷는 어두운 골목길. 그때 마음은 자신이 혼자가 되었다는 것을 알아챈다. 세상은 무한한 것으로 펼쳐지고 그리고 그 한가운데의 나는 그저 그렇게 놓여있다. 마음은 무엇이라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도대체 무엇을? 이미 무언가를 실컷 누리고 즐기고 웃고 떠들다 돌아가는 길이 아니던가. 그리고 들어온 텅 빈 방안은 사실 무언가로 가득 차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어있다. 그때 마음은 무엇의 부재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부재를 느낀다. 나는 여기에 이렇게 있지만 나는 여기에 없다. 차라리 사라졌으면 좋겠다 느낀다.
그러나. 특수한 외로움이라고 썼다. 누군가의 부재로 떠도는 발걸음은 정말로 오직 하나의 빈자리로 그리 괴로워하고 있었는가. 한 사람의 부재는 단지 그 한 사람의 부재일 뿐인가. 특수한 외로움에 놓여 있는 사람 곁에는 정말로 사람들이 있고 여전히 세계가 놓여 있었는가. 그때 마음은 자신의 말들을 추적한다. 그는 어쩌면 세상만큼 사랑한다고 말한 적이 있지 않았는가. 그는 어쩌면 세상을 선택하느니 너를 선택한다고 말한 적이 있지는 않았는가. 아니, 그런 적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종종 한 사람의 부재로 한 세계의 부재를 체험하지 않았는가.
한 사람의 부재는 어째서 한 인간의 세상을 시들게 만들었는가. 그 이유는 우리의 특수한 외로움이 채워지는 순간 종종 보편적인 외로움도 함께 채워졌기 때문이리라. 한 사람을 사랑함으로써 세계를 얻었다는 느낌을 그는 느끼지 않았는가. 그래서 세상을 얻었다 느끼는 순간 그 사람은 자신의 특수한 외로움을 채운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외로움 안에서 깊게 침전되어 있던 그 마음이 비로소 수면 위로 올라와 산소를 들이키며 죽은 숨을 토해냈던 것은 아니었는가.
특수한 외로움은 한순간 그 사람의 부재를 느끼다, 그래서 특수한 외로움에 그치려다가, 사실 그때 그가 느끼는 것은 보편적인 외로움이 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의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한 사람을 잃음으로써 세계를 잃었다 느낀다. 특수한 외로움이 딱 그 자리 그만큼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정의에 어긋난 것이 될 것이다. 특수한 외로움은 딱 그 자리 그만큼의 상실을 통해서 사실은 자신의 세계의 무너져 내림을 체험한다.
그리고 그 자리는 다른 무엇으로도 메워지지 않을 것이다.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때 특수한 외로움은 보편적인 외로움의 길로 접어든다. 되려 보편적인 외로움이 특수한 외로움을 통해서 더욱 보편적이고 확실하고 으스스하게 드러난다. 이제 나는 정말로 혼자다. 그 자리를 무엇이 메운다고 해서 내 세상이 되돌아올 리 없다. 그래서 한자리의 상실은 세계의 상실이 되고, 보편적인 외로움과 특수한 외로움은 하나가 된다.
불안한 마음을 어떻게든 내 빈자리를 채우려 하지만, 보편적인 외로움을 특수한 외로움으로 채워 해결되는 일일랑은 없을 것이다. 특수한 외로움은 세계의 외로움으로 접어든다. 천천히 그 안으로 흘러든다. 그 안에서 다시 혼자라 느낀다. 그렇게 홀로 서는 마음은 이제 보편적인 외로움을 받아들인다. 보편적인 외로움으로 들어가 몸을 푹 담근다.
한 사람의 빈자리는 세계의 빈자리 안에서 희석되고 또 희석되어야 한다. 그것이 희석된다 해서 그는 잊은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 있는 본연의 고독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처음 만나던 날 그날에 그가 세계를 되찾았다 믿었던 현상과 깊게 연관되어 있던 것이다. 그때, 세계를 되찾았다 믿었던 날에, 동시에 그 자신이 본래 지독하게 외로운 보편적 외로움 안에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듯, 이제 다시 자신은 그 세계로 돌아가게 되었음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며 특수한 외로움을 채우려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지 않는다. 세계는 공허하게 펼쳐지며 잊고 있던 잔인한 모습을 드러내고, 우리는 그 안에 내던져져 있다. 그 안에서 역설적으로 발견하는 것은 여기 이렇게 서 있는 나 자신이다. 보편적인 외로움으로 우리는 접어들고, 그 세상에서 다시 살아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다시 또 역설적으로, 그는 다시 세계를 만날 준비가 된 것이다. 그러나 그럴 수 있으려거든 생각한 것보다 이상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며, 생각한 것 이상의 진통들이 있어야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