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이라는 것은 절대적인 가치이므로 그것을 쉬이 버려서는 안 된다."
어쩌면 이것은 한 사람의 생명을 살리고자 고안된 하나의 당위 명제이면서도 아무짝에 쓸모없는 개소리인지도 모른다. 이 말은 한 사람을 살게 만들기에는 너무나 차갑다. 이 말은 다음과 같은 사정을 지레 짐작하고 있는 것이다 :
"네 삶은 너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너보고 살아달라고 할 권리가 없다."
천박한 자유주의를 은연중에 전제하고 있다. 눈을 씻고 봐도 네 인생이랑 아무 상관없는 내가 너 스스로 죽음 할 자유를 막을 권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갑자기 '생명'이라는 그럴듯한 가치가 마지막 남은 하나의 지푸라기처럼 느껴진다. 그것이 신으로부터 온 것이건, 인류가 맹목적으로 믿어온 신비로운 무엇이건 어떻건, 그것은 그냥 그 자체로 소중한 것이니까 버려서는 안 된다.
어떤 점에서 이것은 차가운 논리라기보다도 비열한 논리다. 죽고자 하는 사람이 "당신이 뭔데 나서요?"라고 물을 때 꿀 먹은 벙어리로 있어서는 안되기 때문에 튀어나오는 그런 말.
"생명은 소중한 것이니까..."
그러나 그러한 볼멘소리는 도대체 애당초 무엇을 감추고 있던가. 정말로 생명이 소중한 것이기는 한가? 그것이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소중한 것이기는 한가? 그것은 우리 인류의 인권론이 반드시 전제해야 하는 하나의 원리이기는 하다. 그 논리는 전쟁을 막는다. 대량 학살을 막는다. 그러나 그 명제가 수백수십 명을 살리는 하나의 근본 원리라고 해서, 내 앞에 있는 한 사람의 죽음을 막는 데에도 도움을 주는 것은 아니다. 백 명을 동시에 살리는 논리와 내 앞의 한 사람을 살리는 논리는 전혀 다른 것이다.
"모든 인류의 생명은 균일하게 소중하다"라는 말은 슈퍼파워의 손이 핵미사일 발사에 사인하지 않을 수 있도록 도울 수는 있어도 한 사람의 발목을 붙잡고 제발 뛰어내리지 말라고 절규하는 데에는 하등의 도움도 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그 말은 뛰어내리려는 사람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기는커녕 핵미사일을 발사하고자 하는 결재 서류에 사인을 고민하듯 다음처럼 이야기하는 것이다 : "자네는 뛰어내릴 권리가 없네."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는 다른 권리를 찾아야 한다. 내가 너의 죽음을 허락하지 않을 수 있는 권리. 그것은 죽음에 대한 논제를 기각하는 게 아니라, 뛰어내리려는 인간에게 달려들어 덮쳐버리는 것이며, 그 권리는 내가 솔직하게 '죽지 말아 달라'고 호소하는 것에서 나온다.
우리는 사실은 겁이 난다. 우리의 빈약한 논리. 그러한 빈약한 논리는 가까스로 '생명'이라는 묵직한 단어를 찾았지만, 아주 보편적인 말들이 되기를 바랐지만, 살아달라는 그 말은 사실상 아주 개인적인 그런 말이었다. 그것은 단지 네가 죽지 않기를 바란다는 나의 아주 내밀한 소원이다. 그리고 그 소원에 네가 차갑게 응수할 것이 두려워 나역시 차갑고 묵직한 논리를 찾아내 승부하고자 했다.
그러나, 생명이 소중한 게 아니다. 네 생명이 소중한 것이다. 네 생명이 소중한 것이 아니다. 네가 소중한 것이다. 그것은 네가 네 스스로를 무가치하다고 여기는 판단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제 그딴 것은 나와 아무런 상관도 없다. 오히려 내가 너를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부탁하는 것이다. 나를 위해서 죽지 않으면 안 되겠니. 이 말은 냉혹한 자유주의의 논리를 함부로 기각하는 것이다. 월권이다. 그러나 그만큼 '생명'과 같은 쥐뿔도 상관없는 냉혹하고 독단적인 논리를 버리고 난 뒤에 남은 한 가지 호소일 뿐이다.
이 말은 결코 이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죽음으로 내몰린 사람 모두를 구하는 논거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러나 적어도 내 앞에 그런 사람이 있다면 이 말만이 하나의 대안으로 주어져 있을 뿐이다. 그리고 여남은 그 하나의 논거. '내가 너를 소중하게 생각한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그러니까 죽지 말아 줘.' - 이 말의 여 남은 희망조차 어느 순간 좌절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방법이 틀렸다는 것을 말해주지 않는다. 단지 우리가 실패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때는 우리의 실패는 뼈아픈 상실 앞에서 하나도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죽지 말아 줘. 네가 죽으면 나는 슬플 거야."
그렇게 말하던 호소는, 좌절되고 난 후 정말로 자신이 말했던 대로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마음이 '생명외경' 따위를 찾는 일은 없을 것이다. 자신의 빈약한 마음과 그 마음을 누추하게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빈약한 상상력만이 상처로 남을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