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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하 Jan 31. 2020

일부러 아프지 마


어느 날 누군가가 내게 말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기 전까지는 그 사람과 처음 만나는 그날의 정신연령을 유지한대."


그리고 나서야 그 사람은 과거를 딛고 일어나서는 조금은 더 나은 인간이 되었다고 회고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성장이며 성숙이라고 한들, 그 사실 때문에 그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일은 결코 없었다. 오히려 그는 스스로가 괴물 같다 느꼈을지도 모른다.


한 사람의 마음은 종종 괴물처럼. 상처와 상실을 먹고 자란다. 그렇게 상처와 상실을 먹고 자란 마음은 이내 하나의 경험과 감수성으로 남아서 그 사람을 그럴듯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렇게 더 강직해지고, 더 섬세해진 마음은 커진 덩치를 이끌고 어슬렁 어슬렁 어제의 기억들을 먹어버리고서는 피 괸 입을 쓰윽 닦고는 또 내일을 향해서 걸어 나갔다. 그 사람은 이제 하나의 경험을 가지고서는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나도 아파보았단다. 나도 그런 날들이 있었단다. 그렇게 말할 수 있다. 어디서 꿀리지 않는 상처를 가지고서는 그저 날씨 하나에 왔다 갔다 하는 그런 마음과는 달리, 수많은 것들에 공감하고, 수많은 것들에 그럴듯한 이야기들을 풀어낼 수 있게 되었다.


그러자 또 누군가가 내게 말했다.


"내가 죽으면 이제는 그것에 대해서도 글을 써 줘."


그때 나는 뭐라고 말을 할까. 


네가 죽으면, 아마도 나는 네가 없었던 날보다 더 그럴듯해질 거야.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서 보다 더 구체적으로 알게 될 거야. 그저 생명의 사라짐이 아니라, 내 곁에 있었던 그 사람이 가지고 있던 세계와 그 세계에 맞닿아 있던 나의 세계가 도대체 어떻게 사라지는지를 알게 될 거야. 네가 하던 농담과 네가 그리던 미래와, 네가 돌아보던 아픈 것들과 그것을 보면서 괴로워하던 모든 눈빛들이 사라진 자리가 어떠한 의미가 될지를 알게 될 거야. 


아파보았던 모든 사람과, 상실을 알게 된 모든 사람은 그러지 않았던 날의 자신보다 더 그럴듯해질 수밖에는 없으니까. 그래서 마음은 그렇게 괴물처럼 상처와 상실을 먹고 자라는 거야. 그리고 너는 지금 그것을 내게 떠먹이겠다고 말하고 있는 거야.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여남은 아픔과 공허라는 것들을 쓰레받기에 별 수없이 쓸어 담는 수밖에는 없는 거야. 우리가 정말로 무언가를 쓸어 담기 전까지는 그때 우리의 표정이 도대체 어떤 것일지는 알 수 없겠지. 그리고 그것을 알게 되는 순간, 정말로 우리는 그 순간을 기점으로 조금 더 그럴듯해질 거야.


하지만 그런 마음은 그 빈자리를 자신의 마음에 쓸어 담겠지만, 그러면서 동시에 그 공허에 고마워하는 일은 없을 거야. 마음이 성장하는 이유는, 마음이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일 뿐이니까. 돌아갈 수 없는 마음은, 여전히 죽기가 두려워서 차라리 견디는 일을 선택했고, 어제와 같은 방식으로 견딜 수는 없었던 그 마음은 차라리 더욱 능숙해지는 길을 선택하는 거야.


그래서 말야. 우리는 결코 쓰레기를 쓸어 담는 일을 좋아하지 않아. 결코 무언가를 먼저 구겨버리지도, 무언가 떨어져 버리기를 바라지도 않을 거야. 청소부는 쓰레기를 버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무언가 버린다면, 보란 듯이 버린다면 투덜거릴 거야. 


우리가 가까스로 쓸어 담아야 하는 것들이 우리를 더 잘 살아내도록 할지라도, 너 하나쯤 사라져버려도 좋다고, 내 밥벌이가 될 거라고 그렇게 말하지는 마.


세상엔 이미 떨어진 것들이 너무 많거든. 


우리는 억지로 아프고 또 무언가를 잃어버리지 않아도, 세상에는 이미 아픈 것들과 나를 떠나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거든. 그러니 너 하나쯤 사라지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의 마음이 배곯는 일은 없을 거야. 우리는 모든 것을 지키고 아끼며 살아도, 충분히 잃어가고 그래서 이미 너무나 성장할 수밖에 없거든.


그러니 일부러 아프지도 말고, 나를 위해 사라진다고 말하지도 마. 


그래도 세상엔 이미 저물어간 것들이 너무나 많거든. 


- 그렇게 말을 하고 난 뒤에, 필요한 것은 쓰레받기가 아니라, 그저 구겨버리도록 둘 수 없는 그런 타인의 삶을 위한 내 몸의 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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