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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하 Jan 28. 2020

지붕뚫고 하이킥 : 그들의 시간이 멈췄을 때 우리는


예전 추억의 드라마나 시트콤들이 다시금 화자되고 있다. 나도 그러한 분위기를 따라서 예전의 향수를 따라가 본다. <지붕뚫고 하이킥>이다. 그러면서 묻혀 있던 그때 그 시절 논쟁들도 되살아난다. 황정음과 이지훈 커플이 진정한 커플이라느니, 이지훈과 신세경 커플이 진정한 커플이라느니 하는 것들이 그것이다. 그리고 가장 핫한 이슈는 역시, 신세경과 이지훈의 죽음으로 끝난 결말이었을 것이다. 이제는 많이 잊혔으나,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그 결말로 김병욱피디는 꽤 많이 욕을 얻어먹었다. 나는 그런 분위기가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제 그 충격과 경악조차 옛날 일이 되어 버린 지금, 이제는 그 결말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죽음이 도대체 어떠한 의미가 있었는지를 되새겨 보는 것이 중요하다 느낀다.


빚쟁이들로부터 도망쳐 산속에서 자라온 신세경 자매. 자신들의 위치가 발각되자 신세경은 여동생을 데리고 상경한다. 눈을 뜨고 있어도 코 베인다는 서울. 그곳은 그 둘에게는 매우 이상한 세계였고, 이야기는 그 두 자매의 생존기를 통해 시작한다. 아버지와는 생이별하고, 어디로 가야 할지도 알 수가 없다. 그 안에서 가정부로 숙식을 해결하며, 눈치를 보는 미생의 삶이다. 심각한 그 이야기를 담은 장르는 그러나 드라마가 아니라 '시트콤'이었던 것이다. 그러한 삶을 우리는 분명히 시트콤으로 소비했고, 우리는 그 삶을 보면서 분명히 웃었다.


극 중의 인물과 우리의 표정은 일치하지 않는다. 분명히 어디에선가는 사고가 터져야 하고, 그렇게 사고가 터져야 갈등이 발생한다. 인물들은 더 좋은 선택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멍청한 선택을 한다. 자신의 질투심과 시기심을 자제하지 못하며, 어떤 경우에는 가난한 상황들에 힘입어 피치 못한 선택을 할 수밖에는 없었다. 그러한 것들이 일상에서 벌어질 법한 이야기들 중에 가장 우스꽝스러운 경우를 드러낸다. 그때 그들은 비명을 지르고 우리는 그것을 보면서 웃었다. 우리가 웃었던 어떤 경우에도 그들이 행복했던 적은 없었다. 신세경을 짝사랑하던 정준혁의 앓는 행동을 보면서도 우리는 웃었고, 그러나 짝사랑을 겪어본 사람들은 그가 어떤 지옥에 있는 줄을 이미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보며 웃는다. 이지훈은 늘 황정음을 골리는 쪽에 있지만, 그래서 우리는 그 모습을 보면서 즐거워하지만, 그 안에서 실제로 망가지는 사람은 그 일을 단지 웃어 넘어가지는 못한다.


웃으라고 만들어 놓은 이야기에 웃어 버린 것을 탓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우스꽝스러운 것에 웃고, 우스꽝스러운 것은 점잖은 행위나 잘 돌아가는 일들을 통해서는 발생하지 않는다. 웃음은 으레 그러한 것이고, 우리는 타인의 우스꽝스러운 것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우스꽝스러움에도 능히 잘 웃는다. 그리고 가끔은 누군가를 기쁘게 해 주기 위해서 우리는 일부러 망가지기도 하며, 일부러 멍청한 소리를 하기도 한다. 이런 웃음의 폭력성을 지적하는 것은 정당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지적에서 그치는 것은 웃음의 한 가지 성격만을 지적하는 것이며, 쉽게 인간을 악마로 만들어버리는 것에 불과하다. 오히려 우리는 끔찍한 삶과 스스로의 미련한 선택들에 단순히 괴로워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웃어넘어가버릴 수도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삶은 언제나 완벽하지 않고, 또 우리의 삶은 순전히 행복할 수 없다. 그 안에서도 우리는 웃을 수 있다. 삶은 행복하지 않다. 다만 조금은 웃겼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웃음으로, 지나간 나의 아픈 추억들을 농담으로 만들어 넘어가고 있지는 않았던가.


그리고 그러한 웃음을 통해서 진정으로 슬프고 견디기 어려운 일들의 자리를 유보한다. 오늘은 나의 마음을 고백하지는 못했지만, 여전히 내일 다시 사랑하는 사람을 같은 장소에서 또 만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 웃는다. 그러며 오늘의 쭈뼛거리는 행동을 그냥 설렁설렁 비웃어 버리거나, 호탕하게 웃으며 넘어가는 것이다. 우리는 삼십 분 남짓의 이야기가 다 회차 방영되리라는 것을 알고서, 다음에는 그들이 틀림없이 행복해지리라 믿으며 그리 웃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아장아장 걷던 아이가 철퍼덕 넘어질 때, 우리가 우선 웃는 이유는 그게 우스꽝스럽고 귀엽기 때문이면서도, 동시에 그 아이가 그 정도는 스스로 털고 일어날 수 있으리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웃음은 아이의 이마에서 피가 흐르는 것을 발견하고서, 또 그 울음소리가 심상치 않은 것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분명히 그친다. 우리는 우스꽝스러운 것에 웃지만, 그것이 우스꽝스럽지 않는 순간 또한 포착하며 심각함을 심각함으로 받아들일 준비도 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마침내 신세경이 미국으로 떠난다는 말을 들었던 날에. 그제야 정준혁은 울면서 붙잡았다. 가지 말라고 말하면서. 그리고 신세경은 단순히 떠나야 하는 이유보다 더 많은 이유로 그의 요청을 거절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내비치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녀는 준혁 학생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 정녕 울 수밖에 없는 그 순간을 위해서 우리는 이냥저냥 견딜만한 불행에 웃으며 나아왔다. 그리고 마침내 마주할 수밖에 없는 거절, 피할 수 없는 운명 앞에서 웃음소리는 더 이상 자신의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삶의 진실을 드러내 주는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많이 흘러, 나는 책임을 느꼈다. 그들의 행복하지 않은 삶, 크고 작은 불행으로 가득한 그들의 삶을 보고 웃었다. 그들의 불행을 보면서 웃어온 주제에, 이제 와 그들의 해피엔딩을 내가 과연 바랄 수 있는 것일까. 


떠나는 세경을 이지훈이 공항까지 데려다줄 때, 그녀는 드디어 말한다 : 


"시간이 잠시 멈췄으면 좋겠어요." 


그녀의 삶은 상경 이후로 순전히 행복한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이지훈에게서 받았던 크고 작은 호의를 통해서 사랑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었다. 그 안에서 비로소 살아갈 이유를 찾았고, 그 희망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고단한 삶의 끝에서 이제 다시 또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다시 그 작은 기쁨들로부터 떠나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차라리 이대로 시간이 멈추어 달라고 바랐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 말은 진실이 되었고, 그들의 시간은 영원히 그 자리에 멈추어 있다. 그 안에서 우리의 경악은 그들의 불행을 바라보며 소소하게 웃었던 대가일 것이다. 내일은 괜찮아지겠거니, 그 삶이 극적으로 달라지며 결국 해피엔딩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며, 그 불행을 통해 웃는 책임을 늘 예측할 수 없는 다음 날로 미뤄두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대체 그들의 삶이 나아지며 또 행복해질 것이라는 보장은 어디에 있었다는 말인가? 세경의 삶은 아직 결정되어 있지 않고, 정음의 삶조차도 지방 사립대 출신으로 갈 길이 멀다. 그러나 웃음의 유발은 언제나 그렇게 어려운 삶을 살고 있었던 사람들로부터 촉발되었다. 그런 그들을 통해서 웃어 놓고도 순진하게 해피엔딩을 바란다는 것은 우리의 욕심일 것이다.


그러나 삶이라는 것은 정말로. 우리가 두렵게 우리 앞에 놓여 있지 않은가. 아무리 가지고 싶어도 절대로 가질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종종 잔인하게 알려주지 않던가. 준혁 학생의 떠나지 말라는 고백은, 그저 시트콤 안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는 하나의 사건에 불과했던 것인가. 그러나 그러한 감정을 처음 느끼고 알아가는 사람에게 그러한 거절이 이 세상에 어떻게든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정말 너무나 힘든 일은 아니었던가. 삶은 그렇게 조용한 방식으로 불행하고, 우리는 그 불행이 견디기 어려워 그중에 견딜 수 있는 것들을 우스꽝스럽게 만들어 웃어버리고 말았던 것은 아니었던가. 


그 안에서 우리의 경악과 분노를 또한 무책임한 것으로 만들고 싶지는 않다. 아이가 넘어질 때 우리가 웃어버리다가, 그 아이가 정말로 엉엉 울어버릴 때 우리가 웃음을 거두고 얼른 아이를 일으켜 세우듯이, 우리는 단지 그들의 행복을 바랐던 것뿐이었다. 그들의 불행을 보면서 웃었지만, 언젠가 그들이 행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며, 그들의 삶에 마음을 빼앗겨 버렸던 것일 뿐이었다. 그리고 나서야 우리가 더는 웃을 수 없는 불행을 마주했을 때, 우리는 허탈감과 상실감을 느꼈던 것이었다. 그러한 박탈감이 결말을 실책이었다고 말하며 원망으로 이어졌던 것뿐이었다.


그러나 여기까지 이르렀던 우리의 사정을 다시 한번 떠올리고 이해해보는 오늘. 이제는 그때 그들과 함께 했던 우리의 순간들을 조용히 기리고 싶다. 처음 사랑을 시작하고, 누군가에게 거절당하고, 다시 또 친구들과 어울려 놀며 그 마음으로부터 어떻게든 벗어나 다시 삶은 행복해야만 한다고 고집부리던 순진한 날의 어느 날. 나는 그저 웃어넘기기 어려운 그들의 삶을 바라보면서, 처음으로 타인의 삶을 바라보면서 울었던 그 순간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내게도 그러한 감정이 있었던 것이다.


그 어떤 로맨스 영화도 아닌 그저 시트콤의 한복판에서 펑펑 울어버린 순간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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