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기하 Nov 11. 2023

해몽 (1)

타인의 꿈

0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까닭이, 언젠가 저 세상에서 그에게 큰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어떨까. 그런 생각을 한 일이 있다. 사랑하고도 사랑받지 못하는 까닭이, 그 죄에 대한 벌이라고 말한다면 어떨까.


또 그런 추측을 했던 적도 있다. 그 죄가 너무나 버거워서 내게도 큰 상처가 된다면, 더 많이 괴로울 수 있다면, 그리고 다시 태어난다면, 그때에는 사랑받을 수 있을까. 나에게도 잠이 있다면, 나에게도 꿈이 있다면, 그 안에서 비틀린 욕망이랄지라도, 그 꿈을 한 번이라도 구경할 텐데 - 하는 그런 꿈을 가져본 일이 있다.


누군가에게는 진부한 상상이고 바람이라 말할 테지만, 사실 내게 이것을 별다른 상상이 아니라 사실일 뿐이다. 만약, 이것이 진부한 상상이거나 미몽이라 말한다면, 나는 차라리 이 세계가 미몽이라고 말할 것이다. 이것은 다만, 태생의 문제일 뿐이다.


1

내가 이 세계에 처음 태어나던 날. 너를 처음 만나던 날. 네 그 눈시울을 기억한다. 깊게 팬 곳에 표면장력으로 부풀어 오른 유리구슬은 절벽에 매달린 것처럼 위태로웠다. 하지만 그것이 채 땅에 떨어지기도 전, 너는 나를 보자마자 달려들더니 내 품에 안겼다.


그때 내가 깨달았던 것은 온 마음을 다해서 사랑한다는 것이, 온 힘을 다해 뼈가 으스러지도록 안아주는 것일 수는 없으며, 전혀 다른 방식의 집중력이 요구된다는 것이었다. 마치 젓가락으로 두부를 집는 것처럼(그런데 나는 두부를 먹어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이것을 알았을까?) 지극히 조심스러워야만 한다는 것이다. 너무나 쉽게 부서질 것 같은 저 연약함이 젓가락을 쥔 손에 조종당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대한 몸집 전체가 저 연약함 하나에 종속되고 지배되는 것만 같다. 정말이다.


그때에는 영락 없이, 내가 오직 사랑해야 할 것은 이것뿐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나는 너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지만,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아주 오랜 시간 사랑했고, 또 앞으로도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맹목적으로 사랑할 수밖에 없으리라고 생각하게 된다.


시간이 조금 흐른 후에서야, 나는 맹목적인 사랑이라는 것이 정당한지, 혹은 정말 가능하기는 한 것인지를 묻게 되었다. 의심하지 않는 사랑은, 종종 의심하는 사랑보다 높게 평가되는 법이지만, 도대체 우리는 어느 정도까지 맹목적이어야만 한다는 말인가. 이를테면, 나는 너를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해야만 한다고 생각했고, 사실 나는 네가 어떤 사람인지 하나도 모르고 있었겠기에 말이다. 그러나 깨달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진정한 맹목성이야말로 모든 의심과 고민들을 경유하고 나서도 목숨을 부지한다는 사실이다.


나의 맹목적인 마음은 펑펑 흐르는 축축한 포옹 앞에서, 어째서인지, 네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내가 잘못했다고 말했다. 태어나기 시작한 나의 맹목적인 마음 안에는 사랑과 죄책감이 처음부터 분열된 채로 있다. 그런 나는 이상하게 무릎이라도 꿇고 싶은 기분이다. 네 그 기분 하나를 위해서라면, 네가 죽으라고 천천하고 냉혹하게 말한다면, 나는 기꺼이 이 모든 세계를 등친 채 완전히 사라지고 싶은 기분이다. 그건 정말이지 하나도 어렵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러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상상이 오히려 모욕처럼 느껴졌고, 아마도 그 감정이 내가 처음 가졌던 경멸과 분노였을 것이다.


사랑과 죄책, 그리고 경멸, 그 모든 것이 뒤섞인 채로 있을 때. 갑자기 소스라치게 놀라던 네 그 표정도 절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네 그 표정은, 달걀을 정성스럽게 품어내다가, 마침내 그 달걀이 부화할 리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의 표정처럼 되었다. 너무나 기대했고 그리워하던 얼굴이, 남의 얼굴이라는, 생판 모르는 인간의 표정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의 참을 수 없는 실망감이 내 거대한 마음을 순식간에 짓밟는다. 네가 죽으라고 말한다면 기꺼이 죽을 수도 있으리라 다짐할 수 있었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 세상에는 죽음이라는 것보다 소름 끼치도록 괴롭고 고통스러운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고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저런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그것이 내가 처음 느낀 슬픔과 절망이었다.


그런 너는 겁에 질린 채 천천히 뒷걸음질을 치다가, 다시 다가와 내 뺨을 만졌다. 나는 그런 너를 바라보면서, 어쩔 수 없이, 이 상황에 하나도 어울리지 않는, 그러나 도대체 할 수 있는 말은 그런 것 밖에는 없었기에, "사랑해"라고 말했다. 그러자 너는 눈물을 닦고 이 세상에서 가장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말했다.


"다시 말해봐. 진짜야?"


그렇게 말할 때, 나는 네가 완전히 제정신이라는 것을 이해했다. 너는 제정신으로, 나를 뜯어보며 나를 확인하고, 나를 완전히 불신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그 표정에 이끌리고, 네 모든 기대를 충족시켜야만 했다. 그 결과가 슬픈 것이라고 해도.


"그래. 정말이야. 사랑해."


이렇게 말하자마자, 내 뺨을 천천히 어루만지던 네 그 손바닥이 일순간 저 먼 곳까지 멀어졌다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다시 돌아왔고, 세상은 온통 흔들리다 새하얘졌으며, 이명과 함께 천천히 선명해진다. 내 앞에 다시 나타난 너는 나를 향해 냉소를 짓고 있었다. 나는 그런 표정을 보면서 이제는 메마른 그녀의 눈시울을 대신하여 나의 것으로 묽게 채웠다. 나는 다시 한번 천천히 바라보면서 말했다.


"미안해. 정말이야."


내가 이렇게 말하자, 너는 깔깔거리면서 웃었다. 표독스럽고 잔인한 웃음이었다. 그러고는 이내 그 웃음을 온갖 종류의 감정과 함께 꿀꺽 삼켰다. 이제 다시 너는 슬프고 쓸쓸하게 말했다. 다시 다가와서 천천히 내 얼굴을 돌아가면서 뜯어본다. 그러면서 울먹이며 말한다.


"그래 맞아. 내가 잠시 잊고 있었어. 네가 그럴 리 없지. 내가 깜박 속았어."


그렇게 말하는 너는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너는 나를 관찰하면서, 그 자신을 관찰하고 있었다. 분노는 천천히 자신에 대한 수치스러움과 연민으로 변화한다. 그러면서 내 어깨에 손을 올린다.


"내게 미안해하지 마. 나도 네게 미안해하지 않을게. 너는 말야..."


네 말에 따르면, 나는 너를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했다. 나에게 결코 미안해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했다. 내가 정말로 네가 그리워하고 사랑하고 미워하는 그런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절대로 자기에게 사과하지도 사랑하지도, 용서할 수 있을 기회를 주지도 않을 거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뒤돌아 서더니, 다시 한낮의 미래로 떠났다. 아침이 찾아온 것이다.


그랬다. 나는 그녀의 꿈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비를 피하며 걷는 기술에 관하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