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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하 Apr 05. 2019

<나의 작은 시인에게> : 권태라는 지리멸렬


이 영화는 좋은 영화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이 영화를 제목만 보고 대강 이해했다면 예상한 것을 얻을 수는 없을 것이다. <나의 작은 시인에게>라는 제목과 간단한 줄거리를 보면, 이 영화는 흡사, "천재 소년을 찾아낸 유치원 선생님의 가슴 벅찬 감동적 이야기" 정도로 보인다. 그러나 이 영화는 천재 소년의 잠재성을 이끌어내는 이야기도 아니고, 한 아이를 기르며 자신의 또 다른 자아를 찾은 선생님의 이야기도 아니다. 


이 영화의 원제를 알아야 할 것이다. 원제는 <The Kindergarten Teacher>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시를 쓰는 천재 소년이 아니다. 오히려 일상의 권태와 평범성에 질려버린 한 유치원 교사의 이야기다. 따뜻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기대하고 본 사람들은 분명히 충격받을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배급사의 마케팅의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정을 알고 영화를 관람한다면, 분명히 이 영화의 장점을 온전히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시를 못 쓰겠으면 그냥 쓰지 마(?)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나는 물었다 : 


"아니 쓸 말도 없는데, 너는 왜 시를 쓰고 싶은 건데?" 


나는 이 영화에 등장하는 선생이 아이를 어떻게 길러내건 간에, 그녀 자신이 애초에 시를 쓰고 싶어 하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면 이 영화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나는 시라는 것이 그저 한낱 '기술'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를 쓴다는 것은 세상을 보는 한 인간의 시야이고, 무언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시는 우선 아름답건 아름답지 않건, 그것을 쓰는 인간의 가슴에 먼저 뭔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무언가를 참을 수 없다면 그것을 쓰면 된다. 그러나 무언가 쓸 말도 없으면서 그럴듯한 작품을 쓰고 싶어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한낱 허영에 불과하다. 그럴 바에는 그냥 자신의 빈약한 시야를 자조하고 시를 쓰는 헛수고 대신에 스도쿠를 하는게 차라리 낫다. 그저 허영심을 가진 사람이, 시를 쓰는 어린 소년을 통해 대리만족을 느끼고 행복한 결말을 맞는 것이라면, 이 영화에 기대할만한 것은 없다. 


하지만 이러한 나의 의심은 기우에 불과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영화는 한 아이를 성공적으로 길러내서 자아를 실현한다는 해피앤딩도 아니었고, 허영심을 포장하는 위선적인 영화도 아니었다. 오히려 영화는 그녀가 왜 시를 써야만 했는지에 대해서도 독특하고 기괴한 방식으로 분명한 답을 주었다. 나는 그 대답이 아주 마음에 든다. 이제부터는 그에 대해서 서술할 것이다. 이하에는 스포일러가 있다. 영화를 먼저 보기를 추천한다. 좋은 영화다. 



발견


리사는 아이들을 돌보는 유치원 선생이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매일 밤 평생 교육원에서 시작(詩作) 수업을 듣는다. 리사는 썩 봐줄 만한 시를 쓰지 못한다. 사람들은 그녀의 시가 어디서 본 것 같다고 말하면서, 그녀를 높게 평가하지 않는다. 거기서 그녀는 그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익명의 한 사람일 뿐이다. 그러던 그녀는 자신의 한 학생인 지미가 혼자서 무언가를 중얼거리는 것을 듣는다. 그것은 시였다. 누군지 모를 '에나(Anna)'라는 소녀의 아름다움을 예찬하는 내용이다. 어린아이가 만들었다기에는 너무나 그럴듯하고 탁월하다. 리사는 그 내용을 받아 적는다. 그러면서 지미의 보모에게 그와 같은 다른 시가 있다면 그것을 받아 적어 달라고 말한다. 여기까지만 하더라도, 우리는 여느 다른 영화가 그렇듯, 그 아이의 재능을 알아보는 한 명의 선생이 그 아이의 잠재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려 행복한 결말로 나아가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내용은 조금 더 기이하게 흘러간다. 


집착


리사는 점점 지미에게 집착하기 시작한다. 아이가 낮잠을 잘 때에 깨워서 시를 더 읊어보라고 말하고, 지미에게 자신의 핸드폰 번호도 준다. 그러면서 시가 떠오르면 바로 자기에게 전화하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이에 관객들은 점점 그녀의 행동이 무언가 어긋나고 있다고 느낀다. 처음에는 그녀가 그저 아이의 재능에 감탄하고 그것을 잘 알아봐 주는 사람이고, 우리가 생각한 결말로 향해서 나아갈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다가, 이제는 그 핀트가 조금씩 기괴해진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녀는 지미의 시를 자신이 쓴 것처럼 평생 교육원에서 발표도 한다. 그녀는 처음 받아보는 칭찬을 그 수업에서 듣는다. 관심을 가지지 않던 선생도 극찬하고, 마침내 그 선생과 불륜까지도 저지른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지미의 시를 그저 도둑질하는 것도 아니다. 사람들이 지미의 능력을 알아보지 못한다고 말하며, 지미의 보모 노릇도 도맡아 하겠다고 자청한다. 그러면서 지미를 무단으로 발표회에 데려가 발표도 시킨다. 이것을 알게 된 지미의 아버지는 유치원을 다른 데로 옮겨 버린다.


납치


지미가 사라지고 처음에 리사는 다시 평범한 삶으로 돌아온 것처럼 보였다. 장을 보고 가족과 함께 둘러앉아 오랜만에 식사를 한다. 그러다 불현듯 남편에게 좋은 하루를 보내라고 말하면서 짐을 싸서 나가더니, 자동차를 타고 유치원으로 향하는 지미를 미행한다. 그러더니 지미를 몰래 빼다가 캐나다 근처 국경에 소풍을 떠난다. 여기서부터 우리는 무언가 완전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녀는 국경을 넘어서 지미를 데려가 키우려고 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데 그녀가 샤워를 하는 사이, 지미는 욕실 문을 잠가버리고, 경찰에 신고한다. 그리고 지미는 구출되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나 자신의 평범성으로부터의 도피


리사의 기괴하고 어긋난 선의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녀가 지리멸렬한 권태와 평범성 안에서 몸부림치고 있음을 이해해야만 한다. 즉, 그녀의 어긋난 심리 자체를 껴안아야만 하는 것이다. 영화는 곳곳에 그런 징후들을 배치해 놓았다. 핸드폰만 하고 엄마에게는 관심조차 가지지 않는 딸, 대학을 그만두고 입대하겠다는 아들, 뚱뚱하고 무관심한 남편. 그녀가 시를 쓰고 싶었던 것은, 자신의 삶이 그 안에서 사라지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녀가 시를 쓰지 못하고 또 진정으로 할 말이 없어도 시를 써야만 했던 것은 새로운 변화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를 몰라주고, 이 세상에서 나는 사라질 것만 같다.


리사는 지미의 아버지를 방문해서, 지미의 보모인 베카가 지미를 잘 돌보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보모를 내쫓게 하고 그녀 자신이 지미를 방과 후에도 돌보겠다고 말했다. 여기서 우리는 리사가 자신만이 지미의 진면목을 볼 수 있다고 믿었기에 베카의 자리를 빼앗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녀는 베카를 원래 좋아하지 않았다. 베카가 지미를 데리러 왔을 때, 리사는 그녀의 꿈이 배우라는 것을 알게 된다. 거기서 리사는 "Good luck with that(참 잘 됐으면 좋겠네요)"라는 식으로 응수한다. 누군가 보모 일을 하고, 꿈을 위해서 돈을 벌고 있다는 사실을 들을 때, 그녀는 오히려 불편함을 느낀다. 그녀의 열등의식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그러면서도 지미의 시를 도둑질해서 발표할 때, 사람들이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것에 그녀는 도취감을 느낀다. 무언가 대단한 것을 썼다는 것만으로도 시를 가르치는 강사는 그녀에게 호감을 표시한다. 그녀에게 입을 맞추고, 그녀에게 빠져든다. 하지만 리사는 알고 있다. 그 강사는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시를 쓸 수 있는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녀는 지미의 시가 아닌 그녀의 순수 창작물도 읽어줘 본다. 그리고 그의 평가를 듣는다. 뜨뜻미지근한 반응. 결국 평범한 모든 것을 증오한다고 말하면서도, 그녀의 모든 평범성을 구성하는 한 가운데에는 다름 아닌 그녀 자신이 자신이 놓여 있다. 다른 무엇이 평범하고 지리멸렬한 것이 아니라, 시라도 써서 이 모든 것을 탈출하려고 하는 자기 자신이, 그리고 그조차도 하지 못해서 아이의 시를 자신의 시로 가장하는 자신이, 그것으로 강사의 환심을 사서 섹스나 하는 자신이 가장 지리멸렬하고 평범하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평범성으로부터 다시 한번 도망친다. 시를 쓸 수 없는 자신의 평범성을 은폐하기 위하여, 이제는 시를 짓는 한 소년의 천재성을 유일하게 알아봐 주는 선생님이 되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이 아이의 능력을 알아봐 주지 않는다고 더 강박적으로 토로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봐 주지 않는 이유와 같은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내가 한 아이의 비범함을 알고 있듯이, 내 안에도 여전히 비범한 무엇이 있어야만 한다.


지미가 성공적으로 시를 발표한 이후에, 사람들이 묻는다 : "그 시에 등장하는 에나(Anna)라는 여인은 누군가요?" 이에 대해서 지미는 말한다 : 


"그는 제 유치원 보조교사인 메건이에요"


이 말을 듣고 리사는 무대에서 내려가 화장실에서 울음을 터뜨린다. 시를 쓰지 못하는 자신으로부터 도망쳐, 아이를 훌륭하게 키울 수 있는 유일한 사람으로 피신했던 그녀는, 아이의 시에 등장하는 대상조차 되지 못했다. 그것에 서글퍼져서, 그리고 아무도 자신을 특별한 사람으로 생각해주지 않는 것 같아서 그녀는 그리 울었던 것이다. 그녀는 살기 위해서,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기 위해서 마침내 지미를 납치해 국경을 넘을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래서 왜 시를 쓰려고 했던 거야? 


여기에 대해서 영화는 당당하게 답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 


"사는 게 따분하고, 평범하고, 외롭고, 권태로워서 그랬다. 뭐라도 창작해서 만들어내지 않으면, 나는 이 권태로운 삶 안에서 파묻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질 것 같아서."


나는 바로 이러한 암시가 그저 허영심이라고 생각하지만, 이것은 영화가 무시하고 넘어가려는 심리가 아니라, 정확히 영화가 보여주려 했던 그것이다. 욕실의 문을 잠근 지미에게 그녀는 소리치며 말한다 : "사람들은 너를 이 세상으로 부터 지워버릴 거야." 그 말은 사실 지미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그녀 자신에게 하는 말이다. 그러나 그녀 역시도 평범한 한 사람에 불과했고, 그녀가 그토록 혐오했던 지미와는 다른 멍청한 아이들, 그녀에게 무관심한 가족들과 마찬가지인 한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이것은 그녀의 그릇된 심리 상태를 보여주고 있지만, 동시에 우리 안에 잠들어 있는 깊은 두려움을 자극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안다. 나는 특별할 것 없는 한 사람이다. 나는 내가 결코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뛰어나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러면서도 은연중에 우리는 기대하고 있다. '앞으로 내 삶은 그러나 여전히 달라질 수 있다. 나는 그래도 무언가 더 특별해질 수 있다. 내 삶은 지루하고 권태롭게 끝나지만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생각을 결코 드러내 놓고 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평범한 삶 앞에서 비참해지고 싶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사는 방법을 배워나간다. 


그랬기에 열심히 자신의 평범성으로 도피한 그녀의 모습이 기괴하고 두려우면서도, 우리는 그 태도를 이해할 수 있다. 오히려 이해할 수 있기에 두려운 것이다. 이 지리멸렬한 삶 안에서 우리가 조금 더 남들과 달리 특별해진다고 해도, 사람들은 종국에 가 우리를 잊을 것이다. 세대는 교체하고, 우리가 그 어떤 부귀영화를 누린다고 해도, 결국 다음 세대가 주인공이 되는 날이 올 것이고, 또 그 안에서 더 능력 있는 자들만이 빛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언젠가는 그렇게 늙어 죽는다. 


그 안에서 그저 하나의 아름다운 시를 쓰고 싶어 했던 그녀는, 자기 안에 그러한 재능이 결코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삶으로부터 탈출구를 찾아야만 했던 것이다. 그래서 다시 영화는 처음 내 질문에 다음처럼 답할 것이다 : 


"시를 쓰지 못해서 시를 포기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시를 쓰지 못하는 바로 그 지리멸렬 때문에야 무언가 써야만 했던 거야." 


그렇게 말하며 서럽게 우는 사람 앞에서, 재능이 없으면 그냥 포기하라는 그런 말은, 아마도 죽으라는 말과도 다름없는지도 모른다. 영화는 그러한 마음의 서술을 뒤틀린 집착과 오열, 납치라는 결말을 통해서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우선 그녀를 이해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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