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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하 Mar 28. 2019

영화 <바이스> ; '악덕'은 '대리' 안에 있다



영화 <바이스>는 신보수주의의 대표주자이자 대단한 권력을 누렸던 딕 체니에 대해서 다룬다. 그는 조지 W 부시의 부통령직을 맡았다. 이 영화는 그의 일대기를 최대한 자세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비판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일은 아니라서, 이야기 대부분에 대해서는 옆동네를 구경하듯이 바라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만큼 정체성 정치와 같은 것에 대해서 염증을 가지고 있던 나는 이 영화를 그렇게 편안하게 보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런 비판적인 태도를 가지고서 이 영화를 보던 나는 마지막 장면에서 뒤통수를 한대 얻어맞았다. 아마도 그 장면에서부터 시작하면 좋을 것이다. 앤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는 중에, 삽입된 하나의 장면이다. 거기서 중년의 한 명의 사내는 다음처럼 말한다 :


"이제 내가 이 영화가 계속 불편한 이유를 알겠군요. 이거 순 리버럴(미국의 좌파 정당적 성향)에 대한 이야기지 않소!"


아마도 나는 영화를 보면서 정확히 그와 똑같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가 그렇게 말하자, 다른 대화 상대자는 이렇게 말한다 : "이 영화는 어쨌든 펙트에 기반해서 서술된 것은 아니겠어요?" 그리고 그 사람은 중년의 사내에게 너 같은 놈들이 트럼프를 뽑았다는 말을 하면서 싸움이 벌어지고 이 영화는 진정으로 막을 내린다.


나는 딕 체니가 한 일을 부인하지도 않고, 그가 한 일 이 잘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만큼 딕 체니를 조롱하는 그러한 일이 진보의 승리나, 보수의 패배를 의미하지도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나의 생각은 정치적 맥락에서 볼 때 별로 건전한 생각도 아니다. 어쨌든 이 영화는 직접적으로 자신의 폭로 행위를 정치적인 맥락에서 이야기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실제로 돌아가는 권력의 작동방식과, 그에 얽힌 딕 체니의 일대기를 보여주었을 뿐이다. 그러면서 있어서는 안 되는 부당한 정당성 위에서 시작된 이라크 전쟁과, 그의 크고 작은 비리들의 실체를 드러낸다. 이러한 사실 앞에서, '모든 보수주의적 가치가 틀린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야 말로 어쩌면 파벌 싸움 한가운데에 있다는 사실을 드러낼 뿐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영화가 초점을 맞추는 바로 그것, 실제로 어떤 일이 있었고, 또 왜 그런 일이 있었고, 또 앞으로 어떻게 해야 그러한 일이 발생하지 않는지에 대한 것이다.


임금 뒤편의 권력

영화의 제목은 <VICE>이고, 이것에 대해서 자세하게 해석하는 것은 별로 똑똑한 일은 아닐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 제목 자체게 이미 영리하게 지어졌기 때문이다. '바이스'라는 것은 우선 부통령직을 지낸 딕 체니의 직위를 함축한다. 즉, Vice-President다. 그런 점에서 Vice라는 것은 보조라는 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대리함'이라는 것도 의미한다. 미국에서는 대통령에게 어떠한 일이 생기면 우선 부통령이 그 역할을 대리한다. 그러나 동시에 Vice라는 말은 '악덕'이라는 것, '해악'이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딕 체니는 대선 출마에 대한 가능성이 좌절되고, 아들 부시에게 부통령을 제의 받는다. 부통령이 되는 것에 대해서 망설인다. 왜냐하면 그는 부통령이 그저 들러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이내 자리가 권력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자리를 결정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부통령이 의회에서도 자유롭고 대통령으로부터도 자유롭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며 자신의 권한 확대를 부시에게 제안하고, 그는 하나의 국가에 얼굴 마담이 되는 대신에 그 뒤에 숨은 권력이 되는 쪽을 선택한다.


조용한 권력, 그것은 사람들이 떠들 때 상황을 지켜보고 자신을 위한 최선의 경로를 찾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점에서 이러한 능력은 권력을 가지는 것에 대한 필요조건이다. 어쩌면 그것은 권력과 정치 싸움에서의 중요한 하나의 전략일 것이다. 그러나 그만큼 떠들어대는 대중들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조종당하게 된다. 영화는 그러한 은폐 전략에 대해서 몇 가지를 공개하기도 한다. 대충 꼽자면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1) 기만적인 언어 싸움


'지구 온난화(Global warming)'에서 '기후변화(Climate change)'로 바꾸는 전략, '상속세'를 '사망세'로 바꾸는 전략이다. 자신들에게 위협이 되는 개념은 덜 위험하고 온건한 말로 바꾼다. 그리고 상대편이 추진하고자 하는 정책의 언어는 정당한 것에서 위험한 것으로 바꾼다. 사람들은 그래서 상속세를 올린다는 말이 아니라 '사망세'를 올린다는 말에 대해서 더 예민하게 반응하고, '지구 온난화'보다 '기후 변화'라는 용어에 대해서 덜 예민하게 반응한다.


(2) 외부의 뚜렷한 가상의 적을 설정


조지 부시는 플로리다 주의 애매모호한 승리로 인해 당선되었다. 거기에서는 무효표가 무더기로 나왔고, 아슬아슬한 표 차이로 엘 고어를 누르고 당선되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그의 당선에 대한 정당성은 늘 의심을 받아 왔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체니는 911 테러를 이용한다. 알카에다로부터 말미암은 테러를 이라크 전반으로 확대시키고 사담 후세인이라는 독재자를 명백한 적으로 돌린다. 그리고 조작된 정보였던(미국 정부 스스로에 의해서 조작된 것은 아니었다) 대량 살상 무기가 이라크에 존재한다는 것을 빌미로 삼기도 했다. 그래서 발생한 결과는 군인은 물론 민간의 대량 살상을 야기했다. 그리고 결국 대량 살상 무기는 발견되지 않았고, 오히려 IS의 탄생과 창궐에 일조하는 결과에 이르렀던 것이다.


자신만을 생각하는 권력


소리 없는 권력, 상황을 지켜보고 그것을 자신의 최선의 전략을 사용하는 권력. 이것은 권력의 필요조건이다. 그러나 그 이외에 권력에는 책임과 청렴, 그리고 공익을 위하려는 태도 따위들도 포함될 것이다. 그것을 결여한 권력은 더 이상 대중을 대리하지 않고 오직 그 스스로만을 대리한다. 그 증거로 딕 체니가 그토록 집착했던 것도 행정부 만능주의였다. 그리고 그것은 대통령 만능주의도 아니고 되려 부통령인 자신의 만능주의로 만들었다. 이 모든 것들은 사람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사이에, 또한 사람들이 떠드는 만큼 그에게 더 유리하게 작용했던 것이다.


그렇게 미국이 독재자였던 후세인을 공격의 대상으로 삼는 사이, 미 행정부 자신이 그들의 적을 닮아간다. 그 이유는 그들이 온갖 공익과, 테러에 대한 복수라는 대의를 설정해 놓고서 사실은 그러한 것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권력자의 자리는 국가를 위해 있지만, 자리에 앉은 자들은 자리 자체를 위해서 살고자 한다. 어쩌면 이것은 권력 자체에 따르는 필연적인 성격일 수도 있다. 이 세상에 자신이 더 할 수 있는 일을,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바로 그 일을 기꺼이 하지 않으려 할 수도 있다. 권력은 '원하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바로 그것이 '권력'이라고 말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엔딩 크레딧 이후의 우리의 이야기


그래서 이 영화를 보고 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누군가는 그토록 싫어하는 공화당의 해악을 폭로한 이 영화를 보고 카타르시스를 느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가 처음에 언급한 미국 꼰대 아저씨의 말을 보면서 더 큰 웃음을 터뜨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만큼 그것에 쾌감을 느끼는 것 자체가 이미 너무나 정치적이다. 이 세상에 나를 위한 권력이라는 것은 없다. 내가 지지하는 정책에 일시적으로 손을 들어주고, 내가 하고자 하는 것에 힘을 실어주는 정부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들은 영원히 나의 편일 수는 없다. 그렇다면 결국 나 자신 스스로가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자신이 보수주의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면, 그만큼 딕 체니가 도대체 어떠한 부정을 어떻게 저질렀는지를 똑바로 보고 생각하라. 그리고 우선 자신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실제로 이라크 전쟁과 911 테러가 어떠한 관계를 가지는지, 사실은 도대체 하나도 관계를 가지지 않았던 것은 아닌지 스스로 알아보고 생각하라. 그런 짓을 하지 않았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간 그 전쟁에 대해서 이제는 언급을 꺼리고 있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의 뒤통수를 때리는 그 장면을 그렇게 읽었다.


이 영화는 진보주의자들의 등을 긁어주기 위한 영화가 아니다. 권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리고 그 숨은 권력이 어떻게 우리를 기만하는지이다. 그리고 이 사실을 알았다면, 우리는 언젠가는 속을지라도 당장 생각 없이 속았던 그 순간의 나를 털고 일어나야 한다.


핵심은 '지구 온난화'에서 '기후 변화'라는 용어로 바꾼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지구 온난화'가 실제로 얼마나 어떻게 위협적인지를 스스로 찾아보고 이해하는 일이다. 분명히 누군가는 '지구 온난화'가 별로 큰 위협이 아니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들은 전혀 정치적이지 않은 의미에서 '기후 변화'라는 용어가 더 적절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누군가는 단지 녹색 정당을 저지하기 위해서 그렇게 주장하기도 한다. 그런 혼란 속에서 나는 실제로 지금 우리가 처한 그 상황을 '지구 온난화'라고 부르든 '기후 변화'라고 부르든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이 질문에 스스로 대답할 수 없다면 나는 그것을 뭐라고 부르든 모르고 있는 것이다. 나는 '상속세'를 '사망세'라고 부르든 아니면 그대로 부르든 간에, 실제로 그 정책이 시행되거나 시행되지 않을 때 세상이 어떻게 바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경제적 측면에서 어떠한 이득이나 손실을 가져다주는가? 그것은 윤리적 측면에서 어떻게 정당한가? 혹은 부당한가? 그에 대해서 대답하지 못하고, 단지 내가 지지하는 정당이 바로 그 논제를 지지한다는 그 이유로, 그리고 그 이유로 이 영화에 대해서 분개하거나 혹은 단지 쾌감만을 느낀다면 우리는 이미 소리 없는 권력이 좋아하는 시끄러운 인간이 되어 있는 것이다.


악덕은 대리에 있다



대의 민주주의는 필요악이다. 이제 사전적 의미대로의 직접 민주주의를 시행하는 일은 불가능해졌다.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러나 그만큼 우리가 스스로의 권력을 위임하고 눈을 감고 있을 때 우리는 '대리'의 '악덕'에 노출되어 있다.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판단해야 된다. 내가 무엇을 모르고 또 무엇을 알고 있는지 이해해야 한다. 지금 세상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왜 나는 이러저러한 정책을 지지해야 한다고 믿는가. 여기에 대해서 대답을 할 수 없다면, 바로 그때 그것에 대해서 더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의 말을 기울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누구인가. 그는 단순히 말을 그럴듯하게 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그는 실제로 핵심을 건드리고 있는 것인가.


그런 뒤에 우리는 기꺼이 실망할 수 있다. 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거나, 정치인이라는 작자들이 나보다 더 똑똑하고 기만적이어서 그랬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수많은 대중적 감정의 흐름에만 의존하여 휩쓸려다닌 것이 아니라, 정말로 똑똑히 보고자 하고, 하나하나 따져보고 누군가를 믿어다면, 진정으로 실망하고 반성할 수 있다. 그러지 않았던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저 권력 하나 없는 약자였기 때문에 속았다고 말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우리는 끊임없는 대리의 악덕 안에서 살아가게 된다.


그렇다면 차라리 똑바로 보는 것이다. 똑바로 보려 한 뒤에 틀리는 것과, 모든 것을 대리에게 맡겨 놓은 뒤에 틀리는 것은 다르다. 전자는 패배한 것이고 후자는 자초한 것이다. 자초한 것에는 그저 자조만이 있을 뿐이다. "결국 개 돼지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그렇게 말하며 영화가 만들어 놓은 리버럴의 승리에 만족하며 집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패배감을 느낀다면, 나는 내가 본 것들을 정당하게 사람들을 위해 늘어놓을 수 있을 것이다. 도대체 그 생각은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더 어떻게 보고 어떤 말을 하고, 그러다 또 어떠한 행위를 세상을 위해 할 수 있을 것인가. 그에 똑똑하게 대답하는 삶. 대리되지 않는 삶, 그것이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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