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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샤 Apr 14. 2021

봄과 궁과 가족의 문화

가족의 문화를 사진으로 남기는 일

  화를 내는 방법을 모르는 것 같은 아빠는, 1년에 한 번 그것도 새해 첫날 화 비슷한 걸 내셨다. 

  "빨리 일어나! 옷 입어! 빨리!"

  사실 화를 낸 건 아니고 재촉이었지만, 초등학생인 내가 듣기에는 화를 내는 것처럼 들렸다. 한겨울 컴컴한 밤, 새해부터 난리다. 아휴, 싫다고, 제발, 잠 좀 자자고. 온갖 짜증을 다 끌어다 내어도 아빠는 그저 옷을 입고 나갈 생각뿐이었고, 어쩐지 엄마도 동조하고 있었다. 입이 나올 대로 나온 나와 동생은 빨간 아토ㅅ 차 뒤에 타고 어두운 창밖을 바라보았다. 

  곧 도착한 곳은 태백산 등산로 주차장이었다. 여전히 어두운 밤이었지만 사람들은 꽤 많았다. 밤의 겨울 공기에, 무릎까지 쌓인 눈. 도대체가 맘에 드는 건 하나도 없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내 눈 앞에 놓인 것은 겨레의 젖줄, 태백산맥의 명산 '태백(太白) 산'이었고, 두 시간 후 나는 정상에 올라있을 예정이었다. 그 두 시간을 피할 수만 있다면 뭐든 할 마음이었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피할 방법은 그 무엇도 없다는 것은. 그저 묵묵히 올라야 한다는 것을. 

  30여 년이 다 되어가는 기억이기 때문에 등산 코스가 어땠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그러나 지금도 명확한 것은, 정상에 거의 오를 즈음 새벽을 품은 푸르른 여명과 새벽보다 더 푸르른 산 공기와 어쩌면 원래는 파란색이었을지도 모르는 눈의 바닥과, 천년을 살고 천년을 죽는다는 태백산 정상의 '주목(朱木)'을 마주할 때면, 두 시간 전의 나와는 전혀 다른 내가 되어있었다는 사실이다. 한 해의 첫 해를 보는 벅찬 감동, 파랗게 서리던 입김이 태양을 받아 붉게 번지는 걸 지켜보는 맑은 눈빛, 무엇이든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마음 이러한 것을 심어주기 위해 아빠는 새벽 세 시부터 온 가족을 깨워 그렇게 닦달했었다. 

  내려오는 길은 초등학생 아이에게 즐거움뿐이었다. 당시 태백산 관광코스였던 '오리궁둥이 썰매'를 타며 내려왔다. 중간에는 눈을 받아 녹여 라면을 끓여먹었다.(당시의 산행은 지금과는 달리 취식이 가능했다) 지금까지도 내 인생 가장 맛있는 라면은 그 라면이다. 내려오는 길은 금방이었다. 또 올라가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다. 이렇게나 멋진 산이 우리 집 근처에 있다는 것이 자랑이었고 뿌듯함이었다. 행복한 마음을 이고 겨울산을 오르기 위해 새 한 해를 잘 보내고 싶은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태백산 주목, 출처 동아일보



  가족의 문화, 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가 많아졌다. 남편 친구 가족은 꽤 먼 거리를 주말마다 산책을 다닌다. 다른 가족은 1년에 두 번씩 해외여행을 다닌다. 아이들이 점점 커 가면서, 내가 자란 가족의 문화는 무엇이었을까 생각해 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바로 위의 기억이다. 새해 첫 해를 보기 위한 산행. 

  내가 자란 곳은 산으로 둘러싸인 작은 도시였다. 자라면서 '산감옥에 갇혀 산다'라고 친구들과 푸념을 했지만, 그 푸념의 안쪽에는 늘 산을 애정 하는 마음 조각도 있었다. 산을 애정 하게 된 마음은 순전히 아빠의 새해 산행덕분이었다. 새벽산의 정상에서 떠오르는 해를 보며 간절하게 빌었던 것들 중 얼마가 이루어졌는지는 기억나지도 않고, 지금 와서는 중요하지도 않다. 내 유년의 가족이 그렇게 멋진 가족의 문화를 가졌다는 것, 지금까지도 애틋한 기억으로 남아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이는 지금의 나를 이루는 실로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아이들에게 '산'의 아름다움을 말해줄 때, 엄마가 겪은 것을 순수한 결정체로 기억해내어 전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아이들이 느끼는 우리 가족의 문화는 어떤 것이 있을까. 훗날 아이들이 자랐을 때 어린 시절의 가족을 떠올리면 어떤 문화를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을까.  





  벚꽃의 꽃말은 '중간고사'라더니, 올해는 제대로 틀렸다. 3월 말이 되자 벚꽃들은 경쟁하듯 만개했다. 우리가 받은 휴가날은 4월 둘째 주인데 제발 천천히 피어 줘, 라는 나의 기도는 철저히 무시했다. 

  서울로 가는 고속도로에서 벚꽃은 찬란히 잎을 휘날리고 있었다. 영화 '초속 5센티미터'는 벚꽃이 지는 속도라는데, 다 거짓말이었다. '초속 5미터'의 속도로 휘날린 벚꽃은, 서울로 들어서자 더욱 찾아보기 힘들었다. 벚꽃 사진을 찍으려고 계획한 건데, 다 망했다. 그래도 한때 내 애정의 종착지이던 '인사동'은 그대로인 것 같아 보여 다행이었다. 20대의 얼마나 많은 시간을 인사동과 경복궁과 광화문과 근처의 미술관에서 지냈는지, 지나가는 많은 사람들을 배경으로 책을 읽고 또는 실연의 눈물을 흘렸는지 잠시 생각해 보았다. 그 당시에는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었는데, 지나고 보니 스치는 몇몇 장면으로 남는 추억이 되어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의 목적지 경복궁에 도착했다. 


  좋아하는 칼국수집에서 식사를 하고, 예약해 둔 한복 대여점으로 갔다. 처음 한복을 빌릴 때 16개월이던 첫째 딸은, 이제 자기 한복과 장신구와 가방까지 고르고 둘째를 코디해 준다. 

  "이리 와 봐, 이건 어때? 치마가 별로야?"

  "이 가방 예쁘지? 머리는 이거로 하고 싶어?"

  부산스러운 두 아이는 잠시 두고, 19개월 천방지축 막내의 한복을 고른다. 종류가 많지 않아 아쉬웠지만, 아이들은 무얼 입어도 예쁘다. 막내까지 다 입히고 이제는 내 차례이다. 늘 뻔하다고 피해온 분홍치마가 올해는 눈에 들어온다. 남미 계열로 보이는 외국인이 내가 봐 둔 분홍치마를 잡았다가 다시 걸어 둔다. 다행이다. 내가 한복을 갈아입고 나오니 그 친구는 새빨간 어우동 치마를 입고 있다. 역시, 외국 친구들은 원색을 좋아해. 유룩소골져스(gorgeous), 웨얼 알 유프 롬? 암 프롬 코스타리카. 와우, 코스타리카, 굿. 대화는 끊겼다. 코스타리카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 내가 한심하고 아쉬웠다. 동시에 코로나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 시대가 벌써 온 건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복 대여점을 활개 치고 다니는 세 마리 때문에 바로 나와야 했다. 


  봄 또는 가을마다 궁에서 한복 사진을 찍는 것은 이번이 세 번째이다. 2016년 가을 경복궁 근처에서 동생이 상견례를 했다. 상견례를 마치고 시간이 남은 우리 가족은 경복궁으로 향했고, 유난히 메이크업이 잘 받은 나는 한복이 입어보고 싶었다. 이 것이 시작이었다. 곧 둘째 임신과 출산으로 좀 쉬었다가, 2019년에 집 근처 화성행궁에서 추억을 남겼다. 이 때도 셋째를 임신 중이기는 했으나, 첫째와 둘째의 예쁜 순간들을 남겨두고 싶었다. 그때의 둘째 역시 한복을 입고 흙을 주워 먹는 16개월이었는데, 지금은 자신이 한복을 고르고 있다. '엘사'가 되고 싶다고 하늘색 치마를 골랐다. 그리고 2021년 4월, 세 딸과 처음으로 경복궁 나들이를 한 것이다.

 


2016년 경복궁
2019년 화성행궁
2021년 다시 경복궁





  돌이켜 보니, 이 모든 것은 남편의 큰 그림이었다. 가족사진을 찍어주길 좋아하는 남편은, 시간만 되면 카메라 배터리를 충전한다. 좋은 곳이 보이면 멈춰 서서 '여기서 사진 찍어주고 싶다'며 구도를 잡는다. 가족을 예쁜 배경 앞에 세워두고 찍어주고픈 남편이 올해도 물어왔다. 

  "올해도 화성행궁으로 갈까요, 오랜만에 경복궁으로 갈까요?"

  아이 셋과 나들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에 고민이 컸으나 아이들의 지금의 순간은 말 그대로 '지금' 뿐이기에, 조금 무리를 했다. 부모는 아이의 추억과 미래를 위해 존재한다는, 영화 '인터스텔라'의 머피 아버지가 한 말을 다시 떠올렸다. 아이들에게 추억을 남겨주기 위해, 부모는 '지금'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마음을 알아야 한다. 또 오랜만에 서울 나들이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아름다운 봄날의 경복궁 곳곳에 우리 가족의 추억을 남겨두고 왔다. 



  "엄마, 우리 또 한복 입고 사진 찍으러 가요. 한복 입고 사진 찍는 거 정말 좋아요."

   

  아이에게 이러한 기억을 예쁜 추억으로 남겨줄 수 있는 것, 내가 이룬 가족의 문화로 잡아가고 있다. 내년은 덕수궁으로 일단 이야기해 보았는데, 그것은 내년의 일이다. 

내년의 봄이 이끄는 곳으로, 우리 가족의 문화를 이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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