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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샤 May 12. 2021

어쩌다 딸만 셋이네요

부모로서의 마음가짐을 다잡으며

  손이 마비가 되는 기분이다. 어깨도 뻐근하다. 아직 한 마리 더 남았는데, 그냥 묶지 말까 싶다. 엘사 동생 안나 머리 해달라고 해서 땋아줬는데, 벌써 산발이다. 아이들의 잔머리는 아이들을 닮아 고집도 세다. 기를 쓰고 삐져나온다. 나 같은 곰손 엄마가 땋아준 것에 감사는 못할 망정 안나 머리가 아니라고 울상이다. 아놔, 안나고 뭐고 확 삭발을 시켜버려. 결국은 머리끈을 빼버린다. 

  "엄마도 더 못해! 그냥 하나로 묶고 얼른 가. 늦었어!"

  훌쩍훌쩍 위아래로 들썩대는 조그만 등을 마주 하고 포니테일로 묶어버렸다. 휴, 20개월 막내는 아직 머리가 많이 없으니 오늘은 그냥 핀만 꽂아 주자. 겨우 아침 머리 대전(大戰)이 끝이 났다. 그렇다, 세계 3차 대전이 일어난다면 그건 매일 아침 우리 집인 것이다.

 

이런 건 생각도 못하고요
이 안나머리를 해주다가 아침 소중한 시간 15분 잡아먹고 결국 샤우팅으로 마무리, 안나 머리는 당연히 실패.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애를 셋을 낳았는데, 그게 다 딸이다. 사실 나는 아들이고 딸이고 딱히 바라는 성은 없었다. 남편은 아들 셋을 낳아 육군, 해군, 공군 시키는 게 꿈이었는데, 안타깝게도 꿈으로 끝나고 말았다. 셋이나 낳았지만 아들 하나 없는 게 아주 조금 아쉬웠지만, 더 이상의 진한 감정은 없었다. 키울수록 단 하나, 머리 묶기만 제외하고, 아들 엄마들이 부럽게 생각되는 건 없다. 아침마다 셋을 앉혀놓고 옆에는 머리끈을 수북이 쌓아두고 '이리 와, 머리 묶게'하면, 등원 전쟁의 하이라이트가 시작되는 것이다. 

  노란색 끈으로 마음에 들게 묶었는데, 핑크로 묶어달란다. 1차 부글부글을 진정하고 다시 풀러야 한다.(머리끈을 수북이 쌓아둬야 하는 이유) 겨우 다시 묶었더니 아까보다는 안 예쁘단다. 다시 풀려 하면 '아아아아아아아, 아프다고~' 소리 지르는 통에 2차 부글부글을 진정시켜야 한다.(아까 안 풀었으면 됐잖아!) 머리를 하나로 묶어 줬더니 갑자기 친구를 소환한다. 엄마, 서윤이는 이렇게 이렇게 예쁜 머리 잘하고 오는데 나도 그 머리 하고 싶어. 아니, 서윤이 엄마는 왜 손재주는 좋아가지고 나를 나쁜 엄마로 만드시는 건지. 3차 부글부글은 진정시킬 새가 없다. "그럼 서윤이 엄마한테 가서 묶어 달라고 해!" 

  둘째의 이름을 부르고 앞에 앉힌다. 머리를 묶어야 하는데 가만히 있지 않는다. 가만있어, 가만히, 좀, 움직이지 마, 앞에 봐, 혼난다, 그만 움직여. 4차 부글부글부터는 진정이고 뭐고 엄마가 동물이 되는 것이다. 야! 가만 있으라고! 등짝 스매싱과 울음소리 와중에 내 손은 바쁘다. 겨우 묶고 나서 보면 여기 삐죽 저기 삐죽이지만 묶은 게 어디냐 하며 막내를 호출한다. 이건 뭐, 아직 사람 되려면 멀었다. 엄마를 보고 씩 웃더니 벌러덩 눕는다. 무릎에 앉혀서 좋아하는 노래를 불러주며 묶다 보면 '이건 무슨 형상이지' 싶은 머리가 되고야 만다. 어쨌든 끝났다. 하루의 시작을 여는 큰 수고가 끝나는 것이다.

 

전봉준께서 보시면 '형님'할 헤어스타일
묶을 땐 이 정도 산발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진심으로 머리 묶는 아르바이트를 고용할까 싶고, 요즘 머리 땋아주는 기계가 있다는데 하며 검색을 하게 된다. 머리땋기 무형문화재 비공식1호인 옆 동 친구는 아들만 연달아 셋을 낳았다. 딸 머리 땋아주는 게 소원이에요 언니, 하는 친구에게 '옛다, 니 소원이다. 다 받아라' 하며 아침마다 아이들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세상은 늘 불공평했다. 신은 인간계의 밸런스 붕괴를 즐기는 듯하다. 그런 친구에게는 아들을 셋이나 주고, 나 같은 곰손에게는 아침마다 머리를 만져 주고 땋아주고 묶어줘야 하는 형벌에 시달리며 살게 하는 걸 보면 말이다. 






  아이를 좋아한다기보다 자식 욕심이 있는 남편의 뜻을 따르기 위해 애를 셋을 낳았다. 임신-출산-수유-임신-출산-수유-임신-출산-수유로 나의 만 6년을 가득 채워준 존재들은 다 '딸'이다. 셋째의 성별을 알고는 시어머니께 전화드리면서 펑펑 울었다. '죄송해요' 내 잘못이라곤 하나도 없었지만 죄송하다고 말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이미 손녀만 넷이신 시어머니는 기대가 크셨다. 그 누구의 잘못이 아님을 알면서도 넘치는 아쉬움을 감추지 않으셨다. "걔가 아들 몫까지 하겠지, 그런 뜻으로 하느님이 주셨을 게야.'

 

  애셋을 키운다 하면 많이 듣게 되는 말은 다음과 같다.

1. 애국자시네요.(남편이 군인이라 충분히 애국하고 있습니다만)

2. 에구, 힘들어서 어째요.(뭘 어쩌긴요. 힘들어서 죽는소리하며 키우고 있습니다)

3. 크면 진짜 너무 좋아요. 부럽네요.(그럼 클 때까지 키워주셔도 됩니다만)


여기에, 그 애셋이 다 딸이라고 하면 말투가 품는 온도와 명도가 조금씩 올라가는 것이다.


1. 어머, 전생에 나라 아니 지구를 구하셨네요.(그럼 결혼을 안 했을 텐데요)

2. 요즘은 딸이 대세예요, 너무 잘하셨어요.(제가 잘하려고 잘한 건 아닌데, 어쨌든 잘한 일 같기도 한 느낌적인 기분입니다)

3. 나이 들면 계속 비행기 타시겠네, 딸들이 해외여행시켜 주잖아요.(요즘은 업그레이드되어 딸들이 '우주여행시켜주니 로켓 타겠네' 이런 말도 꽤 많이 듣습니다)



  셋째가 성별이 여자라는 것을 알고는 울적하던 시기에(나름 아들이길 바라긴 했던 것 같다), 어떤 말을 들어도 위로가 되지 않았는데 딱 한 마디는 큰 위로로 다가왔었다. 

"그래도 아들 셋 아닌 게 어디예요"


  그래, 아들 셋이 아닌 게 어디야. 휴. 지금 돌이켜 보면 그런 말을 하는 사람도, 그 말에 나름 위로랍시고 힘을 받은 나도 다들 마음 한 켠이 찌그러진 상태였지만 어쨌든 그 때는 그게 위로처럼 들리기는 했었다. 그래야 딸만 셋을 낳은 나의 팔자가 조금은 펴지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21세기에 살면서 말이다) 






  아이 셋 부모들이 어디서든 듣게 되는 말이 있다. 딸둘아들하나는 금메달, 딸 셋은 은메달, 아들 셋은 목매달. 나는 은메달은 땄으니 그나마 다행인 건가, 아들 셋 엄마들은 어떡해.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비극적인 대화도 나눈 적이 있다.

  "언니 그 말 들어 봤어요. 딸들 엄마들, 아들 엄마들 어떻게 죽는지."

  "아니."

  "딸들 엄마들은 명품 가방 메고 딸들 집 싱크대 앞에서 죽는대요."

  "아놔.. 나 불쌍해서 어떡해... 아들 엄마들은?"

  "아들 엄마들은.. 객사한대요."

  일동 침묵. 이 이야기를 한 친구는 아들 둘에 아들 셋째를 임신 중이었다. 


  아들, 아들 하며 키워보니 막상 도움은 안 되고 오히려 딸들이 더 정감 있게 부모를 배려해 주고 보살펴 주더라는 경험에서 우러난 말들일 것이다. 나 역시 딸 셋 엄마로서 이런 이야기를 들으며 웃고 한편으론 다행으로 여기곤 했다. 그러고 보니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 때가 많아지고 있기는 하다. 정이 많은 첫째는 둘째와 셋째를 모두 아우르며 잘 놀아 주고, '내갈길 내가 간다' 혼자 노는 성향의 둘째도, 싹싹한 언니 덕에 어울리며 잘 논다. 막내는 그런 언니들을 보고 자라서 으레 같이 노는 것으로 알고 있다. 셋이 동그랗게 앉아 한 자리에서 사부작사부작 그림을 그린다거나 인형놀이 또는 어린이집 놀이(한 명은 선생님, 막내는 아가 - 이건 고정이다, 한 명은 엄마 역할)를 하며 두세 시간 거뜬히 논다. 물론 뛰어다니고(1층집이다) 침대에서 점프하기도 하지만 그 정도가 심하지는 않다. 이게 딸 셋 키우는 엄마의 마음이구나, 싶은 때가 점점 많아지고 뿌듯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아들을 키우는 엄마 또한 나의 마음과 같다. 이 무슨 말인가 하면, 결국 애가 둘이고 셋이고 딸이고 아들이고 자식을 키우는 엄마의 마음은 거기서 거기라는 말이다. 우리 동네는 특성상 3자녀 이상 다자녀 가정이 많다. 수입이 안정적인 공무원(군인) 집단이고, 힘이 넘치는(?!) 특전사 아파트 단지에서 살고 있다. 아주 조금 거짓말 보태서 한 집 건너 한 집이 아이가 셋이다. 애셋 키우느라 힘드시죠, 는 적어도 우리 아파트 단지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넷 정도 되어야 조금 주목받는 정도이다. 

  아들만 셋을 키우는 한 엄마를 알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육아휴직 중인 군인이었다. 어쩐지, 여군이니 저렇게 힘이 넘치지. 여군이라는 강한 이미지의 타이틀을 벗어내지 못한 어느 날 그 친구가 해준 말이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언니, 내가 원래 이런 성격이 아니었어요. 아들놈 셋을 키우다가 목소리도 이렇게 커지고 아주 그냥 성격 다 버렸다니까요!"

  그러나 내가 느끼는 그녀는, 성격을 버린 것이 아니다. 언제 만나도 늘 웃는 얼굴이고, 모든 아이들과 엄마들에게 씩씩하게 먼저 인사한다. 아파트 단지에서 막내를 자전거 뒤에 태우고 노래를 부르며 다닌다. 효건아, 엄마랑 자전거 타니 기분 좋지? 엄마도 너무 행복해, 사랑한다 아들, 같은 말을 자주 해준다. 그런 그녀를 보노라면 나도 덩달아 행복해지는 기분이다. 아들 셋을 키워 성격을 버린 게 아니라, 아들들과 함께 하면서 거기서 비롯된 행복을 얻어 더 큰 행복으로 키우는 것처럼 보였다.

  

  아들이고 딸이고,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아들이어도 '엄마~'하며 애교 가득한 아들이 있고, 딸이어도 아들보다 더 무뚝뚝한 딸이 있기 마련이다. 중요한 건, 자식들은 그 자리에서 한결같이 부모를 바라보며 자라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자식들을 대하는 마음의 태도와 사랑의 모양을 바로잡아나가는 것, 이 것을 부모가 어떻게 키워나갈지 고민하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 이것이 우리 아들과 딸들의 올바르게 키우는 진정한 마음가짐임을 부모 나이 7살이 되면서 어렴풋이 알아가고 있다. 






  아들이라면 이 정도로 신경 쓰진 않아도 될 텐데, 하는 것들도 있긴 하다. 무릎을 다쳐 오면 '치마 입으면 흉할 텐데' 생각부터 들고, 얼굴에 상처라도 나면 한 시간 간격으로 연고를 발라주며 신경을 쓰게 된다. 아들이었어도 이렇게까지 했을까 싶어지는 거다. 반면 내가 딸만 키우는 엄마이기에 나는 상상도 하지 못할, 아들만 키우는 엄마들의 수고로움과 고충도 분명 있을 것이다. 어쩌면 말 못 할 그들의 수고와 고민이 훨씬 더 많을 것이다.(어느 다큐에서 본 것 같다, 아들들은 일단 소리를 질러야 대화의 시작이 가능하다고.) 역시, 문제는 아들딸이 아니다. 나의 자식을 '부모'의 욕심에서 떨어져 자식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키워내는 것, 인류의 가장 위대한 과업을 잘 해내야 하는 부모의 숙명을 받아들여야 하는 마음, 이 것이 지금의 내게 가장 큰 문제이자 숙제이다. 

  

  이래저래 아이들을 키운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리고 셋을 키운다는 것은 그 수고로움과 고충이 조금 더 많다는 뜻이다. 지금의 수고가 나중의 보람으로 그대로만 전환되어도 다행일 것만 같다. 



  딸들, 아프지 말고 다치지 말고 잘 커줘, 그게 효도야.


'언제 클래 코찔찔이들' 싶으면서, '천천히 커줘' 하게 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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