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7, 187, 600. 우리 집 이사와 관련된 숫자들입니다. 순전히 짐만 나르는 이사만 5번, 총 7개월에 걸친, 187일간의 이사 일정, 그리고 이사만 왕복 총 600km에 달하는 거리. 엘리베이터는 생각도 못하는 4층 빌라와 5층 아파트를 쉴 새 없이 오르락내리락했던 겨울날들. 군인과 결혼하고 난 뒤, 배 속 아이와 함께했던 제 첫 이사였습니다.
남양주 진접 75사단에서 근무하던 남편이 광명 소하 52사단으로 간 이유로, 저 혼자 생활하기 시작한 첫날은 12월 8일. 길고 길었던 입덧이 장염으로 확진되어 일주일을 입원하고 집에 오던 순간부터 남편은 광명에서, 저는 진접에서 생활하기로 한 것입니다. 전세계약기간이 6개월 남은 진접 빌라의 후속 입주자가 나타날 때까지. 결혼하면서 제 개인 사정으로 관사에서 지낼 수 없어 부대 근처 11평짜리 풀빌라에서 시작했습니다. 워낙 이사가 잦은 원룸촌이라 곧 입주자가 나타날 것이라 생각한 우리는, 그것이 출산 후에야 가능하게 될 것임을 그때는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12월은 ‘기다림’의 연속이었습니다. 주중은 저 혼자 집안에서 지냈습니다. 두 번의 유산 후 소중하게 얻은 아이라 함부로 나갈 수도 없었습니다. 목요일만 돼도 하루만 더 지나면 남편을 기다린다는 기대에 가슴이 뛰었습니다. 금요일 저녁, 광명에서 서울로 들어가는 길의 지독한 교통체증을 뚫고 세 시간 만에 온 남편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식어버린 저녁식사와 임신 4개월 차 들어선 마누라의 짜증이었습니다. 주말은 데이트도, 지인과의 만남도 불가능했습니다. ‘집 보러’ 오는 이들을 하염없이 기다렸습니다. 부동산에서 걸려오는 전화를, 집 보러 온다고 했다가 취소하는 이들의 전화를 받고 끊기를 반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겨울이라 집 보러 다니는 이들도 적었습니다. 집을 보고 간 이들의 연락은 없었습니다. 그렇게 일요일 저녁이 되면, 일주일 후에 볼 남편을 보내고 차가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다가 울곤 했습니다.
1월과 2월은 ‘함께 시작’했습니다. 이사가 길어질 것 같은 불안감(?!)에 광명으로 무작정 왔습니다. 배가 나오기 시작한 중기 임산부에게 5층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함께 하겠단 일념으로, 남양주와 광명의 두 집 살림이 시작되었습니다.
광명 무궁화아파트. 두 집 살림 중 두번째 집.
첫날밤, 남편은 군용 침낭을 보여주며 여기서 잘 수 있다고 했습니다. 1월의 추위를, 그렇게 한 침낭 안에서 불편하게 이겨냈습니다. 다음날, 보일러비가 많이 나온다는 앞집의 충고에 저는 노트북 하나 들고 화살회관 내 카페에서 하루 종일 지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휑한 집안에 혼자 추위를 느끼며 있기는 싫었기 때문입니다. 식사도 회관의 된장찌개로 해결했습니다. 회관의 따스함과 복지병들의 미소가 낯선 곳의 서먹함을 잊게 해 주었습니다. 저녁식사, 진접 집에서 가져온 냄비에 라면을 끓여먹었습니다. 나무젓가락과 플라스틱 수저로 햇반을 말아먹었습니다. 이때부터 주말 이사가 시작되었던 것 같습니다. 남양주와 광명을 오고 가며 하나씩 하나씩 살림살이를 챙겨 오던 길고 긴 여정이. 주말 역시 마냥 쉴 수는 없었습니다. 바로 이사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에, 버리기는 아까운 가구들을 하나씩 중고로 팔아버려 진접 집도 휑하긴 마찬가지였습니다. 식탁이 없어 바닥에서 밥을 먹었습니다. 집 보고 맘에 든다고 한 이들은 연락이 없기 일쑤였습니다. 토요일 저녁, 텔레비전을 보고 따뜻한 이불을 덮고 함께 자는 것이 유일한 휴식이자 행복이었습니다. 일요일은 아침 일찍부터 이삿짐을 쌌습니다. 그릇과 식기와 옷가지들을 박스에 담으면, 당장 필요한 것뿐인데도 세네 박스는 기본이었습니다. 남양주 4층 빌라에서 박스들을 들고 내려오면, 광명에서는 그것들을 들고 5층 계단을 올라야 했습니다. 배가 부른 마누라는 집에서 정리하고, 남편은 박스 개수만큼 계단을 오르내렸습니다.
2월 말부터는 본격적으로 이삿짐을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점점 몸이 무거워져 더 이상은 두 집 살림을 이어나갈 수 없었기 때문에, 무리해서 셀프 이사를 했습니다. 옷 박스만 5-6박스가 매번 나왔고, 식기와 냉장고 음식들은 조금만 담아도 무게가 엄청났습니다. 남편은 정수기와 텔레비전 해체 및 설치의 달인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매주말마다 남양주 집은 조금씩 비어갔고, 광명 집은 하나씩 채워졌습니다. 배가 나온 임신 7개월 차 마누라 무거운 것 들면 안 된다고 옷걸이 몇 개 쥐어주고는, 박스 12개를 들고 혼자 5층을 오르내리던 남편이 밤에 잠을 자면서 끙끙 앓았습니다. 7 공수와 9 공수, 사령부에서의 특전사 훈련들도 아무렇지 않게 이겨낸 남편이 그렇게 앓는 것은 결혼 후 처음 보았습니다. 다음날 일요일은 당직, 또는 부대 내 동료들의 결혼식이나 돌잔치 참석. 그렇게 쉬는 날 없이 주말을 몇 번 보낸 3월 초, 친정동생을 불렀습니다. SUV 차량을 가득가득 채운 박스들을 보고는 놀란 동생은 5번을 오르내리고는 기진맥진했고, 매형은 화살회관의 삼겹살과 항정살로 고마움을 표했습니다.
3월 말까지 남은 이삿짐이라곤, 크고 무거운 옷장과 책이 가득한 책장, 그리고 돌아가신 아버님께서 남겨주신 2인용 책상뿐이었습니다. 임신 9개월 차에 들어선 저도 더 이상은 무리였고, 나머지는 이사가 확정되면 옮겨도 될 것들이었기에 우리의 셀프 이사는 잠시 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는 본격적으로 출산준비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배냇저고리와 젖병을 준비하고, 옷들과 가제손수건을 빨아 4월의 따스한 봄 햇살에 말리면서 그동안 미뤄두었던 태교를 그때서야 한다는 생각에 배 속 아기에게 많이 미안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곧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주말마다 남편과 함께 한 드라이브, 계단을 오르내리며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산모 운동, 집을 정리하고 치우고 꾸미는 즐거움, 무엇보다 군인가족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배 속부터 배우게 된 아이에게 누구보다 특별한 태교를 해준 것이라고.
예정일을 하루 지난 5월 말 어느 새벽, 이사 태교로 자란 유안이가 건강하게 태어났습니다. 완벽하진 않지만, 그래도 우리 아이가 함께 지낼 여건은 충분히 갖추어진 집으로 유안이가 올 때까지 이사는 마무리되지 못했습니다. 전세계약기간이 지났는데도 입주자는 나타나지 않았고, 집주인의 자금 처리는 깔끔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사단의 법무참모님께 도움을 청하였고, 쉬는 날도 변호사를 자처하며 집주인과의 날 선 기싸움을 대신해 주었습니다. 조리원 생활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다음날, 5번째 마지막 이삿짐이 도착했습니다. 태어난 지 15일 된 아기는 어머님 손에 맡겨진 채, 아이를 낳은 지 15일 된 초보 엄마는 이삿짐을 정리해야 했습니다. 남은 이삿짐이 거의 없다고 생각했는데 사다리차는 연신 짐을 올려댔습니다. 1층에서 생활하시는 부대 동료 분도 짐 나르는 것을 도와주러 오셨습니다. 결혼하고 3년 만에 첫 이사를 하는 제게, 그분은 해맑게 웃는 얼굴로 매우 인상적인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제가 결혼한 지 6년이 되었는데요, 이사를 6번을 했어요.”
6월 13일 오후, 4시간여의 짐 정리와 청소로 장장 7개월 여정의 긴 이사가 끝이 났습니다. 남편도, 저도, 그리고 아기도 처음 해보는 지난한 이사. 돌이켜 보면, ‘불편한 것 조금만 참으면 이번 주엔 이사가 해결될 것이다’ 이렇게 매주 희망 아닌 희망, 위로 아닌 위로로 보낸 시간이 7개월을 가득 채웠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합니다. 처음 영관급 아파트에 들어서면서 느낀 막연함과 황량함, 알 수 없는 이질감을 매주 조금씩 채워나가고 지워나가면서, 저 역시 조금씩 진짜 군인가족이 되어 감을 느꼈습니다. 이사하기 전 75사단 근처의 원룸촌에서는 들을 수 없었던 기상 음악과 국군 도수체조 음악, 점호 알림과 취침 알림 소리를 고스란히 들으며 배 속 유안이는 그렇게 군인가족으로 태어났습니다. 5층 힘들다 투덜거렸지만, 사계절을 고스란히 알려주는 아름다운 창밖 풍경 앞에서는 감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출산 후 100일 동안 육아의 고단함을 풀어준 것은, 무궁화 아파트 놀이터에서 함께 뛰어노는 군인가족 자제들의 웃음소리였습니다.
이사 정리가 다 된 집에서 아빠와 딸
아기를 일찍 재운 7월의 어느 밤, 저의 한 마디에 남편이 큰 소리로 웃는 바람에 아기가 깨 울어서 다시 재우느라 고생했던 기억으로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남편님, 이제부터 무조건 군인아파트에서 살 거예요. 다시는 이렇게 이사 안 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