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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샤 Sep 15. 2020

'라푼젤'에서 달팽이까지

아이들을 키우는 건, 내가 아니라 시간이었다

프롤로그.

아이들이 처음 태어났을 때의 그 마음 

'다치지 말고 아프지만 말고 잘 자라나기만 해 주렴', 

이 마음 잊지 않으려 애쓰며 오늘도 대충 키운다.



주말 아침은 거의 대부분 '라푼젤'로 시작한다. '모아나'를 한창 보더니 '라푼젤'로 넘어온 지 꽤 되었는데 그래도 재밌단다. 보면서 대충 시리얼 우유 말아 먹인다. 아이들은 다 보고 좀 들뛰고, 둘이 싸우면 몇 번의 샤우팅이 발사되고, 그림 좀 그리다가 화장실 좀 왔다 갔다 하고 점심시간 즈음이 되면 엄마가 대충 끓여 준 짜파게티를 먹는다. 엄마는 아이들이 시끄럽게 놀면 장난감 방으로 쫓아내고, 그러다 누구 하나가 울면 둘 다 혼낸다. 한 명은 티브이나 보라고 애니메이션 채널 대충 틀어 준다. 아이들이 소꿉놀이에 뭉치면 엄마는 티브이를 끄고, 둘 중 하나 셋째를 건드릴라 치면 다시 샤우팅이 시작된다. 그러다 저녁 시간이 되면 대충 배달시켜 먹거나 김에 밥을 말아먹는다. 물론, 아이들은 거의 남기지 않고 맛있다며 먹는다. 중간중간 요구르트나 젤리, 아이스크림 같은 간식을 먹으며 한순간씩은 조용히 지낸다. 저녁에 엄마는 아이들을 씻겨 나오면 달팽이나 문어같이 좋아하는 유튜브 채널을 틀어주고, 자야 할 시간 되면 가차 없이 꺼버리고는 '자!' 한 마디로 아이들을 눕힌다. 

몇 번 더 보면 200번째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라푼젤. 재밌어서 볼만 하다. 


코로나 이후 거의 대부분의 주말을 이렇게 보낸다. 가끔 주변에 산책을 나가거나 바로 앞에 나가서 킥보드를 태우긴 하지만, 정말 가끔이다. 그야말로 '막' 키운다. 아무리 보아도 교육에 신경을 쓴다거나 부지런을 떨며 아이들을 돌보는 지점을 찾을 수가 없다. 책 읽어줄 시간에 엄마는 폰을 보거나 폼롤러 위에서 뒹굴거린다. 책 읽어달라고 가져오면 '한 번 만이야' 미리 예고하고 정말 한 번만 읽어준다.(두 번 읽어주면 자꾸 더 읽어달라 한다.) 웬만한 과일 간식도 없다. 간식의 대부분은 요구르트와 과자, 아이스크림이다. 

대화의 절반 이상은 샤우팅에 명령형이다. 안 돼, 하지 마, 저리 가, 하지 마라고 했다, 그만해, 던지지 마, 치워, 또 하면 엄마 진짜 화내. 6살 첫째는 따르려 노력하지만, 발달이 늦어 3살 같은 4살 둘째는 '싫어, 아니야'와 울음으로 모든 대화를 마무리짓는다. 


하아.

쓰다 보니 정말 세상에 또 이런 막장엄마가 어디 있을까 싶다. 정말이지 육아서와 육아 전문가들이 하지 말라는 육아만 골라하고 있다. 이런 엄마를 만난 우리 아이들이 마냥 안쓰럽기만 하다. 이런 엄마 덕분에 첫째는 아직도 한글을 못 떼었고, 둘째는 배변이 잘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그 고생의 결과는 다 엄마인 내가 쓸어 담아야 한다. 악순환의 시작과 끝이 엄마인 셈이다. 


그런데, 이렇게 엉망으로 키워도 아이들은 큰다.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강하고 살림은 바닥을 치는 엄마를 만난 덕에 우리 아이들은 관심 가득한 육아를 경험하지 못하고 있지만 그래도 잘 크고 있다. 건강하고 착하다. 아파도 금방 낫고 인사성도 밝다. 마음이 여리고 상대방을 먼저 배려한다. 늘 존댓말을 하고 '사랑해'와 '고마워'를 입에 달고 산다. 아이다움이 가득하고 좋은 것만 기억하려 노력한다. 

이상한 일이다. 나는 그렇게 잘 키우지 못했는데, 아이들은 어째 잘만 큰 것 같다. 나에게 아이들은 고됨의 대상, 우울의 원인이었고 그것을 굳이 숨기지 않았는데, 아이들은 밝게 큰다. 물론 아이들에게도 그들 나름의 인생의 굴곡과 어려움이 있겠지만, 내가 염려하는 만큼은 아니다. (아이를 낳기 전에는 나처럼 아이를 키우면 아이들은 모두 '부정적 성향, 발달 장애, 정서적 결핍, 문제아 등등' 이런 류의 단어들이 붙게 될 줄만 알았다.) 


그렇다. 바로 이 것이 꽝 육아, 대충 육아, 막장 육아의 표본인 내가 육아에 관한 기록의 욕구를 드러내고자 하는 이유이다. 엄마의 '헌신'과 '희생'으로도 아이들은 잘 자라나겠지만, 사실 그렇지 않고도 아이들은 잘 자랄 수 있다는 사실을 조금씩 깨닫고 있다. 엄마의 헌신과 희생(이라 쓰고 부담스러운 관심이라 읽고 싶다)이 들어갈 자리에, 바닥이 단단한 자존감과 지혜가 가득했으면 좋겠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에 대해 말했을 때 그저 '그렇구나' 정도로만 대응해 주고, 그 생각과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기만 하는 엄마이고 싶다. 한 발짝, 가끔은 두 발짝보다 더 멀리서 떨어져 있다가 정말 필요한 때에 바로 옆에서 손 잡아주는 엄마이고 싶다. 큰 기대와 바람 없이, 아이를 낳은 순간 가졌던 마음-크게 아프지 말고 크게 다치지 말고 건강하게만 자라 다오-만 부여잡고 아이들을 바라보고 싶다. 내 육아에서 애쓰는 것은 이런 마음 잃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뿐이다. 어쩌면 아이들을 키우는 건 시간과 아이들 스스로이고 부모는 조력자뿐일지도 모른다. 이런 육아가 그렇게 나쁜 것도 아니라는 것을, 훗날 언젠가 일종의 증거로 남기고 싶은 마음이다. 그래서 당장 지금이라도 학습지를 시키라고 부추기는 엄마들에게 조심히 내밀어보고 싶은 마음이다.  


내 어설프고 게으른 육아에 대한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고 나서야 육아 이야기를 모을 수 있을 것만 같다. 누군가도 어쩌면 이런 변명을 필요로 할지도 모른다는 이기적인 생각을 바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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