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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샤 Sep 09. 2021

모든 인생의 역사서

< 작당모의(作黨謨議) 6차 문제(文題) : 달력 >

  막내의 두 번째 생일을 치렀다. 2년 전일이지만, 끔찍할 정도로 정확히 기억한다. 날짜를 잘 맞춰 태어나야 한다는 어른의 말씀에 유도 분만하러 갔다가 못 하고 온 그날 밤,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진통에 밤바람을 맞으며 병원을 향했다. 자연분만으로 겪을 수 있는 모든 상황을 다 치른 난산이었다. 목요일 밤과 금요일 새벽 사선(死線)을 넘었던 순간, 병원의 피비린내와 사시나무 떨 듯 내 온몸을 떨게 한 오한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셋째를 낳은 아침은 금요일, 둘째는 토요일, 첫째는 수요일. 내 아이들은 모두 밤을 새워 태어났다. 그래서 더 잊을 수 없다, 그 시간과 요일들. 아이를 낳고 맞이한 아침의 입원실에는 모두 탁상달력이 있었다. 멍한 눈으로 탁상달력을 꽤 오래 바라본 기억이 있다. 내 인생의 이 시점에 아이를 낳았구나, 달력에 새기고 싶은 순간들이었다.


  그렇다면, 나의 요일은. 내 엄마가 나를 낳은 그 요일은. 시간은 대충 알지만, 요일은 알지 못한다. 내 엄마가 일주일의 어느 요일의 밤과 새벽을 지나 태양을 낳듯 나를 낳았는지 궁금해졌다. 엄마에게 물어보니 단칼에 '몰라'라고 말한다. 그럴만하다. 오래된 일이고, 엄마는 그저 혼자 아이를 낳았을 뿐이다. 시계가 있었다 한들 시계를 볼 상황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이의 손가락, 발가락이 열 개인지 두 눈으로 직접 보고 건강하게 우는지가 중요했지, 시간이나 요일은 내 젊은 엄마에겐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세상이 좋아진 덕분에 초록창에 내가 태어난 해의 '달력'이라고 글자를 채우고 버튼을 눌렀다. 40년의 세월을 관통하는 시간은 1초도 되지 않았다. 그 시절의 날짜들이 눈앞에 나타난다. 목요일. 그러니까 내 엄마는 수요일 저녁 또는 밤부터 배가 아파 나를 낳았다. 나는 인류 역사의 어느 목요일에 이 세상에 그 모양을 드러냈구나, 엄마는 스물넷의 어느 목요일 나로 인해 엄마가 되었구나, 그 생이 4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구나. 세상이 좋아진 덕분에, 나는 그렇게 짧은 시간에 내 엄마가 '엄마'가 된 순간과 내가 세상에 인간의 형상으로 존재하게 된 날의 요일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갓 태어난 나는, 나의 아이들처럼 빨간 몸이었겠지. 얼굴도 손도 발도 퉁퉁 불은 못생긴 몸이었겠지. 그렇게 태어나 10대를 거치고 20대를 지나 지금의 30대, 그 끝에 와있는 거겠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마치 인생의 수면 아래 조용히 잠들어있던 의문이 물처럼 검은 눈을 떴다. 인간 본연에 대한, 잔잔하지만 무거운 질문. 20대의 나를, 산 속으로 이끌었던 그 질문.

  40여 년 전의 나, 30년 전의 나, 20년 전의 나, 10년 전의 나, 모두 '동일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 시절의 세포들은 일찌감치 죽고 새로 태어났을 테고, 손톱도 머리카락도 모두 그때와 다른 조직과 물성을 지니고 있다. 손톱은 그 시절만큼 강하지 않고, 머리카락은 점점 가늘어지고 있다. 키, 몸무게, 얼굴 생김, 피부의 탄성, 뼈의 조직성분 그 어느 것 하나 내 과거의 단계 속 나와 같은 것이 없다.

  신체뿐이던가. 성격은 어떠한가. 내향적인 면은 여전하지만 아줌마 특유의 외향적인 성향을 갖게 되었고, 열정이 그대로라면 열정이 향하는 대상은 바뀌게 되었다. 좋아하는 것, 취미, 삶의 목표, 관심가는 스포츠와 연예인, 사상과 세계관, 일상을 채우는 요소들 그 무엇 하나 30년 전, 20년 전, 10년 전과 같은 것이 단 하나도 없다. 아니, 10년 전까지 갈 것도 없다. 5년 전, 작년 이 맘 때와도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것이 어쩜 이리도 없을까 싶은 것이다. 이사를 왔으니 삶의 터전까지, 창 밖의 풍경 하나하나까지, 나를 둘러싼 그래서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 모든 것이 변한 것이다. 과거의 나는, 과거의 상황 속에 살던 나는 지금의 나와 꽤나 다른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과거의 나와 다른 인간이란 말인가. 아니다. 나는 '나'이다. 태어난 순간부터 10대, 20대, 30대의 나 모두 명백히 '나'라고 할 수 있다. 그 모든 시간을 거쳐온 존재가, 내가 아니면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렇다면 지금 나라고 불릴 수 있는, 이 존재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400여 년 전, 나의 이런 질문을 마치 예상이라도 한 듯이 먼 이국의 땅 '데카르트'라는 이가 미리 의심을 해 주었다. 모든 것을 끝까지 철저하게 의심해 보아도 결국 의심을 하고 있는 그 존재만큼은 의심할 수 없이 명백한 사실이었다는 말을 남겨 주었다. 마흔을 앞둔 가을날, 그를 소환하여 새삼 감사하게 될 줄이야, 10년 전 아니 그저께의 나도 모를 일이었다. 인생이란.

  그렇다, 그것은 명백한 진리이다. 과거의 내 모든 사건들, 모습들이 진정 나라고 말할 수 있을지 의심한다 해도 의심하는 '나'만큼은 여기 이렇게 실체로 존재한다. 그럼에도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적잖이 다른 인간이기도 한 것이다. 먹은 것이 다르기에 몸을 형성하는 단백질의 형태도 다를 것이고, 당장 어젯밤 했던 생각들이 오늘 아침 맥없이 사라진 것을 떠올려 보면 '나'라는 존재의 실존을 가볍게 또는 무겁게 의심해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진짜, 나, 누구지? 엄마 아빠의 딸, 동생의 누나, 남편의 아내, 세 딸의 엄마, 경기도민, 브런치 작가 김진샤, 이 모든 총합이 나? 저 중에 하나라도 의미를 잃으면 내가 아닌 건가? 나를 구성하고 있는 것들이 나인가? 내 머리, 몸, 팔과 다리, 심장이 나인가? 아, 여기에 영혼이 들어가야 하는 건가? 영혼, 영혼이라는 게 있기는 해? 막 유체 이탈하고 그러는 거야? 유체 이탈하고 나면 나는 아닌 거야? 그러면 내 몸이 나인 건가, 유체 이탈한 그 - 보이지도 않는 - 주체가 나인 건가?  

  실체적 자아, 객관적 자아, 실존재-현존재-로서의 자아, 진정한 자아로서의 나, 까지 생각하다가 떠오른 이야기가 있다. 20대 인생의 뜨거웠던 어느 날 들었던 흥미로운 이야기, '촛불'의 비유.

  초저녁에 불을 밝힌 촛불이 있다고 하자. 한밤에 타고 있는 그 '촛불'은 초저녁의 촛불과 같은 불일까? 같은 불이라고? 양초의 길이가 다를 텐데? 다른 불이라고 답하는 이에게 묻는다. 같은 심지를 태워 온 그 불이 정말 다른 불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시간이 흘러 새벽이 되었다. 새벽을 밝히는 그 불은, 초저녁의 불과 같은 불일까, 다른 불일까. 초저녁과 한밤과 새벽의 그 불들이 모두 같은 불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양초가 다 타들어갈 즈음 그 불을 다른 양초로 옮겼다. 그 불은, 이전의 양초의 불과 같은 불일까 다른 불일까.

  불가(佛家)에서 '자아'의 개념을 설명할 때 이 비유를 든다. '불'이 타고 있는 시점의 상태는 각기 다른 것이나, 촛불은 존재로서 지속된다. 그러나 고체 연료인 초와 열과 산소라는 조건이 만나 불로 타오른 것은, 조건이 사라지면 바로 사라지게 되는 '형상'에 지나지 않는다.* 이 즈음에서 나는 '내 존재가 그저 촛불인 것이란 말인가, 나를 이루는 조건들이 사라지면 나 역시도 그렇게 사라지는 것이란 말인가'라며 난감해했던 적이 있다. 세상살이의 허무와 존재의 공허에 깊이 빠지기도 했다. '나로서 살아감'의 의미가 이렇게나 허무한데, 도대체 어떻게 생의 의미를 찾아야 할지 까마득했던 적이 있었다. 진짜 나를 찾아야만 했다. 월급받는 삶 이전에 풀어야 하는 숙제 중 하나였다.

  그러나, 우리가 잊고 있는 것이 있다. 우리가 촛불에만 집중하고 집착하는 동안, 촛불에서만 의미를 찾으려 하는 동안 그 중심의 것을 보지 못했다. 촛불 뒤에 남은 '심지'는 허리는 굽힐지언정 그대로 '존재'했다. 초는 탔어도, 촛불은 실체가 없어도, 심지만큼은 남아 그 모든 현장에 대해 증언하고 있지 않은가. 밤을 밝혀 태운 초와 불에 대해 심지만큼은 모든 과정을 남기고 있지 않은가. 타서 검어졌을지라도 그는 여실하게 존재한다.

  나는 '심지'였던 것이다. 과거의 모든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지금에 이른 나는 심지이지, 순간순간 조건에 따라 흔들리고 커졌다 작아졌다를 반복하는 촛불이 아니었다.  내 인생으로서의 주체로서 나는, 양초의 심지였다. 내 인생의 모든 기록은 지구상에 몸을 드러내 앵앵 울었던 그 목요일부터 지속되어 왔다. 과거의 나는 심지로 남아 지금의 내 안에 한 줄기의 정체성을 갖고 남아있는 것이다.


  내 인생의 기록이 쌓여 있는, 물성을 지닌 또 다른 존재가 있다. 바로 달력이다. 1980대 초 어느 겨울의 목요일, 그날의 달력부터 내 생은 달력의 모든 날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허투루 하지 않고 지나왔다. 어느 연월의 어느 요일 나는 몸이 타는 듯이 아팠을 테고 어느 해의 어느 며칠은 스스로 자처한 죽음을 가까이 두었을 것이다. 어느 봄날의 어느 토요일 결혼으로 새로운 삶을 도모했고 그렇게 어느 봄과 여름과 가을의 금요일, 토요일, 수요일을 지나 세 엄마가 되었다. 단 하루도 달력의 시간들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달력은 그렇게 하루도 빼지 않고 내 인생을 고스란히 챙겨 왔다.     

  나의 세 아이들도 그렇다. 막내는 2년 전부터 지금까지 여러 모습을 보여주며 내 곁에 있었다. 분명히 2년 전 그 날과 오늘은 전혀 다른 인간이다. 아이들은 얼굴이 자주 변한다. 어제와 오늘의 얼굴이 달랐다. 첫째 또한, 6년 전의 첫째와 지금의 첫째가 완전히 '동일한' 인간이라고는 할 수 없다. 살과 피와 키와 성격이 모두 다르다. 그러나 내 딸로서, 2015년의 늦은 봄부터 시작된 인생의 심지를 지닌 존재라는 면에서 '동일한' 인간이다. 2017년 가을부터 시작된 둘째의 인생 역시 그러하다. 그날을 기점(起點)으로 우리 모두는 자신의 생을 자신의 의식 안에, 자신만의 인생 달력 안에 기록하고 있다. 달력은 그렇게 각자의 생을 담고서 우리 곁에서 침묵한 채 무형의 문자로 기록하는 '역사서'인 것이다.


  2021년 9월의 달력을 멍하니 바라보다 글을 쓰다 하다가, 인스턴트 커피를 손에 쥐고 창가에 섰다. 과거의 모든 순간을 차곡차곡 쌓아 지금 창 밖을 보는 존재는 '9월 9일'이라는 달력의 날을 밟고 서 있다. 앞으로 달력 안에 펼쳐질 모든 날도 빠짐없이 밟으며 내 안에 쌓아나갈 것이다. 그렇게 성장하고 나아가고 익어갈 것이다. 나의 나날을 '달력'이라는 역사서에 쌓아갈 것이다.

  훗날 주름이 많아진 손으로 2021년 9월 9일이라는, '달력'이라는 이름의 역사서를 뒤져보는 날이 온다면 그 존재의 눈빛은 말갰으면 좋겠다. 심지를 촛불로 태워온 나날들이 더없이 밝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의 나날을 채워가는 존재, '나'로서 당당하게 서 있었으면 하고 바란다.


  



내 오늘의 기록 그리고, 우리 모두의 역사서




* 초기 불교 경전 '밀린다왕문경'의 일부입니다. '자아(atman)'과 '윤회'에 대한 설명을 위한 비유이나, 제 나름의 생각으로 해석하여 썼습니다. 비유의 내용 자체는 동일지만 설명과 접근의 방식이 달랐음을 밝힙니다.  

  



4인 4색, 결 다른 사람들이 글쓰기 위해 모였습니다.

제대로 한번 써보자는 모의이며, 함께 생각을 나누며 어울려 살자는 시도입니다.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매거진에 글로 작당 모의할 예정이니 지켜봐 주시길 바랍니다.

자, 그럼 수작(手作) 들어갑니다~, 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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