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했다. 최선을 다했는데, 그래서 더 망했다. 이제 남은 퀴즈는 하나 뿐이다. 이 문제를 내면 완벽하게 망할 것이다. 등에서 식은 땀이 흐른다. 가을 바람이 시원해도 흐르는 식은땀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젠장. 지겨워하는 저 표정까지 너무나도 사랑스럽다.
“이제 끝이에요? 더 없어요?”
“......”
“설마 뭐.. 연인데 걸어 다니는 연 이런 건 아니겠지.”
“.......”
뛰쳐 나가버리고 싶지만 꾹 참는다. 그녀에게 그렇게 찌질한 모습으로 마지막을 남기고 싶진 않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마지막까지 해보자.
“비슷합니다. 연은 연인데 세상에서 가장 예쁜 연.”
“와, 생각보다 훨씬 유치하네요. 저 대답합니다. 홍.주.연. 정답인가요? 하하하. 아니 어쩜 이리도 속이 훤히 보여요. 연애하면 꽉 잡힐 스타일인데. 너무 쉬워도 안 되요.”
규성이가 사진을 보여줬을 때부터 오늘까지 제대로 잠을 잘 수 없었다. 연애 따위 관심도 없는 나를 단박에 바꾼 그녀였다. 어떻게든 잘 되어야 했다. 모솔인 티 나지 않게, 과하지 않으면서 부족하지 않은 센스를 탑재한 남자답게 보여야 했다. 재미있는 사람이 이상형이라는 그녀라기에, 긴장하면 말이 안 나오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야심차게 준비한 것은 ‘넌센스 퀴즈’였다. 20문제를 달달 외웠다. 여유로운 표정과 조금은 코믹한 말투를 잘 믹스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꿈 속에서도 넌센스 퀴즈를 점검했다. 이렇게 공부했으면 지난 학기 올에이뿔인데. 상관없다. 이번 학기 그녀만 건지면 내 대학1년은 성공한 셈이다.
그러나 그녀는, 내가 지금까지 만난 그 누구와 비교불가한 수준의 넌센스 퀴즈 최강자였다. 내가 준비한 모든 문제를 맞추는 데 문제되는 것은 없었다. 고작 그것 밖에 되지 않느냐는 눈빛이었다. 문제를 내면 낼수록 노랫말 하나가 내 가슴을 깊이 파고 들었다.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 이렇게 보내기는 너무 싫은데. 그녀에게 잘 보이려 준비한 넌센스 퀴즈들이 그녀와 나를 멀어지게 하다니. 그야말로 넌센스다.
“그럼 이제 제가 문제 좀 내도 될까요?”
“그렇게 하세요.”
“맞히기 어렵지 않으실 거에요.”
그녀가 웃는다. 그와중에 귀엽다. 젠장.
“돌은 돌인데 말하는 돌은?”
“......”
“돌은 돌인데 재미없는 돌은?”
“......”
귀까지 빨개지고 있다. 분명 차가운 커피를 먹었는데 얼굴은 더 뜨거워지고 있다. 익살스러운 그녀의 얼굴을 보고 싶은데 얼굴을 들지를 못하겠다.
“돌은 돌인데,”
“그만 하시죠. 충분히 알겠으니까요. 실례가 아니라면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저 아직 문제 안 끝났는데요. 그리고 말하는 중간에 끊는 것, 실례하신 거예요. 그러니 앉으세요.”
모르겠다. 분명 수치스러운데, 다시 앉고 보니 마냥 좋다. 이렇게 된 거, 끝까지 수치스러워 보자.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녀니까. 그녀 앞에서라면 수치심도 오래 즐기고 싶어진다.
“돌은 돌인데 귀여운 돌은?”
“......?”
“돌은 돌인데 키 크고 옷 잘 입는 돌은?”
“......??”
“나 지금 좀 부끄러운데 이제 그만 대답하시죠.”
“저도 답을 잘...”
“생각하시는 그거 답 맞아요.”
“지금 생각하는 답이 세네개 됩니다만.”
“아 진짜. 마지막이에요. 돌은 돌인데, 내가 좋아하는 돌. 됐어요?”
나도 저 정도로 빨갰을까. 괜히 창밖을 바라보는 그녀의 귓불이 뜨겁다.
“좀 유치해서 놀랐습니다. 대답 안 하고 싶은데, 그래도 확인은 해봐야 할 것 같네요. 고훈석. 정답인가요.”
동기 녀석이 자기 동아리 친구라며 사진을 보여줬을 때부터, 무조건 소개해달라고 했다. 처음으로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났다. 첫만남이 중요하다. 어색한 분위기는 안 된다. 최대한 여유롭게, 웃음이 많지만 헤퍼보이지는 않게. 그래도 혹시 모르니 ‘피식’ 웃을 수 있는 무언가를 준비했다. 인터넷에 ‘넌센스 퀴즈’라고 치고, 혹시 잊을까 잘 기억해 두었다. 정말 최후의 수단이지만, 이런 게 통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이런 유치한 넌센스 퀴즈를 좋아한다면, 나도 얼마든지 유치해져야지. 원래 좋아하면 유치해지는 거니까.
그가 나에게 선택하라고 한다. 잡으실 건가요, 잡히실 건가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그에게 다가갔다. 그도 따라 일어선다. 아까부터 잡아보고 싶었던 그의 손에 내 손을 포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