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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샤 Nov 18. 2021

세 살 돈가스의 시한부 1년

< 작당모의(作黨謨議) 10차 문제(文題) : 가장 좋아하는 음식 >

  거의 틀림없이, 음식에게도 영혼이 있을 것이다. 그 영혼이 먹는 이의 영혼에 물들어 있다가 어느 시절, 어느 장소에서 불현듯 살아나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추억의 맛'이라고 부른다. 모든 사람들의 영혼에는 그렇게,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영혼에 잠들어 있는 음식이 하나씩 있을 것이다. 나에게 돈가스가 그러하듯이.







  8살인지, 9살인지 잘 모르겠다. 그즈음이다. 4,000원인지 4,500원이었는지 그것도 잘 모르겠다. 하여튼 그즈음의 가격이었다. 

  엄마, 아빠는 약속이나 한 듯이 그 집에 데려갔다. 간판도 기억 안 난다. '경양식' 돈가스 집이었다. 경양식이 무슨 말인지도 몰랐다. 양식은 알겠는데, 경양식은 뭐지. 그때 대부분 돈가스 앞에는 '경양식'이란 말이 붙어 있었다. 그래서 돈가스의 풀네임이 '경양식 돈가스'인 줄 알았다. 

  엄마와 아빠는 고성을 내지르는 날이면 나와 동생을 경양식 돈가스 집으로 데려갔다. 각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약속이나 한 듯이 엄마와 아빠는 자신의 몫은 시키지 않고 동생과 내 것만 시켰다. 사네 못 사네 싸워도 그럴 때는 영락없는 부부의 모습이었다. 아빠는 그저 한숨만 쉬었고, 엄마는 조금 울기도 했다. 나와 동생은 경양식 돈가스를 앞에 두고 그런 엄마 아빠를 바라봤다. 돈가스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고, 엄마 아빠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몰랐다. 엄마 아빠는 돈가스와 그 앞에 놓인 남매를 차례로 보고 네모 또는 세모로 돈가스를 잘라 주었다. 먹어라, 한 마디에 동생과 나는 네모 또는 세모를 입에 넣었다. 

  사실, 맛은 없었다. 맛을 느낄 분위기도 기분도 아니었다. 아빠는 자꾸 한숨을 내쉬었고, 엄마는 눈이 빨개 있었고 자주 코를 풀었다. 우적우적 씹다 보면 목이 켁켁 막히기도 했고, 세 개째부터는 느끼했다. 맛있는지도 모르겠는데, 눈치를 보아하니 동생도 그런 것 같았다. 

  "그만 먹을래요."

  겨우 입을 떼면, 엄마와 아빠는 그때부터 나와 동생의 것을 먹었다. 엄마도 아빠도 다 먹지는 못 했던 것 같다. 아까웠지만 더 먹을 수는 없었다. 배도 불렀고, 더 먹었다간 목에 콱 막힐 것만 같았다. 


  어렸을 때의 기억 때문인가, 나는 돈가스를 좋아하지 않았다. 웬만하면 '경양식'이 붙은 곳은 가지 않았고(그곳의 메인은 돈가스일 확률이 매우 높으므로), 가끔 엄마가 도시락 반찬에 넣어준 동그란 미니 돈가스는 죄다 친구들 밥 위에 올려졌으나 정말이지 하나도 아깝거나 아쉽지 않았다. 돈을 내고 돈가스를 먹는 이들은 돈이 남아서 기부하는 이들처럼 보였다. 돈가스를 가장 좋아한다는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나는 '진짜 이상해' 하고, 상대는 '니가 더 이상해' 하며 그렇게 20년을 넘게 살아왔다. 

  그리고, 늘 그랬듯, 모든 문제의 출발은 역시나 '임신'이었다. 돈가스의 영혼이 내 무의식 속에서 붉은 소스의 색으로 깨어난 것은, 세 번째 임신이 확인되고 얼마 후였다. 






  두 번째 임신 동안은 햄버거를 내 왼쪽 오른쪽에 달고 다녔다. 빵 두 쪽에 고기 대충 구워 넣고 양배추 넣고 케첩 찍 뿌려 먹는, 무식한 미국 놈들 음식이라는 아빠의 말에 세뇌되어 햄버거는 가능한 한 먹지 않았다(라고 20대 초반에 말하고 다녔다). 무식한 게 미국 놈들인지 음식인지 헷갈렸지만 아빠에게 물어보면 '그것도 모르나' 할까 봐 묻지 않은 대신 안 먹고 자랐다. 물론 나의 깡촌산촌 동네에 롯땡리아가 처음 들어온 것이 고3 시절 이어서 청소년기에 햄버거를 제대로 구경도 못했다고 굳이 말하진 않았다. 

  이래저래 햄버거는 나와는 안 맞는 음식으로 스스로 규정하고 30년을 넘게 잘 살아왔는데, 둘째 임신 초기 어쩌다 먹은 햄버거가 내 안에 잠들어 있던 문구를 깨웠다. 빵 두 쪽에 고기 대충 구워 넣고 양배추 넣고 케첩 뿌렸는데, 어찌 이리도 위대한 맛이 나는 거지. 괜히 천조국이 아녀, 역시 미국은 음식도 위대한 나라군, 싶었다. 

  그날부터 삼일에 한 번씩 햄버거와 함께 지내기 시작했다. 롯땡리아는 한국적인 미국 맛(?!)이었고, 믹다날은 미국의 베이직스러운 맛이었달까. 가장 미국스러운 풍부함이 들어있는 맛은 역시 버거 왕이었다. 두툼한 빵과 미국스러운 소고기 패티, 양파도 미국 스멜이었고 토마토는 미국 현지 공수임이 틀림없는 맛이었다. (물론 미국 본토에 가본 적은 없다, 미군 부대에서 어리를 미국의 향기를 느꼈는데, 그 맛이 버거 왕에 있었다는 말이다) 켄터키 할아버지엄마 손길은 모두 닭고기를 패티로 썼는데도 느낌이 달랐다. 뭐랄까, 켄터키 특산 햄버거는 미국 시골의 맛이 났다면(켄터키 어디 있는지 알 턱이 없다), 엄마 손길은 요즘 시쳇말로 K-치킨의 풍미가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결론은 '다 맛있다'이다. 둘째는 햄버거가 키웠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닐 정도로 열심히 햄버거를 먹었다. 아직 한국말도 제대로 못하는 아이가 영어 발음이나 억양은 곧잘 따라 하는 걸 보면, 그게 다 햄버거의 은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잘 따라 하는 것과 잘하는 것은 별개임을 반드시 밝히는 바이다)


  아, 걱정 마시라, 본인 역시 햄버거로 넘어갈 뻔했지만 이 글의 주제가 돈가스임을 잊지 않고 있다. 그러니까, 햄버거는 임신 초기에 잠깐 먹어보고 눈을 뜬 것이지만 - 그것을 강조하고 싶어 쓸데없이 비중 있게 써냈지만 - 돈가스는 어찌 된 일인지 평생을 안 먹다가,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평생을 싫어하다가 말 그대로 '갑자기' 먹고 싶어 졌던 것이다. 그것도, 내 젊은 부모의 한숨과 눈물을 앞에 두었던 그 돈가스가. 

  그제야 나는 깨닫게 된 것이다, 음식에도 '영혼'이 있을 수 있음을, 음식은 영혼을 지닌 채 사람에게 먹혔다가, 어느 시절과 어느 장소에서 돌연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임을, 그러면 사람들은 어쩔 줄 몰라 쩔쩔매다가 '추억'이라는 단어로 그 감정을 무마시키려 애쓰는 존재임을. 


  셋째 임신은 내 생에 가장 '살고 싶지 않은 때' 일어난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나의 자발적인 죽음을 10개월 후로 미루었다. 아이는 무슨 죄인가, 싶어 아이는 건강하게 낳고 죽어야지 하고 생각했다. 그렇게 겨울이 점령한 창밖을 보던 어느 날 돌연 돈가스가 먹고 싶어진 것이다. 

  참으로 이상했다. 나와는 평생 인연이 없던 음식이, 어느 점심 그렇게나 뜻밖에 떠오를 줄이야. 나는 돈가스라는 음식과 나의 연결고리를 찾으러 과거의 순간순간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어느 지점에서 불현듯 발견한 단어는, '부모父母'였다. 젊은 나의 부모도 그렇게 갑자기, 돌연, 불현듯 '살기 싫어지거나' '더는 이렇게는 못 살겠다' 하는 때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투명하고 두려운 빛의 눈으로 자신들을 바라보는 아들딸을 보았을 것이다. 저것들은 무슨 죄냐, 하며, 자신들이 했던 생각에 괜스레 미안해졌을 것이다. 동네에서 가장 비싸고 있어 보이는 집으로 자식들을 데리고 갔을 것이고, 아들딸 입으로 들어가는 세모 네모를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래, 니들 먹여 살려야지, 니들 때문에라도 살아야지' 이런 생각을 다지고 다지며, 그들이 남긴 돈가스를 씹어 삼켰을 것이다. 

  마음 속 어디선가 30여 년도 더 넘은 돈가스 냄새가 풍겨오기 시작했다. 나는 그 맛을 찾아야만 했고, '부모'라는 명찰을 달고 그 돈가스를 먹어야만 했다. 갓 세포분열을 시작한 존재에게 '너 때문에 내 인생이 망했어', '너만 아니었으면', '너 때문에 죽지도 못해'라는, 부모로서 해서는 안 될 생각들을 했던 나를 없애고 다시 태어나기 위해 '돈가스'를 먹어야만 했다.

  집 근처 '경양식 돈가스'를 검색하고 그날부터 의식적으로 먹으러 다녔다. 돈가스들은 하나 같이 맛있었다. 사과소스 돈가스는 역시나 상큼한 맛이 있었고, 맞은편 돈가스 집의 패티는 두툼해서 씹다 보면 귀 밑이 아파올 지경이었다. X표를 해가며 정복한 주변 돈가스들은 다 괜찮았으나, 어째 그 맛이 아니었다. 단순하면서도 살짝 느끼하고, '풍미'나 이런 것과는 거리가 먼데 다 먹을 때까지 질리지 않는, 30년 전의 맛. 그 맛을 찾아 경기 남동부의 웬만한 돈가스집을 떠돈 지 3년이 다 되어가지만 찾기는 쉽지 않았고, 어느 순간부터 나는 '옛날 돈가스 맛집'이라는 SNS 표기를 불신하기 시작했다. 시간은 흘렀고 이사를 했고 막내는 두 돌이 지났고 그렇게 나는 돈가스를 잊어가고 있었다. 부모만 하기에도 너무 바쁜 시간들이었다.






  새로운 곳에 적응하는 건 쉬운 일이었지만, '앞으로 1년을 더 살 곳'이라는 타이틀을 내걸기엔 솔직히 거부감이 있었다. 제대로 된 산책로 하나 없고, 삭막한 변전소 뷰에, 마트 하나 제대로 된 곳 가려면 최소 20분 이상이고, 다운타운시내는 요즘 보기 힘든 전깃줄에 꽁꽁 묶여 영 지저분해 보였다. 휴, 1년이다, 1년, 1년만 참자, 1년 금방이다. 봄여름갈결 후딱 간다, 100세 시대에 1/100이다, 나는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괜찮나? 오잉. 

  살짝 울적했는데, 더 울적해진 이유는 순전히 돈가스가 먹고 싶어 졌기 때문이었다. 제대로 된 편의점 하나 없는 동네에 무슨 돈가스가.. 하며 갑갑한 마음으로 초록 창을 열었다. '돈가스'를 치니, 2km 근방 한 집이 있고 나머지는 10km 이상이다. 역시나.. 

  2km 그 집 리뷰 중에 '아빠가 어릴 때 먹고 아들 데리고 가서 먹는 돈가스 집'이라는 문구를 보았다. 오, 이 정도 성의는 있어야 갈 마음이 생기지. 그 성의가 맘에 들어 코트를 걸쳤다. 그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본격 돈가스 인생 3년 만에 30년의 맛을 찾게 될 줄은.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성업 중입니다 


  지나치고 갈 뻔했다. 4차선 국도의 옆 길에 있어 '돈가스를 향한 집념'이 아니었다면 찾지 못했을 수도 있다. 찾았다 해도 자신의 눈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 이 집이 맞아, 맞아, 맞을 거야, 강한 신념을 가지지 않는다면 들어가지 못할 수도 있다. 밖에서 보면 30년 전 폐업한 가게의 외관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을 여는 순간 떠오른 첫 단어는 '양가감정의 동물'이었다. 사람은 얼마나 약아빠진 양가감정의 동물이던가. 점심시간이었기 때문에 만석에 웨이팅까지 있는 내부를 보고, '잘 찾아왔구나' 싶었으면서도 한편으론 '이런 시골 촌구석에 돈가스 집이라곤 여기 하나뿐이니..' 싶어진 거다. 두 번 정도 '그냥 나갈까' 고민했지만 어느새 나는 안내받아 빈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이제는 피할 수 없다, 이렇게 된 이상 먹어보는 거다, 북한을 가까이 둔 경기북부 어느 촌구석 4차선 옆 오래된 외관의, '대를 이어 만들고 먹는다는' '경양식 돈가스'를.







배운 사람답게 수우프에 후추를 뿌려 먹었습니다


30여 년 전 그날 먹었던 그 모습 그대로. 아, 왼쪽 상단에 있어야 할 단무지는 따로 접시에.


케첩:마요네즈 4:6의 황금비율을 잘 지켜낸 사라다 쏘오스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절에서 온 게맛쌀


문화체육부 비공식 지정 1등급 돈가스 소오스 빛깔



  여전히 사람은 많았으나, 나는 굳이 눈물을 닦지 않았다. 거의 다 먹을 때까지 눈물이 계속 났다. 어쩜 이리도 그때와 맛이 똑같을 수가 있지, 하는 감탄은 두 번째였다. 돈가스가 지켜낸 영혼 속에는 어린 내 부모의 마음도 담겨 있었다. 새끼가 뭔지, 니들 때문에라도 내가 살아야지, 많이 먹어라, 니들이 있어서 내가 산다. 오른쪽에선 아빠의 한숨이, 맞은편엔 엄마의 눈물이 들리고 보이는 것 같아 쉽게 넘길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다 먹었다. 다 먹을 수밖에 없었다. 이상하게도, 8살인가 9살의 내가 먹은 돈가스는 맛이 없었는데, 어미가 되어 먹는 그 시절의 돈가스는 참으로 맛있었다. 엄마 아빠의 표정을 읽어내야 하느라 바빠서 맛을 느끼지 못했던 것일까, 경양식 돈가스라는 게 실은 이렇게 맛있는 음식인데. 이 사실을 나는 30년이나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아마도 내가 엄마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고, 내 젊은 부모의 마음결이 내게 스몄기 때문일 것이고, 내가 가장 마음으로 아팠던 시절 떠올랐던 음식이기 때문일 것이고 이 맛을 찾아 3년을 헤맸기 때문일 것이고 그래서 더욱 정답고 애달픈 맛이기 때문에, 이 집 돈가스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되었다. 

  


  아쉬운 것이 있다면 단 하나, 돈가스 인생 이제 겨우 세 살인데 앞으로 여기서 사는 1년 간만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내년 말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되면(아마 남부 지방이 될 것 같다, 그때 돼봐야 알겠지만) 이 근처로 오기 힘들어질 확률이 100%에 가깝다. 내 앞에 놓인 1년의 시한부 인생, 맘껏 만끽하며 즐기려 한다. 1년간 한숨도 눈물도 없이, 그저 즐거움과 기쁨과 행복과 축복과 은혜와 사랑과 세상 좋은 말들 다 갖다 붙여서 기분 좋게 돈가스를 먹으려 한다. 내 아이들의 영혼에 돈가스의 영혼이 합쳐질 때, 웃음과 행복과 기쁨과 사랑만 떠오를 수 있도록.





  아, 내게 더 이상 삶이 무의미하게 느껴지던 시절 나를 찾아온 셋째. 나는 이제 셋째가 없으면 삶이 무의미해진다. 그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 또한 돈가스이다. 작은 입으로 돈가스를 오물오물 씹어 삼키는 걸 보노라면, 인생이란, 참으로 지독한 아이러니라는 소스로 범벅된 돈가스를 맛있게 먹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도 드는 것이다. 



 

그때도 지금도, 인테리어용 콩은 먹지 않습니다 




* Image by 본인 폰카메라




4인 4색, 결 다른 사람들이 글쓰기 위해 모였습니다.

제대로 한번 써보자는 모의이며, 함께 생각을 나누며 어울려 살자는 시도입니다.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매거진에 글로 작당 모의할 예정이니 지켜봐 주시길 바랍니다.

자, 그럼 수작(手作) 들어갑니다~, 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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