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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샤 Nov 10. 2021

소나기, 그 후 (4)

< 작당모의(作黨謨議) 9차 문제(文題) : 무조건 이어 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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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에 이어지는 글입니다.




  과연 노인의 말이 맞았다. 서울 간 지 사흘 만에 칠복이가, 꼭 하루 뒤 소녀가 동리로 돌아왔다. 소녀가 돌아온 날은  소녀의 운명을 반기는 겐지 어쩐 겐지 한바탕 소나기가 퍼부었다. 유난히 가을 소나기가 많은 해였다.   


   




  노인은 다시 돌아온 소년을 푹 패인 어두운 눈으로 멀끔이 바라보았다. 

“내 너에게 할 말이 많지가 않다. 너는 여기로 올 놈이 아니고 서울로 갈 놈이다. 사흘 뒤 사내놈이 먼저, 나흘째 되는 날 계집년이 돌아올 것이야. 너는 고년이 하는 말을 따르거라. 그 계집이 명이 짧아 탓이지 내다보는 눈이 좋다. 반드시 그대로 해라. 여기서 고래 어죽잖이 서있디 말고 얼른 집으로 가거라. 여기 어디 봐서 두 사람 몫이 있던. 알아서 나가거라.”

  노인은 등을 돌려 마저 짚을 꼬았다. 노인의 어깨가 굼질굼질거리는 것을 한참을 보다가 소년은 산막을 나왔다.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고 보니 어째 죄다 더 꼬이고 꼬이는 것만 같았다. 


  집에 돌아와서는 점순이와 영 어색하였다. 점순이는 소년을 먼저 보아도 고개를 마당에 폭 속이고는 이내 들지를 않는 것이다. 소년 또한 눈길을 괜스레 다른 곳에 두다가 방향을 틀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던 점순이가 갑자기 ‘흥,’하며 소년의 어깨를 자기 어깨로 밀쳤는지 부딪혔는지 내뺀 그 저녁 어머니에게서 말을 듣게 된 것이다.

  “아 글쎄, 칠복이가 서울은 싫다고, 분당 그... 대장인가 거기에 터를 잡자하니 윤초시 증손녀가 생떼를 쓰더랍니다. 계집아이가 거기는 화(火)가 깃든 땅이라고 했다네요. 서울로 가서 보니, 아이고야 집문서가 진짜가 아니랍디다. 집문서 받아본 사람이, 사람을 동리로 보내 집문서가 긴가 아닌가 알아보겠다고 하였대요. 칠복이가 그 길로 혼자 내뺐다고 하네요.”

  “어허, 윤초시네 집 사람 또한 그러는 게 아닌가. 양평에서 가게 낼 거라고 하면서 집문서를 내놓았는데, 증손녀 그 아이가 눈을 새하얗게 뜨고 한참을 이리 보고 저리 보고 하는 게 예사롭지 않더라고. 혹시 싶어 그 집 어른이 그럴듯하게 써서 고것을 넣어뒀더니 계집이랑 쏙 사라진 거라더군. 서울에서 나고 자라서 그러나 아주 요망하기가 그지없어. 아참, 그 아이가 니놈을 내일 좀 보고 싶다고 하더구나. 서로 알고 있었느냐.”

  소년은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노인의 말을 자꾸 떠올렸다. 고년이 하는 말을 따르거라. 

  소녀의 ‘이 바보’가 자꾸만 떠올랐다. 그때 내빼지 않았더라면, 서울로 함께 갔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소년은 내일 보게 되면 ‘이 바보’를 되돌려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옆에서 호롱불이 잠자코 몸을 흔들어댔다.     






  소녀는 짐짓 웃어 보였다. 보조개도 여전했다. 그것 말곤 딴 사람 같았다. 낯빛은 차가웠고 몸은 더 작아졌다. 입을 열 기운도 없어 보였다. 왜 하필 그날의 물이 들었던 옷을 그대로 입고 있는 건지. 

  소녀가 손을 뻗어서 소년도 주춤거리다 손을 잡았다. 주머니 속 호두를 쥐어 줄까 생각했지만 말았다. 이제 와서 다 무슨 소용이야. 소녀는 검지에 힘을 주고는 소년의 손바닥에 ㄱㄴ을 천천히 썼다. 어리둥절한 소년의 얼굴 위로 섬광이 하나 스쳤다. 두툼한 종이 뭉치 하나 건네던, 옹골찬 결연함이 눈빛 뒤에서 빛나던 소녀의 얼굴도 동시에 지나갔다. 목동, 분당, 강남 세 군데 중 하나를 고를 생각이야. 소녀는 소년을 더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고, 잠이 든 듯한 소녀의 얼굴을 좀 더 보고는 소년은 방을 나섰다.


      

  “고 계집이 자기가 입던 옷으로 묻어달라고 재차 말했건만, 미리 짜두었던 베옷을 입혀서 묻었다는군. 서울만 가지 않았어도 지 원대로 죽을 수도 있었는데, 고년도 참. 헛.”

  헛기침을 하는 아버지의 곁을 지키던 소년은 무겁게 입을 뗐다. 노인에게 들었던 말과 소녀가 손에 그린 ㄱㄴ을 이야기하는 동안 아버지와 어머니는 내내 서로를 번갈아볼 뿐 덧말을 붙이지 않았다. 요놈이 요 며칠 입을 꾹 다물고 지내더니 하는 말이 서울로 이사를 가야 하지 않겠냐는 요상한 말을 하는 것도 그렇거니와, 서울로 갈 방도는 더더욱 있을 리가 없었다. 요상한 말을 그럴싸하게 하는 것이 더 기가 차서 도통 잠이 오지 않는 밤이었다.     

  빙빙 어지러이 날아다니는 독수리 그림자도 뵈지 않는데, 이틀간 머리가 그럴싸하게 아팠다. 별말 없이 점심을 먹는데, 점순네 내외가 별안간 찾아온 것이다. 점순이도 가무잡잡한 얼굴을 감추고 서 있었다. 말인즉 점순이가 그저께 밤 달빛이 좋아 나갔다가 우연찮게 소년이 하는 말을 들었다는 것이다. 소리가 새어 나와 어쩔 수 없어서 미안했소, 라면서 하는 말이, 실은 멀쩡하던 수탉이 이유도 없이 죽은 날 후로 여러 날을 불길하여 고심하되 터를 살피며 새로 살 곳을 알아보는 중이었다 했다. 서울도 떠올렸는데 요년이 서울로 갑시다, 하며 이 집에서 들은 걸 옮겨대는데 실로 놀랍잖소, 그래도 땅을 같이 쓰는데 우리만 가기만 뭣하여 말 좀 들으러 왔소, 하는 점순이 아버지의 표정이 자못 진실하였다. 점순이가 고 옆에서 꼬닥꼬닥 위아래로 고갯질을 하였다.

 

  동리에 이사 달구지가 세 대나 들어선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을 것이다. 소년과 점순네가 서울로 향했고 윤초시네가 양평으로 향했다. 동네 사람들은 이쪽과 저쪽으로 손을 흔들며 그저 수군댈 뿐이었다. 가을 태풍 바람이 세게도 불어 갈꽃도 크게 손을 흔들어대던 아침이었다.


      




  강남 배밭을 한모지기 사서 점순네와 소년의 어머니는 매일 밭으로 나갔다. 사는 것의 혹독함에 소년의 아버지는 인력거를 끌기도 하였다. 어느 날은 한숨을 쉬며 들어와서는, 같이 인력거 하는 김 씨가 하루는 운수가 된통 좋아 돈을 왕창 벌어갔더니 마누라가 죽어있더라고 하더라, 거참 돈이 무에 길래 이리도 각박하단 말인지, 라는 말을 하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조용히 옆에 앉았던 소년은 낮에 밭에서 주어온 배를 한 입 베어 물었다. 혀가 아리게 단 맛이었으나 영 맛을 느낄 수가 없었다. 씹을수록 희멀건 맛이 요것이 서울의 맛인 겐가 하며 우걱우걱 목구멍 뒤로 넘겨댈 뿐이었다.







                



<에필로그>


  탑팰레스 23층의 풍경은 이 시간이 가장 아름다웠다. 스테이트 위 '-움', '-안'의 이름에 갇힌 자들이 태양을 잡아먹으려 하나 태양 또한 마지막 기세를 떨치며 호락호락 잡아먹히지 않는 순간. 

  대학병원 의사가 저녁 커피는 피하라 했으나 그 순간의 핏빛이 아름다워 커피를 내리지 않을 수가 없다. 곽점순 여사는 갓 내린 커피를 손에 들고 창문 가에 섰다. 

  분당 사는 둘째네 딸아이가 두고 간 종이가 영 신경이 쓰인다. 

  “할머니, 진짜 신기해. 네 명이 쓴 거거든. 할머니가 아시는 분들은 아닌 것 같은데 할머니 이야기를 잘 알고 쓴 것 같아. 하여간 할머니도 보면 재미있을 것 같아 글씨 크게 뽑았어. 함 봐봐.”

  목동 첫째네 아들은 학원시간 전에 와서 폰만 보고 ‘학원 갈게요’ 툭 던지고 나가는 반면, 손녀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오늘은 브란치인가 어디서 봤다고, 할머니 이야기인 것 같다고 한참을 떠들었다. 

  물론 곽점순 여사의 생의 곁가지에 글쟁이들이 스쳐 지나갔다는 것은, 남편 생전에도 알고는 있었다. 순간, 허허 웃던 남편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렇네요, 우리가 강남에 온 지도 벌써 60년이 넘었네요. 

  창 밖에는 어느새 태양을 삼켜버린 '움'과 '안'의 콘크리트들이 무심하게 서 있다. 그 뒤로 어둠이 승리의 흔적을 지우려 하고 있었다. 곽점순 여사는 천천히 소파로 몸을 옮겼다. 커피잔을 티테이블에 올리고, 세월이 갉아먹은 가죽 소파  팔걸이 위로 안경을 집어 들었다. 두어 번 안경을 올렸다 내렸다 하고는 코 끝에 잘 걸었다. 곽점순 여사는 손녀가 두고 간 종이를 잡아들었다. 어디 보자, 진우라, 어디서 들어본 것 같기도 하고..

      

어른들의 말이, 내일 소녀네가 양평읍으로 이사를 갈 것이며 거기에서 조그마한 가겟방을 보게 될 것이라고 했다......




[끝]



'작당모의' 매거진의 이번 주제는 '무조건 이어 쓰기'입니다.

1부 진우 작가님, 2부 민현 작가님, 3부 김소운 작가님의 순서로 한 편의 짧은 소설을 씁니다. 저는 11월 7일 일요일 김소운 작가님의 3부 발행 전까지 전혀 내용을 알지 못했고, 발행 이후 내용을 구상하였습니다. 몇몇 분들께서 '스포'를 물어오셨지만, 대답을 드리기 곤란했습니다. 저 역시 결말이 어찌 날지 예측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실마리를 주신 도곡동 곽점순 여사에게 감사드립니다. 

부족한 글이지만, 재미있는 시도로 봐주시고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작당모의'는 또 다른 도전과 이야기들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Image by Little Big Pictures





4인 4색, 결 다른 사람들이 글쓰기 위해 모였습니다.

제대로 한번 써보자는 모의이며, 함께 생각을 나누며 어울려 살자는 시도입니다.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매거진에 글로 작당 모의할 예정이니 지켜봐 주시길 바랍니다.

자, 그럼 수작(手作) 들어갑니다~, 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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