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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운 Nov 07. 2021

소나기, 그 후 (3)

< 작당모의(作黨謨議) 9차 문제(文題) : 무조건 이어 쓰기 >

https://brunch.co.kr/@jay147/175

https://brunch.co.kr/@illycoffee/104


2부에 이어지는 글입니다.



  소년의 콧등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눈앞에는 한 귀퉁이가 누렇게 바랜 집문서가 소녀의 손에서 팔랑팔랑 나비처럼 흔들리고 있었고 발아래 개울은 골골 소리를 냈다. 디딤돌을 회회 돌아나가는 개울물이 어지러웠다.

 “그... 그것이 말이다...”

 “그래, 그것이, 네 생각은 무엇이야?”

소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소년의 얼굴께로 얼굴을 바짝 들이대며 물었다.

 “그... 그러니까 그게 말이다... 집문서는 타... 탐이 난다만, 혹시 치... 칠복이 때문이라면...”


  그때였다. 날카롭고 까랑까랑한 목소리를 들은 것은. 갈꽃이 땅에 떨어지는 소리를 먼저 들었는지, ‘잡것들이라는 소리를 먼저 들었는지  수는 없지만 잰걸음으로 징검다리 초입을 들어서며 옷소매를 걷어붙이는  분명 점순이었다. 소년은 놀라  발짝 물러서며 소녀와 점순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어찌한다, 이대로 있다간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를 일인데...’

호드기를 불며 닭싸움을 붙이던 점순이라면 소녀의 머리채쯤은 잡아채고도 주리가 남을 터였다. 당하고만 있을 소녀도 아니었다. 누구 하나 사달이 나고도 남을 터였다.

점순이는 먹장구름 한 장을 머리 위에 인 채 오고 있었다. 갑자기 사면이 소란스러워지는가 싶더니 삽시간에 주위가 보랏빛으로 변하고 있었다.


  소년은 아비의 말이 퍼뜩 떠올랐다.

 “이도 저도 아니 되거들랑 눈깔 뒤집으며 콱 자빠져 버리는 게 상책 이제, 잘못 엮였다간 경을 칠 게니까.”

곤란한 지경에 이르면 내뱉는 말이었다.

지랄 맞은 점순이와 잔망스러운 계집애 사이를 벗어나는 길은 죽는시늉을 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소년은 “어, 어, 어라...” 외마디 말을 흐리며 디딤돌을 헛디딘 양 개울로 자빠져 버렸다. 일어나려다 뒷걸음을 쳤고 뒷걸음을 치다 다시 자빠졌다. 다시 일어나 절뚝거리며 잠시 걷는가 싶더니 무슨 생각인지 개울가 깊은 웅덩이가 있는 수풀께로 개헤엄을 치며 멀어진다. 소년의 어깨에서 김이 올랐다.

  “저... 바보 녀석이 뭐 하는 거야, 부러 저러는 거지, 내 모를 줄 알고... 아이 약 올라! 내 가만있나 봐라.”

점순이는 화가 덜 풀린 목소리로 쌕쌕거렸다. 소녀에게도 묻는다.

 “그런데, 너는 죽었다고 했는데 어찌 된 일이냐?”

 한편, 소녀는 점순이의 말에는 대꾸도 없이 시선은  매섭게 소년의 모습을 따라갔다.

  “네가 알아 무엇하게. 가거라, 큰비가 온단다.”

소녀는 입을 앙 다문 채 홱 돌아 징검다리를 건너갔다. 점순이는 소년의 모습을 바라보는데, 디딤돌 위로 후드득 빗방울 듣는 소리가 난다. 굵은 빗방울이었다. 금세 눈앞을 가로막는 빗줄기.




  밤에 잠겨있던 새벽이 가늘게 눈을 뜨듯 소년은 찬찬히 눈을 떴다. 어둠 가운데 작은 방의 모습이 서서히 눈에 들어왔다. 초저녁쯤이려나. 소란하던 빗줄기는 이제 그친 모양이다. 방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손으로 이겨 바른 흙벽에는 취와 고사리 등의 산채(山菜)가 매달려 있었고 망태기와 손곡괭이 같은 연장들도 걸려 있었다. 약초꾼들의 산막(山幕) 같았다.

 소년은 기억을 더듬었다. 점순이와 소녀를 피해 개울 둑 아래 수풀께로 몸을 감추었을 때 굵은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빗줄기 사이로 소녀가 홱 돌아 나가는 것과 한참을 서 있던 점순이가 소녀와 반대쪽으로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위기는 넘겼으나 다음에 만나지면 큰일이었다.

 그런데 벌떡 일어섰을 때 머리가 핑 하고 어지러웠고 밖으로 나오려는 발을 헛디디며 개울로 나뒹굴었다. 갑자기 쏟아진 비로 금세 개울은 물이 불어 있었다. 어찌 된 일인지 손과 발은 말을 듣지 않았다. 이상하다? 손바닥 들여다보듯 뻔한 개울인데...


 “일어난? 깨나지 않아 걱정됐다.”

밥그릇 달랑 얹은 채반을 내려놓으며 노인은 어여 먹으라고 손짓을 했다.

 “날이 새 거든 집으로 가라, 낸 마침 갈 길이 멀어 지금 나가야 하니... 네 이야기는 가는 길에 들러 전하지비. 네가 누군지 안다."

 소년은 어떻게 여기 오게 되었는지, 언제 오실 것인지, 나를 어찌 아는지 물었으나 노인은 말없이 자신의 짐만 챙겼다. 귀가 먹었나?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이내 뒷모습을 보이며 사라졌다.

 “네, 다... 다녀오세요” 얼결에 고맙다는 말도 하지 못했다.


 노인이 산막을 떠난 지는 이미 오래되었다. 산속에 밤이 내렸고 소년은 혼자가 되었다.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고 있자니 괜히 맥쩍게 쓸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성 하나가 긴 흔적을 남기고 산 저편으로 멀어졌다. 세상에서 가장 편하고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저건 분명 천국으로 들어가는 영혼일 거야.’

 밤이 되면 낮과는 다른 또 하나의 세계가 펼쳐진다는 것을 소년은 알았다. 모든 것이 어제의 것과 달라 보였다. 소년은 큰 어른이 된 것만 같았다. 산과 더불어 약초꾼으로 살아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며칠 뒤, 소년은 여러 가지 생각과 결심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부모님께 약초꾼 노인을 따라 이 산 저 산으로 돌아다니고 싶다 했다. 처음엔 펄쩍 뛰던 어른들은 마름도 아니고 배재*를 얻어 땅을 부치며 굽신거리며 사느니 그 짝이 낫다고 허락하셨다.

  그날 밤, 소년은 까무룩 잠이 들었는가 하는데,

 “허, 참 세상에 윤 초시 댁도 말이 아니게 됐네. 양평읍서 가게 하나 얻으려나 했는데 그 계집애가 영감님 집문서를 들고 사라졌다지 않아. 글쎄 죽은 시늉을 했다니 어른들이 어린것의 잔망스러운 짓에 놀아난 게 아니냐고. 이제 윤 초시 댁도 영 어렵게 되었어.”

남폿불 밑에서 바느질감을 안고 있던 어머니가,

 “글쎄 말이에요, 열일곱씩이나 된 것들이 야반도주를 했으니 어린것들이 맹랑하기 그지없지요? 그것이 칠복이를 꾀어 서울로 갔다나 봐요. 집문서를 서울 사는 누가 물으러 왔다지요, 아마.” 하며 츳츳 혀를 찼다.


  소년은 돌아누워 생각했다.

소녀는 이미 초상을 치르던 그날 죽어 없어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소녀가 안고 있는 꽃묶음이 망그러졌듯이. 점순이도 그만 생각에서 놓아주기로 했다. 노란 동백꽃 속에서 땅이 꺼지듯 온정신이 고만 아찔해버렸듯이.


  소년은 이제 빼치지 않기로 했다.


[4부에 계속됩니다.]


'작당모의' 매거진의 이번 주제는 '무조건 이어 쓰기'입니다.

1부는 진우 작가님, 2부는 민현 작가님, 3부는 제가 맡았고, 4부 진샤 작가님의 순서로 한 편의 짧은 소설을 씁니다. 제 글 뒤로 이야기를 이어가 주실 진샤 작가님은 오늘 이 글이 발행되는 순간까지도 어떤 내용으로 이야기가 펼쳐지는지 모르십니다. 제가 이 글을 발행하면 그제야 글을 읽고 내용을 구상하고 이야기를 이어 나가시겠지요. 저 역시 민현 작가님의 두 번째 글이 발행되고 나서야 내용을 확인하고 세 번째 이야기를 이었습니다.

4부는 11월 10일 수요일에 진샤 작가님의 글로 발행됩니다



* Image by Little Big Pictures

* 배재 : 땅을 소작할 수 있는 권리



4인 4색, 결 다른 사람들이 글쓰기 위해 모였습니다.

제대로 한번 써보자는 모의이며, 함께 생각을 나누며 어울려 살자는 시도입니다.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매거진에 글로 작당 모의할 예정이니 지켜봐 주시길 바랍니다.

자, 그럼 수작(手作) 들어갑니다~, 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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