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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우 Oct 31. 2021

소나기, 그 후 (1)

< 작당모의(作黨謨議) 9차 문제(文題) : 무조건 이어 쓰기 >


   어른들의 말이, 내일 소녀네가 양평읍으로 이사를 갈 것이며 거기에서 조그마한 가겟방을 보게 될 것이라고 했다. 소년은 저도 모르게 주머니 속 호두알을 만지작거렸다. 다른 한 손으로는 수없이 갈꽃을 휘어 꺾었다. 

   내일 소녀네가 이사하는 걸 가보나 어쩌나 혼자서 고민하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는데, 어렴풋이 들려오는 아버지의 말소리에 선잠에서 깼다.

   “윤 초시 댁도 말이 아니야. 그 많은 전답을 다 팔아 버린 것도 모자라 역상逆喪까지 당하는 걸 보면…”

   윤 초시 댁이 상喪을 당했다는 말이었다. 누가 또 죽었냐는 어머니의 물음에 아버지는 깊은 한숨부터 내쉬었다.

   “어쩌면 그렇게 자식 복이 없을까. 꽤 여러 날 앓는 걸 약도 변변히 못 썼다더군. 지금 같아선 윤 초시네도 대代가 끊긴 셈이지. 그런데 이번 계집앤 여간 잔망스럽지가 않아.”

계집애란 말에 소년은 눈이 번쩍 뜨였다. 잠이 저만치 달아났다. 숨을 꼴깍 삼키며 아버지의 다음 말을 간절히 기다렸다.

   “글쎄, 죽기 전에 이런 말을 했다지 않아? 자기가 죽거든 자기 입던 옷을 꼭 그대로 입혀서 묻어 달라고…”

   그 말을 듣는 순간, 소년은 눈앞이 핑 도는 것 같았다. 아니다, 그럴 리 없다. 소녀가 죽다니. 그건 거짓말이다. 아직 호두도 전해 주지 못했는데, 죽을 각오를 하고 덕쇠 할아버지네 호두를 털었는데, 소녀가 죽다니, 그건 분명 거짓말일 것이다. 아니라고, 그건 거짓말이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자는 체해야 했다. 그저 몸을 비트는 것이 소년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이불을 새로 덮어주려는 어머니를 보며 아버지가 그랬다.

   “아니, 그런데 저 놈은 왜 바지를 훌러덩 내리고 자는 거야? 아이구, 저 놈 보소. 내일 당장 장가보내도 되겠구먼, 허허.”




   다음날 아침, 소년은 다시 개울가로 나갔다. 하지만 소녀가 그곳에 있을 리 없다.

   소년은 징검다리 한가운데 앉았다. 한참 동안 물속을 빤히 쳐다보다가 두 손으로 물을 퍼올려 세수를 했다. 유난히 목덜미가 하얗던 소녀가 생각났다. 소년은 하얀 조약돌 하나를 집어냈다. 그것을 개울가로 힘껏 집어던졌다. 그리고 소리를 질렀다. 서울 말을 따라 하고 싶었다.

   “이 바보.”


   갈밭 사잇길로 달렸다.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어제까지와 다르게 오늘부터는 혼자다. 소년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소녀가 그랬던 것처럼 소년도 이번엔 갈꽃을 한 옴큼 꺾어 머리에 꽂았다. 머리에 꽃을 꽂았더니 다른 세상의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유난히 맑은 가을 햇살이 갈꽃을 간질였다.

   소년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둥그런 것이 만져진다. 조약돌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뭉클했지만 묵직한 것이었다. 얼굴이 달아오르기 전에 슬며시 손을 뺐다.

   메밀밭을 지나는데 찝찔한 액체가 소년의 입술에 흘러들었다. 코피였다. 그날 이후로 메밀밭을 지나기만 하면 저절로 코피가 났다. 어디선가 ‘바보, 바보’하는 소리가 자꾸만 뒤따라오는 것 같았다.

   이번엔 소녀와 함께 갔던 산 너머에 가 보기로 했다. 가을걷이가 끝난 들판에는 홀로 선 허수아비가 외로워 보였다. 철 모르는 참새 몇 마리가 허수아비를 희롱하고 있었다. 소녀가 없어서인지 하늘을 빙빙 맴돌던 독수리도 오늘은 보이지 않았다.

   무밭을 지날 즈음엔 한 개를 쑥 뽑아 대강이를 베물어 낸 다음 우쩍 깨물어보았다. 소녀의 말이 맞았다. 맵고 지릴 뿐, 맛이라곤 없었다.


   결국 소년의 발걸음은 소나기를 피해 소녀와 둘이 들어앉았던 수숫단을 향했다. 제 모습은 사라진 지 오래였지만 수숫단 앞에 서니 그날의 기억만큼은 생생했다. 저 수숫단 안에서 소녀는 소년에게 귓속말로 그랬었다.

   “우리, 아빠 엄마 놀이할까?”

   정말 잔망스러운 것. 그때 소나기가 그쯤에서 그친 것이 참말 다행이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그날 비가 더 내렸어도 그렇게 나쁘진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지금은 모두 부질없는 미련이다.


   며칠 뒤, 소년은 다시 개울가로 향했다. 주머니 속에 넣을 조약돌을 찾을 심산이었다. 그런데 저 멀리 징검다리 중간 즈음에 누군가가 서 있다. 소년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너무 간절하면 헛것이 보인다더니 지금 내가 그런 것인가?’

   징검다리 위에서 소년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는 것은 분명, 소녀였다. 아니, 윤 초시네 증손녀는 죽었다고 했는데, 장까지 마쳤다고 했는데. 소년은 헐레벌떡 달려갔다. 

   다리 위에서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볼을 꼬집었다. 꿈일지도 모른다. 힘껏 볼을 비틀었다. 아팠다. 이건 꿈이 아니다. 생시다. 내 앞에 서 있는 것은 분명 윤 초시네 증손녀가 맞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소녀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바보.”

   소년이 조심스레 물었다.

   “어떻게 된 거냐? 앓다가 약 한 첩도 써보지 못하고 죽었다고 들었다. 입던 옷 그대로 묻어 달라는 유언도 남겼다고 어른들이 그랬다.”

   “맞아. 하지만 그 모든 것은 나의 계략이었어. 죽었다고 소문을 낸 것이지.”

   소녀는 알아듣기 어려운 말을 시작했다.

   “내가 입던 옷 그대로 묻어 달라고 한 건, 바로 이것 때문이야.”

   그러면서 소녀는 허리춤을 비틀어 무언가를 꺼냈다. 두툼한 종이 뭉치였다.

   “이건 우리 할아버지 집문서야. 나는 양평읍에 가서 구멍가게 따위나 하면서 살고 싶지는 않아. 나와 함께 서울로 가자. 작은 평수라도 지금 하나 장만해 두면 머지않아 큰돈이 될 것 같아. 목동, 강남, 분당, 세 군데 중 하나를 고를 생각이야.”


   소녀는 눈을 크게 뜨고 소년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답을 기다리는 것이리라. 소년은 갑자기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발아래로 흘러가는 개울이 점점 더 큰 소리를 냈다. 이러다간 쓰러질지도 모른다. 무슨 말이든 해야 했다. 어렵사리 중심을 잡은 소년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2부에 계속됩니다]


여러분들이 애정해주시는 매거진 '작당모의', 이번 주제는 '무조건 이어 쓰기'입니다.

오늘 이 글이 발행되는 순간까지 다른 세 분의 작가님(민현, 소운, 진샤)들은 첫 번째 주자인 제가 무엇을 어떻게 쓸지 전혀 알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두번째 작가인 민현 작가님께서 오늘 발행된 이야기에 이어 '소나기, 그 후'의 2부를 쓰실 것이며, 그것은 11월 3일 수요일에 발행될 예정입니다. 3부는 소운 작가님, 4부는 진샤 작가님입니다. 마찬가지로 직전의 작가님이 어떤 전개를 하실지는 전혀 모르는 상황입니다

작당모의 필진들의 재기 발랄하고 창의 번득이는 재미난 도전을 오늘도 변함없이 즐겁게 지켜봐 주십시오. 관심과 사랑으로 애독해주시는 모든 분들,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월목' 발행이 원칙이나 이번에 한하여 부득이 '일수' 발행됨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 Image by Little Big Pictures 



4인 4색, 결 다른 사람들이 글쓰기 위해 모였습니다.

제대로 한번 써보자는 모의이며, 함께 생각을 나누며 어울려 살자는 시도입니다.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매거진에 글로 작당 모의할 예정이니 지켜봐 주시길 바랍니다.

자, 그럼 수작(手作) 들어갑니다~, 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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