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소풍을 며칠 앞둔 어느 날 밤, 뜬금없이 도둑이 들었다. 동네에서 가장 살림살이가 시원찮은 우리 집을 타깃으로 한 것으로 보아 그놈은 가장 기본적인 시장 조사도 하지 않은, 분명 생초짜 도둑임에 틀림없었다. 여기저기 한참이나 뒤진 끝에 결국 빈손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음을 깨달았던 도둑은, 들어올 때처럼 조심스럽게 물러나면 차라리 좋았을 것을, 하필이면 아버지의 얼굴을 밟고 말았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게 아버지는 운동화 자국이 선명하게 찍힌 얼굴로 욕부터 했다.
“그 새끼가 내 얼굴을 이렇게…”
사십여 년이 지난 지금, 아버지의 욕설을 다시 소환한 것은 다름 아닌 박 영감님이다. 박 영감님은 아버지가 다니는 경로당에 최근 들어 나오기 시작한, 이른바 신입 회원이다.
아버지의 설명에 따르자면 이 분은 상대를 가리지 않고 이것저것 다짜고짜 시비를 걸어 결국 싸움을 벌여대는 통에 기존에 계시던 어르신들 사이에서도 점점 원성이 높아지는 중이라고 했다. 그래도 골 깊은 시비까지는 이어지지 않도록 경로당의 총무를 맡고 있는 아버지가 개입해서 당사자들을 어르고 달래며 잘 지내왔는데 어제는 그 시비의 화살이 뜻밖에도 아버지를 향해 날아왔다는 것이다.
“임 총무는 아직도 현장에 일하러 다닌다면서요?”
“네. 건강이 허락하니 계속 일을 하고 있지요.”
은근한 칭찬까지 내심 기대했던 아버지에게 박영감님의 갑작스러운 공격이 시작되었다.
“아니, 자식 놈들은 뭘 하고 있길래 팔십 넘은 아버지를 건설 현장에 나가도록 내버려 둔답니까? 천하에 몹쓸 녀석들이네?”
“네? 뭐라고요?”
“자식 놈들이 변변해서 부모를 잘 모시면 임 총무도 땀 흘리지 않고 편안하게 놀 텐데, 그렇잖아요? 내 말이 틀렸어요? 나이가 팔십인데!”
“……”
팔십이 넘은 아버지가 여전히 건설 현장에 나가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에는 특별한 사연이 있다.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몇 대를 이어온 지긋지긋한 가난을 아버지 당대에 떨쳐내는 방법은 도시로 나가는 것이 유일했다. 지연도 혈연도 전무全無한 것이 당연했을 아버지가 낯선 부산에서 얻을 수 있는 일자리라고는, 당시 한창이던 도시 개발 붐에 편승해 도처에서 펼쳐졌던 공사 현장 밖에 없었다. 눈썰미와 손재주가 좋았던 아버지는 운 좋게도 몇몇 은인들을 만나 그들의 도움으로 비교적 빠른 시간 안에 목수木手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고향을 떠난 아버지가 부산에서 자리를 잡았다는 소문이 돌자 마을에 있던 동생들의 엉덩이도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몇몇은 등짝을 맞아가며 출가를 감행했고, 또 몇몇은 아버지처럼 야반도주로 부산에 첫발을 디뎠다. 그들 역시 낯선 타지에서 달리 갈 곳이 없었다. 아버지를 찾아왔다.
두 평 반짜리 루핑 집 문간방에 살던 아버지와 엄마는, 내가 지금도 삼촌과 아저씨라 부르는 그들을 반갑게 맞아들였다. 그리고 삼촌들이 자립할 때까지 아버지는 먹고 살 일자리를 구해주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고, 엄마는 아저씨들의 고린내 나는 속옷까지 인상 한 번 찡그리지 않고 웃는 얼굴로 대신 빨았다. 이미 오십여 년이 지난 일이다.
아버지는 몇 해 전, 진작에 현장 일에서 손을 떼었다. 나와 누나, 여동생의 만류를 결국 아버지가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평생의 피땀이 묻은 목수 연장을 버린 지도 오래다. 그런데 그 삼촌들과 아저씨들이 일선에서 은퇴한 아버지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는다.
“형님, 집에서 놀면 뭐합니꺼. 내일 현장에 나오이소(나오세요).”
“형님, 일손이 달리는데 다른 사람은 미덥지가 못합니더. 꼭 좀 도와 주이소.”
저녁이면 아버지를 청하는 삼촌들의 전화가 잦다. 때로는 아저씨들의 간청과 요청이 겹쳐 아버지가 어떤 것을 선택할지 몰라 잠시 당황하는 모습을 보일 때도 있다.
“준택이 현장에 가면 수옥이가 기분 상한다 할 것이고, 수옥이한테 가면 도택이가 섭섭해할 것이고.”
아버지가 현장에서 힘을 쓰는 일을 하려고 해도 삼촌들이 그대로 내버려 둘 리가 없다. 안전모와 안전화를 비롯한 보호 장구를 든든히 갖추고서 불빛이 반짝거리는 경광봉을 들고 공사 현장 앞을 오가는 차량과 사람들에게 수신호를 보내는 것이 아버지가 하는 노동의 전부다. 하지만 그 노동에는 적지 않은 일당이 주어진다. (정확하게 말씀하지는 않아도 아버지의 일당은 대략 십오만 원 안팎인 눈치다.)
삼촌들과 아저씨들이 변함없이 아버지를 챙기려는 숨은 뜻이 보은報恩임을 나는 잘 안다. 그런 연유로 해서 아버지는 지금도 한 달에 대략 보름 이상을 현장에 나가서 일을 하는 것이다. 물론 아버지의 타고난 건강한 체력이 뒷받침되기 때문임은 묻지 않아도 당연한 일이다.
그 연세에 스스로의 힘으로 그만큼의 수입을 만드니 아버지는 당연히 경로당에서도 나름 큰손이다. 천 원짜리 한 장이 아쉬운 노인들 서로가 각자의 눈치를 보며 애먼 눈꼬리를 비비고 있을 때, 먼저 나서서 “뜨뜻한 국밥이나 묵으러 가자, 내가 살게.” 하는 것은 언제나 아버지이며, 철마다 새로 나온 과일을 한 아름 사 와서 경로당 친구들과 계절의 맛을 만끽하는 것도 아버지가 앞장서서 즐겨하는 일이다. 그런 아버지를 두고 감히 분위기 파악도 미처 못한 신입 회원 박 영감님이 근거 없는 공격을 했다. 아버지의 노동을 폄훼하고 비난하는 것도 모자라 자식들에 대한 험담까지 섞어서 말이다. 그것이 결국 아버지가 사십여 년 전의 욕설을 다시 꺼낸 이유였던 것이다.
“칠십 아홉 밖에 안된 새끼가…”
그 나이에 현장 일을 할 만큼 체력이 좋다는 칭찬마저 내심 기대했던 아버지의 화는 생각보다 오래 이어졌다. 사나흘 정도 경로당 발길을 끊었을 정도니 아버지의 부아가 꽤나 큰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내가 몇 번을 설득했지만 아버지의 표정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본의 아니게 월간 부부로 떨어져 있는 시간이 생각보다 길어진 탓에 지난 주말엔 연휴를 이용해서 아내가 아들을 데리고 부산에 왔다. 며느리라면 껌뻑 죽는 아버지가 먼저 박 영감님과의 일을 아내에게 들려주었다. 아내는 아버지의 읍소를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아버지의 이야기가 끝나자 방으로 아버지의 스마트폰을 가져갔던 아내가 잠시 후 다시 거실로 나왔다. 버튼을 누름과 동시에 노래가 흘러나왔다.
“이게 무슨 노래고?”
“요즘 제일 핫한 친구들이에요.”
“이거를 영감들이 어떻게 듣노. 다른 거 없나?”
그러자 아내가 아버지에게 귓속말로 뭔가를 말했다. 아버지의 표정이 금세 밝아졌다.
“그라믄 된단 말이제? 오야, 알았다. 두고 보자, 박 영감 이 자식. 니는 인자 죽었어.”
아버지가 갑자기 옷을 챙겨 입었다. 경로당에 갈 거라고 하셨다. 뜬금없었다.
나는 아내가 아버지에게 어떤 묘수를 드렸는지 자세히 알지 못한다. 아버지가 들고 가는 무기가 과연 박 영감님을 손쉽게 제압하고 경로당의 봄날을 다시 가져올 다이너마이트가 될 수 있을지 꽤나 궁금해졌다. 하지만 세계를 주름잡고 뒤흔드는 그 친구들이라면 아버지를 위해서 이번에도 분명 기꺼이 제 역할을 해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의 지혜는 거들 뿐이다. 그래서 나는 또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곁에 섰던 아내가 그것을 들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