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설립한 회사에서 어이없게도 해고를 당했다는 것과, 그것이 형제처럼 믿었던 후배의 배신 때문이었다는 것과, 알고 보니 그 배후에는 나의 둘도 없는 동업자 친구가 있었다는, 주말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희귀한 에피소드들은 그 해 여름을 지나면서 식어버린 커피처럼 밍밍해지고 말았다.
그들의 모략으로 결국 내가 법정에까지 서게 되었다는 사실 역시 새로운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몇 달에 걸친 재판을 통해 최종적으로 무죄 판결을 받았으나, 그때서야 비로소 배임과 횡령이 무엇인지 겨우 알았을 만큼 나는 무지했고, 속이 터질 듯한 억울함을 풀기 위해 무고죄로 그들을 고소하기엔 내가 너무 지쳐 있었다.
하지만 회복과 치유의 과정이라며 속 좋게 앉아 쉴 수는 없었다. 빨리 일어서야 했다. 내겐 아내와 아들, 가족이 있기 때문이었다.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 매일 발품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역시 쉽지 않았다.
하루아침에 안면을 몰수했던 사람들이, 내가 무죄 판결을 받았다는 소식에 그제야 하나둘 다시 연락을 해오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가 최 대표였다. 그 사건이 터지기 전에 나는, 뜻을 같이 하는 중소기업 대표들과 함께 지식 나눔과 친목을 목적으로 하는 작은 모임을 운영하고 있었다. 나는 그 포럼의 총무였고 최 대표는 일반 회원이었다.
최 대표의 전화임을 확인했을 때 솔직히 그렇게 달갑지는 않았다. 내가 구설에 휘말리자마자 모임에서 제명부터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가장 높였던 것이 최 대표였다는 말을 이미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화를 거절하는 것 역시 또 다른 구설의 빌미가 될 것 같았다. 마지못해 전화를 받았다. 예상했던 첫마디가 들려왔다.
“아, 임 대표. 나는 임 대표가 무죄라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그간 정말 고생 많았지?”
몇 달만의 통화에서 그는 스스럼없이 말을 놓고 있었다.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겉치레에 불과한 인사를 주고받은 다음, 뜬금없이 그가 말했다.
“앞으로 우리 회사를 임 대표가 맡아 주었으면 좋겠는데, 임 대표 경영 능력이야 우리 포럼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잖아? 어때? 내 부탁, 들어줄 거지?”
최 대표는 침구와 의류를 생산하는 사회적 기업을 운영하면서 대형 할인점 몇 곳에 자신의 매장을 가지고 있었다. 새로운 일자리를 구하던 터라 침구든 뭐든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나도 모르게 ‘형님, 고맙습니다’ 하는 소리가 먼저 튀어나왔다. 간사하다는 비난 따위는 기꺼이 감수할 만큼 나는 절박했다. 서둘러 아내에게도 소식을 전했다. 정말 잘되었다는 축하와 함께 아내는 그간의 마음고생을 눈물 섞인 목소리에 얹었다.
며칠 후, 약속한 시간에 맞추어 최 대표의 회사로 찾아갔다. 방배동의 고급 수입차 판매장 뒤에 자리한, 이층 양옥을 멋들어지게 개조한 사무실이었다. 당장 드라마를 찍어도 좋을 만큼 겉보기가 매끈했다. 앞으로 여기에서 일할 것을 생각하니 절로 흥이 났다.
최 대표가 곧 이층에서 내려왔다. 그런데 그의 옆에 낯선 이가 함께였다. 회사의 임원인가? 최 대표가 악수와 함께 먼저 말을 꺼냈다.
“서로 인사하지. 나는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을 골라서 회사 대표로 앉힐 생각이야.”
이게 무슨 말이지? 그때 분명 나더러 회사를 맡아 달라고 하지 않았어? 내가 잘못 들었나? 당황하기는 맞은 편의 낯선 이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회의실로 자리를 옮긴 최 대표는 회사의 향후 운영 방안을 브리핑해보라는, 또 한 번의 엉뚱한 질문을 ‘우리’에게 했다. 다행히도 나는 실무에 쓰기 위해 미리 준비해 간 자료가 있었다. 하지만 상대방은 그러지 못한 눈치였다.
잠시 후, 어깨를 두드리며 그를 배웅하는 최 대표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묘했다. 어쨌거나 달라진 것은 없다. 내가 사용하게 될 사무실에서 회사의 당면 과제 몇 가지를 주제로 최 대표와 두어 시간이 넘도록 이야기를 나누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드디어 출근날이 되었다. 없는 돈에 아내가 새 넥타이를 사 주었다. 조막손으로 파이팅을 따라 하는 아들을 보며 현관문을 닫았다.
주차를 하고 회사 마당에 들어서는데 최 대표가 서 있었다. 나를 돌아보는 표정이 전에 없이 어둡다. 이렇게 어색한 공기는 내가 먼저 불편하다.
“대표님,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시동을 걸고 출발을 하긴 했지만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비상등을 켜고 길가에 차를 세웠다. 최 대표의 퍽퍽한 말이 귓전을 맴돌다가 내 뺨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다른 게 아니고 임 대표, 실은 평소부터 잘 알고 지내던 스님을 어제 만났는데, 그 스님 말씀이 아 글쎄, 임 대표 사주가 나랑 상극相剋이어서 우리가 같이 일을 하면 절대로 안 된다고 하네? 그래서 이번 일은 그냥 없던 걸로 했으면 해. 이해해줘, 응?”
며칠 전, 회의를 마치고 일어서던 즈음에 뜻밖에 내 생일을 물어보던 것이 생각났다. 실제 음력 생일에다 출생 시각까지 꼼꼼히 받아 적던 그의 속내를 그때는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사주社主에게 사주四柱를 따지라고 사주使嗾한 것은 대체 누구일까? 사주가 안 좋다는 이유로 자신의 결정 따위는 얼마든지 번복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최 대표의 넌센스였고, 지금 세상에서 그런 일이 가능할 수도 있다는 것을 꿈에도 몰랐던 난,센스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졸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