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우 Nov 18. 2021

카레 나이스

< 작당모의(作黨謨議) 10차 문제(文題) : 가장 좋아하는 음식 >


   아버지는 여전히 입원 중이었고 엄마는 그래서 집을 비우는 때가 많았다. 여섯 살 터울의 누나가 여동생과 나를 혼자서 돌봐야 하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중학생인 누나는 학교를 마치자마자 서둘러 집으로 돌아와 우선 청소부터 했다. 누나의 눈에 들면 사탕 한 개라도 꼭 생긴다는 것을 일찌감치 깨달았던 우리는, 누나가 보는 앞에서 경쟁적으로 비질을 하거나 이미 비어있는 쓰레기통을 다시 비우는 척 연기를 하기도 했다.

   청소가 끝나면 다음은 숙제였다. 아직 입학 전인 동생이 한글 공부를 하겠다며 몽당연필을 쥐고 공책 위에 엎드리는데 하물며 이 학년인 내가 동생에게 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숙제를 얼른 마쳐놓고 시키지도 않은 구구단을 읊기 시작했다. 제멋대로 곡조를 바꿔가며 무려 삼단까지 좔좔 외웠다. 동생의 기를 완전히 꺾어 놓음과 동시에 누나의 관심을 독차지하겠다는 나름 비장의 무기였다. 삼일은 삼, 삼이는 육, 삼 삼은 구, 누나는 내 편, 네 편은 없지. 그것은 분명 산수가 아닌 놀림이었다. 대응할 방법을 찾다가 난처해진 동생은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놀라서 달려온 누나는 동생을 업어 달랬고, 나는 두 팔을 든 채 벽을 마주하며 한참을 서 있어야 했다. 우리들의 하루는 그렇게 시끌벅적한 장면으로 채워지며 빠르게 지나갔다. 그리고 또다시 일요일이 돌아왔다.

 



   이른 아침 용의 검사를 마친 동생과 나는, 누나가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옷을 홀랑 벗고 빨간 고무통 안에 냉큼 들어앉았다. 몸에서 때를 뜯어내는 고통이야 오늘도 여전하겠지만 누나는 목욕 후의 보상을 절대 잊지 않았다. 지난주에는 무려 짜장면이었다. 누나의 세신洗身은, 독립 자금의 행방을 묻는 일본 순사의 악랄한 고문에 다를 바 없었지만 그 고통이 끝나면 마주하게 될 향긋한 짜장면을 떠올리며 나는 인고忍苦의 시간을 겨우 버텨냈다. 그런데 그날은 달랐다.


   “가게 가서 이것들 사 온나.”

   새 내복에다 머리를 끼우는데 누나가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의 화장대에서 가져온 로숑을 내 얼굴에 발라주며 누나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싱싱한 걸로 달라고 해라.”

   천 원짜리 한 장을 주며 동생도 데려가라고 한다. 히히, 나중에 무거우면 동생에게 들게 해야지. 못된 오빠는 나쁜 계략부터 짰다.


   “어? 아닌데? 누나가 빨간 무 말고 당근 사 오라고 했는데?”

   반찬 가게 아줌마가 빨간 무를 집다 말고 한심하다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빨간 무가 당근이라는 설명 대신, 아줌마는 동생에게 알사탕 하나를 쥐어 주었다. 저런 오빠 밑에서 크느라 네가 고생이 많다는 일련의 동정심이 그 사탕에 담겼던 것 같다.

   당근 두 개, 감자 두 개, 양파 두 개, 카레 가루 한 봉지, 진주햄 소시지 한 개. 누나가 적어준 것은 그것이 전부였다. 혹시나 빠진 것은 없는지 봉지에 담긴 것을 종이와 맞춰 가며 다시 한번 확인했다. 아, 맞다. 누나가 그렇게 말하랬지? 하마터면 까먹을 뻔했네.

   “아줌마, 우리 누나가요, 소시지 싱싱한 걸로 달라고 하라던데요.”


   카레는 진작에 들어봤다. 텔레비전에서 광고하는 것도 여러 번 보았다. 그런데 오늘은 누나가 직접 만들어주겠단다. 이름은 ‘카레 나이스’라고 한다. 카레 나이스, 그건 과연 뭘까? 카레와는 다른 것일까? 사탕으로 볼이 불룩해진 동생 콧노래를 부르며 집 안으로 들어섰을 때, 누나는 연탄 화덕 옆에서 물을 끓이고 있었다. 틀리지 않고 잘 사 왔다며 누나가 칭찬을 했다. 동생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누나가 봉지에 든 내용물을 모두 꺼냈다. 감자와 양파, 당근은 큰 그릇에 담고 소시지는 한편에 두었다. 소시지만 먹어도 참 맛있는데. 공연히 침이 꼴깍 넘어갔다.


   그나저나 누나는 어떻게 카레를 만들 수 있게 된 것일까? 감자를 다듬는 모습을 보면서 누나는 이제 어른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밥을 짓고 반찬을 하는 것은 우리 집에서 엄마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엄마는 어른이니까 가능하다. 그런데 지금 내 앞에서 누나가 아주 능숙한 솜씨로 양파의 껍질을 벗기고 있다. 어린 내 눈에는 누나가 멋있어 보이기까지 했다. 양파 냄새 때문에 갑자기 눈이 매웠다.

   “학교에서 배운 거다.”

   중학교에 가면 ‘가정’이라는 과목이 있다고 누나가 알려 주었다. 가정 시간에는 요리를 배우는데 지난주에 익힌 것이 바로 카레 만드는 방법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듣자 나도 빨리 중학교에 가고 싶어졌다. 카레 만드는 것을 학교에서 배운다면 짜장면 만드는 법도 분명히 있을 거야. 누나가 눈치챌까 봐 웃음을 겨우 참았다.


   잘 씻은 감자와 양파를 도마에 올리고 큼직큼직하게 썰었다. 그러다가 당근 조각 하나를 집어 들더니 갑자기 내 입에 갖다 대었다. 아, 해 보란다. 아직 익히지도 않았는데 날것을 먹으라는 건가? 일단은 누나가 시키는 대로 입을 크게 벌렸다. 잠시 고개를 갸웃하던 누나가 그것을 도로 도마에 내려놓고는 한 번 더 잘랐다. 또 입을 벌려 보라고 한다. 또 아~. 그제야 누나가 이제 됐다는 듯 싱긋 웃었다.

   감자와 양파, 당근, 다음은 소시지였다. 앞선 친구들과 엇비슷한 크기로 잘랐다. 이번에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입부터 크게 벌렸다. 그걸 본 누나가 소시지 조각 하나를 내 입 속에 쏘옥 넣어 주었다. 물컹한 것이 씹혔다. 스타찡가 소시지를 먹는 느낌이었다. 돌아보니 동생도 입을 오물거리고 있었다.

   누나는 연탄불 위에 프라이팬을 올렸다. 그때 우리 집엔 가스레인지가 없었다. 시뻘건 불을 보니 겁이 살짝 났다. 절대로 불 옆에 가지 말라던 엄마의 말이 생각났다. 누나랑 있으니까 괜찮겠지.

   감자와 양파와 소시지가 한꺼번에 프라이팬 위로 부어졌다. 치치치 소리가 났다. 누나는 주걱을 들고 세 친구를 이리저리 섞었다. 그럴 때마다 조각들 몇 개가 프라이 팬에서 탈출했다. 나는 재빨리 그것을 집어 프라이 팬 안으로 던졌다. 누나가 더럽다고, 그러지 말라고 했다. 옳지, 다음에 튀어나가는 소시지는 그럼 내가 먹어버려야겠다. 하지만 그 이후로 프라이 팬을 탈출하는 소시지 놈은 하나도 없었다.

   잠시 후에는 프라이 팬을 들어내고 끓는 물이 가득한 냄비를 올렸다. 거기다 감자, 당근, 양파, 소시지를 함께 부었다. 냄비 안의 물이 퐁당 소리를 냈다. 저 놈들은 볶였다가 삶겼다가, 오늘 하루가 참 힘들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아까보다 큰 주걱으로 냄비 안을 휘젓던 누나가 이젠 카레 가루를 달라고 했다. 누나는 한 귀퉁이를 잡고 조심스레 봉지를 뜯었다. 노란 가루가 보였다. 그리고 이상한 냄새가 화악 났다. 동생은 엄마야 하며 코를 잡았다.

   “언니야, 한약 냄새가 난다.”

   코맹맹이 소리를 내는 동생의 머리를 누나가 쓰다듬었다. 물을 조금 퍼 냈다가 다시 붓기도 했다. 노란 가루도 마찬가지였다. 그때마다 가루가 공중에 날렸다.

   조심스레 냄비 안을 들여다보았다. 마치 분출하기 직전의 화산처럼 거품이 폭폭 터지고 있었다. 신기했다. 난생처음 보는 카레 끓는 모습이 신기했고, 엄마가 없는데도 요리를 척척 해내는 누나도 신기했다. 부엌 안은 어느새 한약 냄새로 가득 찼다. 처음 감자를 씻던 때로부터 얼추 한 시간은 족히 지난 것 같았다.


   “자, 다 됐다.”

   앞치마를 벗은 누나가 벽에 걸린 밥상을 내렸다. 가운데에는 여전히 거품이 폭폭 터지고 있는 카레 냄비를 놓았고, 그 주위로 사각사각 빨간 김치와 김이 모락모락 하얀 밥 세 그릇이 놓였다. 그것은 평소에 쓰는 밥그릇이 아닌 넓적한 접시였다. 누나를 거들어 밥상을 방으로 옮겼다.

   “이제 먹자.”

   동생이 먼저 한 숟가락을 떴다. 누나는 궁금한 표정으로 동생을 바라보았다. 입을 몇 번 오물거리던 동생이 웃으며 말했다.

   “언니야, 맛있다. 억수로 맛있다.”

   그제야 누나의 표정이 환해졌다. 그에 질세라 나는 누나에게 잘 보이려는 속셈에서 입을 한껏 크게 벌리고 카레가 잔뜩 올려진 숟가락을 얼른 밀어 넣었다.

   “어떻노?”

   누나가 물었다.

   “누, 누나야. 뜨, 뜨겁다. 무, 물. 물 좀, 누나야!”

   누나가 황급히 부엌으로 달려갔다. 카레가 그렇게 뜨거운 것인지 미처 몰랐다. 눈물이 찔끔 났다. 입천장이 덴 것 같았다. 하지만 기분만큼은 좋았다. 이거, 이 카레 나이스, 우리 누나가 만든 거다. 찬물을 들이키면서도 속으로는 지금 당장 명수한테 달려가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상을 치우고 설거지를 마친 다음, 누나가 다시 마루로 올라왔다. 동생이 누나 무릎 위로 옮겨 앉았다. 나는 그 옆에 나란히 무릎을 맞추었다.

   일요일 오후, 아침부터 따뜻한 목욕을 하고 점심으론 배불리 카레를 먹었더니 졸음이 금세 몰려왔다. 여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누나가 조용히 노래를 불러 주었다. 햇볕은 따스했고 구름이 그려진 하늘은 높았다. 담장 위 고양이도 다 같이 누나의 노래를 들었다.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는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그지없이 평화롭고 조용한 풍경이었다. 바다가 자장 노래를 불러주기도 전에 나는 그 아와 함께 스르륵 잠이 들고 말았다.




   그날 일기에는 낮 동안에 있었던 이야기를 썼다. 옆에서 조용히 지켜보던 누나가 한 글자를 고쳐 주었다. 나이스가 아니고 라이스라고 했다. 밥을 영어로 라이스라고 한다는 설명도 그때 처음 들었다.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맛있으면 그걸로 된 거다.

   물론 감자가 조금 덜 익어서 서걱거렸고, 동생에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소시지만 건져먹다가 누나한테 꿀밤을 맞기도 했지만 그 모든 것들이 내가 기억하는 그날의 카레의 맛이다.

   라이스가 아니라 나이스였다면 더욱 좋았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영어를 배우고 난 다음의 일이다. 사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으니, 이번 기회에 그 요리의 정확한 이름을 '카레 나이스 Nice'로 바꾼다 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다.





 Image by lovemate76 from Naver Blog 





4인 4색, 결 다른 사람들이 글쓰기 위해 모였습니다.

제대로 한번 써보자는 모의이며, 함께 생각을 나누며 어울려 살자는 시도입니다.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매거진에 글로 작당 모의할 예정이니 지켜봐 주시길 바랍니다.

자, 그럼 수작(手作) 들어갑니다~, 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