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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우 Nov 25. 2021

아무도 몰래 혼자만 보세요

< 작당모의(作黨謨議) 단열제>


   창배의 심장이 지금 이렇게 벌렁벌렁 하는 것은, 빈자리를 찾기 힘들 정도로 빽빽하게 들어찬 사람들의 뜨거운 시선 때문이 아니고, 중간중간 섞여 있는 친구 놈들의 농 섞인 놀림 때문은 더더욱 아니며, 포마드 기름을 머리에 잔뜩 바른 채 맨 앞줄에 앉아 한껏 거드름을 피우고 있는 이장里長이며 면장面長이며 군수郡守 때문은 절대 아니었다.

   그것은 오로지 바지 뒷주머니에 들어 있는 종이 쪼가리 한 장, 군민君民 노래자랑이 시작되기 직전, 무대 뒤에서 춘식이 녀석이 “성님, 연심이 년이 암두 모르게 성님헌티 살짝 주라던디요? 혼자만 보랍디다.”하며 몰래 전해준 그 종이 쪼가리 한 장 때문인 것이다.

   그동안 쏟아부은 지극정성에 연심이가 드디어 감동의 답장을 보냈구나 싶어 눈물이 날 지경이었지만 눈치 없는 춘식이 놈은 옆을 떠날 생각도 않고, 자칭 타칭 총감독인 종월 아재는 얼른 마이크 테스트부터 하라며 성화를 부려대는 통에, 이까짓 노래자랑 사회 따위는 지금 당장 복실네 똥개한테 줘버린다 한들 전혀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창배는 주머니를 다독여가며 애써 마음을 진정시켰다.


   ‘암, 내가 그러길 잘했던 거여.’

   이레 전 그믐날 밤, 동네 물레방앗간에서 한 손엔 청산가리를 든 채로, 시집오겠다 지금 당장 약속하지 않으면 콱 죽어 버리겠노라 질펀하게 을러댔던 것이 결국은 연심이 고것에게 통한 거라고 창배는 마이크를 두드리는 동안에도 내심 입 방귀를 흘렸다.


   결사決死의 언약에 대한 답장을 당장이라도 펴 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일 번 참가자로 등장한, 상서리祥瑞里 사는 종기 할매는 무슨 잡설을 그리 늘어놓는지, 사회자 양반, 사회자 양반 해대는 통에 할 수 없이 다음 출연자를 바로 불러 올려야 했고, 이번 순서만 끝나면 꼭 펴보리라 생각하던 참에 무대 위로 올라온 이는 다름 아닌 집안 큰삼촌이었던 데다가, 이제 됐다 싶던 간만의 막간에는 눈치 없는 군수마저 창배를 불러내려 사회 잘 본다며 거금 만 원을 ‘티부’로 주기까지 하는 바람에 주머니 속 종이는 하릴없이 엉덩이 땀에 축축이 젖어들고 있었다.

   그러던 중 마침 다음 차례는 배밭골 진복이었고, 이 놈은 바로 연심이를 사이에 두고 죽기 살기로 경쟁하는 연적戀敵이었던 까닭에, 마음 같아서는 마이크 쥔 손에 전기라도 흘려보내 지난달 장사 치른 제 외할아버지를 따라가게 해 버리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는 일, 오히려 더 잘되었다 싶은 것이 네 놈이 무대에서 신나게 꼴값을 떠는 동안, 나는 보란 듯 연심이가 보낸 사랑의 맹서盟誓를 읽을 테다, 굳게 다짐하는 창배였다.

   잔뜩 긴장한 채로 엉거주춤 서 있다가 마침내 개다리 춤을 슬슬 시작하는 진복이의 뒷모습을 보며 창배는 드디어 편지를 꺼냈고 숨을 크게 들이마신 뒤 그것을 천천히 펼쳤는데, 거기에는 꿈에도 사모하는 연심이가 조막만 한 두 손을 연분홍 빛 가득한 입술 근처에 대고 종달새처럼 조잘거리고 있었다.  


   ‘창배 오빠, 우리 작은 아부지가 창부 타령을 부를 것인디 쪼매난 상이라도 한 개 받을 수 있도록 사회 보는 오빠가 힘 좀 써 줘유.'


   이게 무슨, 갑자기 귀밑으로 찬바람이 쌩 부는가 싶더니 어디선가 땡, 하는 소리가 크게 들렸는데 그것은 아마도 진복이와 창배 두 놈 모두 들으라는 것임이 분명했다. [끝]



단열제는 작당모의 매거진에서 준비한, '단 열 문장으로 소설을 쓰는 문학제'를 말합니다.



Image by Atlantios from Pixabay



4인 4색, 결 다른 사람들이 글쓰기 위해 모였습니다.

제대로 한번 써보자는 모의이며, 함께 생각을 나누며 어울려 살자는 시도입니다.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매거진에 글로 작당 모의할 예정이니 지켜봐 주시길 바랍니다.

자, 그럼 수작(手作) 들어갑니다~, 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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