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당모의(作黨謨議) 9차 문제(文題) : 무조건 이어 쓰기 >
1편에 이어지는 글입니다.
"점순이는. 점순이 고년이 가만있지는 않을 텐데."
소녀의 터무니없는 말에 잠시 놓았던 정신을 추스른 소년은 점순이를 가장 먼저 떠올렸다. ‘점순이는 어찌해야 하나.’ 소년네 수탉 모가지를 사정없이 쪼아대던, 대강이가 큰 점순네 수탉을 소년이 단매로 때려 엎은 이후, 점순이는 틈만 나면 소년을 동백꽃밭으로 불러냈었다.
"니. 안 나오면 우리 수탉 죽인 거 다 일러버린다."
마름집 딸인 점순이의 말을 소년은 가볍게 여길 수가 없었다. 그랬다가는 소작을 하는 땅도 떨어지고, 집도 내쫓긴다. 소년은 그런 점순이가 무섭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싫으면서 억지로 동백꽃밭을 찾은 건 아니었다. 죽은 수탉을 볼모로 잡혀 점순이에게 떠 밀리고는 노란 동백꽃 속에 파묻힌 채 온 정신이 아찔했던 그날의 기억이 소년을 제 발로 점순이가 기다리는 동백꽃밭으로 향하게도 하였다.
소나기가 내렸던 그날 이후로 소년은 점순이의 얼굴을 차마 볼 수가 없었다. 소나기가 긋기를 기다리며 소녀와 살을 맞대고 앉았던 좁은 원두막만 떠올리면 얼굴이 벌게지고 가슴이 세차게 뛰었는데, 눈치 빠른 점순이가 그걸 못 보고 지나칠 리가 없었다. 소년은 점순이네 집을 거치지 않고 삥 돌아가는 먼 길을 골라 다녔다. 윤초시네 증손녀가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소년은 가슴이 아리고 눈물이 그렁그렁 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이제 더 이상 점순네 집을 괜히 돌아 피하지 않아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소녀를 만나면서도 내내 마음을 어지럽히던 소작하는 땅도, 집도 이제는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심도 들었다.
‘그 아이 분 내음새에 홀려 내가 잠시 정신이 나갔었지만은 이제 되었다. 이제 되었다.’
윤초시네 증손녀와의 기억은 마음에 한바탕 내린 소나기로 여기기로 했었다. 소녀와 함께 갔던 산 너머를 마지막으로 한번 둘러보고는 동백꽃밭에 점순이를 보러 가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집문서라니, 둘이 같이 서울로 가자니.
점순이는 서울서 왔다는 윤초시네 증손녀가 처음엔 안쓰러웠다. 희멀건한 얼굴이 힘이라고는 전혀 쓸 수 없게 생겼고, 매가리 없이 비실비실한 게 소년네의 덩저리 작은 수탉을 보는 듯했다. 친구도 없이 맨날 혼자서만 다니는 모습이 딱해 먼저 아는 체도 해보고, 나물 캐다 새참으로 먹으려고 행주치마 속에 챙겼던 굵은 감자 한 알을 건네도 보았지만, 소녀는 힐끗 한번 쳐다보고는 ‘난 감자 안 먹는다. 너나 먹어라.’ 하고선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서울 가시나라서 그러나. 왜 저리도 싸늘하니."
하루는 볕살이 좋아 광주리에 빨래를 담아가지고 개울로 나오는데 윤초시네 증손녀가 개울 건너편 가에 앉아있는 게 보였다. 점순이는 저만치 보이는 개울 기슭에 자리를 잡고선 가지고 온 빨래는 하는 둥 마는 둥 소녀를 지켜보았다. 뭐 한다고 저러고 있나 싶은데 마침 아랫마을 칠복이 놈이 동리에서 개울가 쪽으로 걸어오는 게 보였다. 칠복이를 윤초시네 증손녀도 보았는지 황급히 징검다리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앉아서는 짐짓 딴청을 부렸다. 그런 소녀를 뒤늦게서야 본 칠복이가 징검다리를 건너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윤초시네 증손녀는 칠복이를 쳐다도 보지 않은 채 하얀 조약돌을 집어 칠복이 쪽으로 던졌다.
"이 바보."
칠복이는 소녀가 하는 말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는, 개울 윗길로 돌아가기라 마음을 먹었는지 지체 없이 개울 둑을 올랐다. 칠복이의 마음이 진작에 건넛마을 최진사댁의 딸 중에서 가장 이쁘다는 셋째 딸에 가 있다는 걸, 이 마을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윤초시네 증손녀가 알 리 없었다. 소녀는 멀어져 가는 칠복이의 뒷모습을 뚱하니 바라보다가 개울물에 침을 카악 한번 뱉고는 갈밭 사잇길로 들어가 갈꽃 한 옴큼을 꺾었다.
"저. 저. 잔망스러운 계집애."
점순이는 요 며칠 애가 달아 있었다. 근래 통 소년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달포 전, 한창 피어 퍼드러진 노란 동백꽃밭으로 불러내 소년을 본 게 마지막이었다. 동리 어른들 눈을 피해 소년의 집 앞을 기웃거리기도 했지만 소년은 그림자도 통 보이지가 않았다. 휑한 마당에는 쌈질도 못하는 비실비실한 수탉만 햇볕에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이 바보 같은 놈이 도대체 어디를 싸 돌아다니는 거니."
동리 한가운데 키 큰 은행나무 그늘 아래에서 채마밭에서 따온 열무를 솎고 있던 동네 아낙들의 수다 사이로 개울가 징검다리에서 소년이 윤초시네 증손녀와 함께 있더라는 말을 들은 점순이의 눈이 샐쭉하니 치올라갔다. 이놈이 얼굴이 희멀건하기만 한 잔망스러운 서울 계집애에게 홀라당 맘을 빼앗기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었다. 바느질거리를 해 놓아야 저녁밥을 먹을 거라는 엄니의 엄명이 있었지만 지금 점순이에게 그깟 저녁밥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헐레벌떡 뛰어 닿은 징검다리에는 아무도 보이지가 않았다. 이놈을 오늘은 꼭 보아야겠다며 한 시간이나 넘게 징검다리를 지켰지만, 갑작스레 내리는 소나기에 점순이는 애써 분을 삭이며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윤초시네 증손녀가 소나기가 내렸던 날 이후로 여러 날을 앓다가 결국은 죽고 말았다는 소식을 점순이도 들었다. 순진한 바보 놈이 서울 계집애에게 홀려 자기를 슬슬 피하고 있다는 걸 점순이도 뒤늦게나마 눈치를 채고는 ‘그 망할 년.’ 하며 욕을 한 바가지나 했던 게 괜스레 미안했다. 그 잔망스러운 계집애가 아랫마을 칠복이에게 조약돌을 던졌던 개울가 징검다리로 가서 갈꽃이라도 한 옴큼 꺾어 흘려보내며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고, 내가 그리 험한 욕을 했던 게 그 바보 놈 때문이지 니가 진정 미워서는 아니었다고 말해 주어야 맘이 편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나서 동백꽃밭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소년이 제 스스로 찾아올 거고, 그러면 다시 소년과 예전처럼 지내게 될 거라고 기대했다.
갈꽃을 꺾어 개울가로 들어서는데 저 멀리 징검다리 한가운데에 죽었다던 윤초시네 증손녀와 소년이 있는 게 보였다. 그 광경에 놀란 점순이의 가슴이 벌렁벌렁 뛰기 시작했다. 소녀는 직접 쓴 편지처럼 보이는 종이 한 뭉치를 새초롬하게 건네며 소년을 지긋이 바라보았고, 소년은 마치 사랑 고백이라도 받은 양 넋이 나가 있었다. ‘아니 저것들이 지금 뭐 하고 있는 거냐.’ 가무잡잡한 점순이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새빨개졌다. 점순이는 들고 있던 갈꽃을 바닥에 내팽개쳐버리고는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야. 이 잡것들아! 니네 오늘 내한테 다 죽었다!"
[3부에 계속됩니다.]
‘작당모의’ 매거진의 이번 주제는 ‘무조건 이어쓰기’입니다.
1부는 진우 작가님, 2부는 제가 맡았고, 3부 김소운 작가님, 4부 진샤 작가님의 순서로 한 편의 짧은 소설을 씁니다. 제 글 뒤로 이야기를 이어가 주실 김소운 작가님, 진샤 작가님은 오늘 이 글이 발행되는 순간까지 어떤 내용으로 이야기가 펼쳐지는지 모르십니다. 제가 이 글을 발행하면 그제야 글을 읽고 내용을 구상하고 이야기를 이어 나가시겠지요. 저 역시 진우 작가님의 첫 번째 글이 발행되고 나서야 내용을 확인하고 두 번째 이야기를 이었습니다.
3부는 11월 7일 일요일에 김소운 작가님의 글로 발행됩니다.
* Image by Little Big Pictures
4인 4색, 결 다른 사람들이 글쓰기 위해 모였습니다.
제대로 한번 써보자는 모의이며, 함께 생각을 나누며 어울려 살자는 시도입니다.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매거진에 글로 작당 모의할 예정이니 지켜봐 주시길 바랍니다.
자, 그럼 수작(手作) 들어갑니다~, 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