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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샤 Dec 10. 2021

산즉택, 택즉산

San is Taek, Taek is san 



"너 오늘 착한 일 했어? 착한 일 뭐 했어? 착한 일이나 하고 선물 이야기를 해!"



  결국은 터졌다. 입만 열면 팝잇 열쇠고리와 팝잇 가방과 말랑이 크리스마스 선물을 해대는 통에, 그래서 귀에서 피가 나올 것 같은 기분이 든 지 딱 두 시간 만에 엄마는 폭발해버린 것이다. 


  요즘 7살 첫째딸의 최대 관심사는 크리스마스 선물이다. 어제도 선물 얘기만 해서 엄마한테 살짝 혼나고 잠들었는데, 아침에도 눈 뜨자마자 '몇 밤 자면 크리스마스예요?'로 시작한 것이다. 하아, 크리스마스 없애주세요. 아이에게는 이십도 큰 숫자여서 '이십 밤'이라고 말해주면, 엄마가 미워지고야 만다. 어제도 이십 밤이라고 했잖아요. ㅇㅇ아, 며칠 전에는 삼십밤이었잖아? 이십 밤이 된 게 어디야, 빨리 일어나, 옷 갈아입어, 유치원 가야지. 열다섯 밤이라고 솔직하게 얘기해줬다간, 그 팝 잇 인지 말랑인지 그 징글징글 질겅질겅 물렁물렁한 것들에 질식할 것 같아서 최대한 늦춰야 한다. 

  그렇다, 이 모든 게 나 아니 내 주둥이와 손가락의 잘못이다. 일주일 전 내 주둥이, 내 손가락, 그렇게 하지만 않았더라도 아름다운 연말을 보낼 수 있었어. 





  나의 생일날, 생일 케이크 후 하고 나니 아이가 '엄마, 생일 축하해요, 선물!'이라며 건네주었다. 

 


  아이, 기뻐라, 아이, 기뻐라, 아이, 기뻐라. 세 번 정도의 세뇌 타임을 가진 후 아이에게 말했다.

  "정말 고마워. 엄마 너무 기뻐. 그런데 엄마 다음엔 종이 말고 딱딱한 '석물' 받고 싶어. ㅇㅇ이 '선물'을 '석물'이라고 쓴 거는 엄마 다음에 보석 석물 주려고 그런 거겠지?"

  옆에서 아빠가 '으이그, 저 속물'이라는 표정으로 보는 것 같았다. 

  "엄마, 엄마는 보석받고 싶구나. 나는 생일 선물로 말랑이 받고 싶은데!"

  "그래? ㅇㅇ이 생일 전에 크리스마스랑 어린이날도 있는데?"

  그렇다. 나는 뇌가 참으로 깨끗한 엄마다. 뇌가 깨끗하면 입이라도 세속적이어야 하는데, 입도 어찌나 순수한지. 나의 표백한 뇌와 입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그래요? 그러면 먼저 크리스마스 선물. 크리스마스 선물은 팝잇 열쇠고리. 가율이가 하고 다니는 딸기 팝 잇이랑 개구리 팝잇, 산타 팝잇, 키티 팝잇, 오징어 게임 팝잇, 어몽 어스 팝잇, 또 파인애플, 이건 팝잇가방이어야 돼요. 그리고 말랑이. 말랑이는 입에서 불이 나오는 드래건 말랑이랑..."


팝잇이라는 신문물을 아직 접하지 못하신 분들을 위해. 출처, 만수르 베베


  "ㅇㅇ아, 자, 여기서 골라."


  기억할 자신도 없고 기억할 마음도 없는 나는 센스 바닥 치는 엄마답게 '쿠ㅍ'앱을 들이민 것이다. 왼쪽 하단의 '검색'을 자랑스럽게 누르고 '팝잇 가방고리'라고 쳤다. '어떤 거 하고 싶은지 말해'하고는 괜히 가슴을 폈다. 우아아아아, 신이 난 첫째 딸은 이거, 이거, 그리고 또 이거랑 이거, 하다가 갑자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엄마, 하고 불렀다.


"그런데 크리스마스 선물인데 왜 택배에서 골라요?"


  망치 정도 갖고는 택도 없다. 거인용으로 쓰이는, 3t 이상의 해머가 오른쪽 뒤통수 어디쯤을 씨게 때렸다. 그러나 나는 축지법까지 하는 엄마다, 당황해서는 안 된다. 한 박자 쉬고 두 박자 마저 쉬고

  "산타 할아버지가 너무너무너무너무 바빠서 우리 집까지 못 올 수도 있대. 그래서 이렇게 택배로 해두면, 산타할아버지가 못 오게 되면 대신 택배 아저씨라도 보내려는 거야. 이렇게만 고르면 되겠어?"

  아, 그렇구나, 하고 다시 고르기에 집중하는 딸아이의 정수리를 보며 꽤 괜찮은 대답이라고 생각했다. 하긴, 내가 어렸을 때부터, 그 훠얼씬 이전부터 전지구를 상대로 활동하신 산타할아버지시니 이제 진짜 연세도 드실 만큼 드셨고, 그 연세에 같이 나이 먹는 코 빨간 노루(이름이 갑자기 기억이 안 난다, 노루가 맞긴 한가... 고라니인가) 데리고 다니려니 힘에 부치실 만도 하실 게다. 아무리 한철이라도 해도 하룻밤에 지구를 다 도는 건 너무 무리이다 싶어지는 거다. 우리 집만이라도 안 들르시면 좀 덜 힘드시겠지, 하는 생각에 괜스레 뿌듯해졌다. 






  어린 시절,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아본 적은, 적어도 내 기억엔 단 한 번도 없다. 화이트 크리스마스 같은 건 일도 아니다 싶을 정도로 눈이 많이 오는 마을에서 자라서 늘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기분이었지만, 그렇다고 12월 25일이 특별한 날이었던 적은 없었다. 교회를 나가지 않는 집에서 자라서, 나는 크리스마스 선물 같은 것은 나와는 관계없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것이, 어린 속을 편하게 해주는 생각임을 나는 일찍이 알게 되었다. 

  그렇다고 산타의 존재를 믿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어렸을 때 '나 홀로 집에'를 보며, 크리스마스트리 밑에 쌓인 선물박스를 보며 '산타는 미국에 있는 집만 가나 보다'라고 생각했었다. 그렇게 3,4년을 생각하다가 어느 순간 알게 되었다. 산타가 우리 집에 오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예 없는 것이라고. 그래서 크리스마스 선물은 나와는 관계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속 편한 것임을 알게 된 것이다. 

  속 편한 것과 부러운 감정은 다른 것이었다, 아니 오히려 반대의 것이었다. 속이 편한 만큼 더 부럽고 더 속상했다. 봄방학 때 친구들을 만나면 새 잠바나 새 노트나 새 필통을 가져왔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거야. '봄'방학과 '크리스마스' 선물의 거리는 참 멀었지만, 그 시간을 무참히 밟고 내 눈앞에 도착한 친구의 선물들은 신선도를 잃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내가 내 안에서 '나와 관계없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들이 실은 '나와 전혀 무관할 수는 없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알게 된다 해도 어찌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부러움은 며칠 가지 못한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인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첫 임신의 크리스마스에 다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나의 아이가 '산타의 진짜 존재'에 대해 알게 될 때까지 크리스마스 선물을 해줄 것, 그리고 그 선물은 반드시 무얼 받고 싶은지 물어볼 것. 내 아이의 유년에, 수염이 하얀 산타든 까만 산타든 선글라스를 낀 산타든 피부가 까맣게 탄 산타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산타가 가득가득 선물을 싣고 왔으면 좋겠다. 아이가 진짜 산타를 알게 되었다 해도, 선물과 선물 속에 담긴 마음에 대해서는 알록달록하게 기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내 배를 톡톡 두드리는 아이에게 단단한 다짐을 불어넣었던 것이다. 

  다짐의 후자는 다행히 잘 지켜지고 있는데, 산타의 진짜 존재에 대해 이 못난 애미가 자꾸만 슬금슬금 금을 가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나는 믿는 구석이 있어서 한편으론 든든하기도 하다. 언젠가 아이가 '엄마, 아빠가 산타예요?'라든가 '산타 할아버지가 택배 아저씨예요?'라는 물음을 던질 때, 당당한 표정으로 들이밀 것이 있는 것이다.


북미 우주 방위사령부(NORAD) 홈페이지. 본인 캡춰


  이거 보이지, 산타할아버지가 이렇게 돌아다니고 있잖아. 이 집에 아이가 얼마나 착한 일 했나, 이 집에는 선물을 몇 개를 준비해야 하나. 이렇게나 열심히 일하시고 계시잖아. 그 친구 데리고 와, 엄마가 산타 어디 있는지 보여줄 테니! 


[취재파일] 美 북미 우주 방위사령부(NORAD)는 왜 산타를 추적할까? | SBS 뉴스


63년 전통의 산타 추적 작전은 한 통의 전화에서 시작됐습니다. 1955년 11월 마지막 날 콜로라도 스프링스 방공사령부(CONAD)의 핫라인에 전화가 울렸습니다. 곧바로 사령부 센터에는 긴장감이 흘렀습니다. 당시 냉전이 한창이었고 소련 전투기는 수시로 미국 알래스카 공군기지에 출몰했기 때문에 미 공군의 해리 숍(Harry Shoup) 대령은 핫라인의 전화가 울린다는 것은 좋은 소식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대통령이나 4성 장군이 핵공격을 경고하는 전화일 수 있어서, 숍 대령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 펜타곤 직통 전화를 받았습니다.
“네, 대령 숍입니다.”
그는 경직된 군대 억양으로 답했습니다. 하지만 수화기에는 답이 없었고 그는 다시 “네, 대령 숍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침묵이 흘렀고 “제 말이 들리십니까?” 재차 물었습니다. 그러자 뜻밖에도 가녀린 아이의 목소리가 수화기에서 나왔습니다.
 
"정말 산타 할아버지세요?"
 
숍 대령은 즉각 어두침침한 사령부 센터를 둘러봤습니다. 누가 장난을 치나? 언뜻 생각이 들었지만 미국 방위의 심장부인 이곳은 결코 장난을 칠 장소는 아니었습니다. 대령은 침착하게 물었습니다. "다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그러자 수화기 건너편에서 겁먹은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고 그는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어떤 오류로 최고 기밀의 핫라인에 전화가 연결됐다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당시 38살로 네 아이의 아빠인 그는 산타가 아니라고 답하기보다는 산타 할아버지와 같이 일을 한다며 아이에게 크리스마스에 원하는 선물을 물었습니다. 산타 광고 이후 전화를 넘겨받은 아이 엄마는 당시 콜로라도 스프링스 지역신문에 난 시어스 백화점 광고를 보고 아이가 전화를 했다고 말했습니다. 이 광고에는 산타 그림과 함께 산타 전화번호를 알려주고 언제라도 전화를 환영한다는 문구가 적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화번호에 실수가 있었습니다. 전화번호 중 한 자리가 잘못 인쇄됐고 이 번호는 최고 기밀의 콜로라도 스프링스 방공사령부 핫라인 번호였던 것입니다.

(중략)

이에 따라 사령부(CONAD)는 보도자료를 내고 크리스마스이브에 착한 아이들에게 북극에서 출발한 산타의 썰매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려주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이에 따라 1955년 12월 24일부터 공식적으로 산타 추적 작전이 시작됐습니다. 당시 사령부가 발표한 첫 보고는 산타가 1만 미터 상공에서 시속 45노트(83km)로 이동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중략) 다른 언론들도 앞다퉈 보도했고 산타 추적 작전은 매년 규모가 커지고 발전했습니다. 이후 숍 대령은 산타 대령으로 불렸습니다. 1958년 미국과 캐나다가 핵 방위를 협력하면서 산타 추적 작전은 콜로라도 스프링스 방공사령부(CONAD)에서 북미 우주 방위사령부(NORAD)로 이관됐지만 이 프로그램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2017년부터는 북미 우주 방위사령부(NORAD)의 웹 페이지에서 8개 언어로 산타 위치 서비스를 하고 있습니다. 산타 추적 서비스는 크리스마스이브인 미국 동부시간 24일 오전 6시(한국 시간 오후 8시)부터 시작되며 전화 1-877-HI-NORAD나 이메일 noradtrackssanta@outlook.com으로도 산타의 위치를 알 수 있습니다.
숍 대령은 2009년 사망했지만 대령의 딸 밴 커렌이 아버지를 이어서 산타를 기다리는 아이들의 전화를 받고 있습니다.
<기사 내용 정리>   



매년 수고가 많으십니다. 산타 조수 아니 군인 아저씨. 사진 출처, 동아일보 

 

  아이는 벌써 크리스마스와 어린이날과 생일과 8살 크리스마스까지 선물 목록을 만들어두었다. (하아....) 그런 아이를 보며, 아이 안에 산타할아버지가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아있게 해달라고 빌게 된다. 그리고 그 옆에서 아직 자고 있는 둘째와 셋째를 보며, 나 또한 엄마로서 산타할아버지께 바라게 되는 것이다.

  "산타 할아버지. 전 선물 필요 없고 돈으로 주세요. 아이들 선물 사야 되는데 이번 달 마이너스가... 아무래도 연말이라.... 캐시 플리즈.."



  글을 마무리하려 보니, 아무래도 며칠 전에 첫째가 한 말이 마음에 걸림을 고백해야겠다. 잠들기 전에 '엄마, 하선이가 그러던데, 산타 할아버지가 사실 택배 아저씨래요'라고 하는 딸아이 말에 잠에 취해 대애충 대답한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게, 걔는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

  제발 잠꼬대여야 할 텐데. 아이에게 물어볼 수도 없고 답답한 마음이다. 






산타할아버지가 택배 아저씨요, 택배 아저씨가 산타 할아버지인 것은 

이 글 읽은 사람들은 다들 눈치껏 다 비밀로 해줄 거야. 그러니 너는 그저 너의 산타를 기다리렴. 일곱 살 네가 할 일은 그것뿐이란다. 

이렇게 구멍 숭숭 난 어설픈 엄마를 엄마로 둔 너희가 불쌍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지구에서 너희를 사랑하는 마음은 가장 큰 사람이라는 것 하나만큼은 진짜니까 믿어줬으면 좋겠구나. 우리 같이 기쁨 소복한 마음으로 크리스마스를 기다리자. 너는 너의 팝잇과 말랑이를, 나는 웃음 가득한 너의 얼굴을, 창 밖에는 새하얀 풍경 가득한 축복의 그날을. 


자기가 하는 착한 일(엄마아빠를 칭찬해 준 일)에 대해 엄마아빠가 고마우면 편지 쓰라고. 그렇다고 딸아, 반말은 너무한 거 아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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