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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샤 Jan 26. 2022

한 번 혹은 두 번의 마음



  '마음'이라는 단어를 글 쓸 때 자주 쓴다. 내 마음이 어땠다, 라는 말을 써야 말 그대로 내 마음에 대해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으니까. 그렇게 마음을 남발하면서 어느 순간부터 '마음'이라는 단어를 마음에 들지 않게 느끼기 시작했다.

  '마음', '마음' 하다 보니 마음이 뭔지 잘 모르겠어서이다. 마음이 뭐지. 일단, 마음이 어디 있는 거지. 일차원적으론 심장을 떠올리게 되지만 또는 심장을 가리키게 되지만, 마음이 심장이 아님을 과학이 증명해낸지는 오래되었다. 굳이 따지자면 머리 또는 뇌이다. 호르몬의 작용 또는 수치 또는 효과인 것인데, 그렇게 치기엔 마음이 초라하게 느껴지고 안타깝게 여겨진다. 작용, 수치, 효과라기엔, 나는 마음에 너무 치이며 살고 있으니까.(불교에서는 의식의 소생, 흐름으로 마음心을 표현하는데, 거기까지 가기엔 마음에 내키지 않는다.)

  어쨌든 마음이라는 단어가 싫어서 나름 대체어를 찾아 쓰곤 했다. 기분이라든가, '신경이 쓰였다'라던가, 느껴졌다라던가, 감각이 어떻고 저떻고, 받아들인다, 내밀었다, 표정이 어쩌고 저쩌고, 같은. 그러나 그런 단어들도 대부분 일회적이었다. '마음'이라는 단어가 가장 적절하게 쓰였다, 적어도 내가 쓰려는 문장들에서는.

  그러나 '마음'이라는 단어를 쓰려 보니 글이 너무 쉬워져서 그게 또 싫었다. 마음이 바스락거렸다, 마음에 금이 갔다, 마음이 오그라들었다, 마음에서 탄내가 났다, 부풀어 오른 마음이 내 밖으로 나오는 듯했다, 마음이 따스해졌다, 마음을 놓고 왔다 기타 등등, 얼마나 쉬운가. 마음에 오감의 동사를 붙이기만 하면 웬만해서는 그럴듯한 문장이 되는 것이다. 이게 싫은 거다. 쉬운 글, 쉽게 쓰이는 글. 이게 또 얼마나 괜찮게 읽히는지 그것조차 가소롭다. '읽는 이들이 내가 얼마나 쉽게 썼는지 아는지 모르는지,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지는 아는지'까지 생각하고 나면 글이고 뭐고 쓰레기통을 비우는 게 백 배 나은 일이다. 집 쓰레기통, 머리 속 쓰레기통 모두 다.


  근래 단편 소설을 몇 편 읽으면서 (정말 아주) 조금 알게 되었다. 그건 글의 속성이자 지향과도 같은 거였다. 수필이나 에세이, 하다 못해 일기라도 쓸 작정이면 '마음'을 건드리거나 노출하는 것을 (누구에게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쉽게 허락받는 듯하다(라고 느낀다). 그러나 소설에서는 '마음'을 함부로 거들먹거리면 안 된다. 그걸 드러내려면 주변의 것들, 창 밖의 나무가 유난히 흔들린다거나 라면을 끓이려고 올려두었다 깜빡한 냄비나 쇼핑 앱에서 결제를 기다리는 최신 가방을 오늘 갑자기 결제해 버렸다거나 생리통이 시작되면서 함께 온 요통이 얼마나 극심한지, 그런 것들을 건드려야지 '마음'이라고 썼다간 졸작이 되어버리고 만다. 이것이 바로 '마음'이라는 단어를 못마땅해하게 된 이유였다.


  그렇다고 마음을 못 쓸 건 없었다. (찾아보진 않았지만) 헌법 어디에도 '글을 쓸 때 마음을 썼다간 징역 몇 년 이하' 이런 조항이 당연히 없을 것이고, 그 어떤 작가도 대놓고 '마음을 글에 쓰는 맹충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정말 솔직한 글을 쓰고자 한다면 '내 마음이 이래서'라는 글을 써야 할 것이다. 문학적 문장이나 수사를, 멋을 신경 쓰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것이 더 담백하고 좋은 글 것이다. 꾸미려 들거나 어떤 의미를 구겨 넣으려 한다면 오히려 더 찝찝해지고야 만다. 마치 맛을 좀 괜찮게 해 보려 조미료를 넣었다가 오히려 '조미료 맛만 난다'는 소리를 듣게 되는 것처럼.     

  여기까지 오게 되면, 혼자 쓸데없는 고민에 심각해지고야 만다. 글에 어느 정도의 마음을 넣어야 괜찮은 걸까. 마음의 범람도 싫고 그렇다고 꼭꼭 숨기기엔 '내가 왜?' 이런 중2 같은(요즘 첫아이를 보면 '이런 팔살 같은'이라고 표현하고 싶어진다) 반항심이 생긴다. 이런 고민할 바에 애들 저녁이나 차리자 싶다가도, 글을 쓴다면 다들 이런 고민은 한 번쯤 하지 않을까, 하면서 괜스레 큰 화두를 잡고 깨달음 직전에 놓인 스님인양 생각하다가 혼자 피식하고 현타를 맞게 된다.


  그럼에도 나는 글을 읽다 '마음'을 발견하면 일단 반갑다. 내가 그런 사람이니까. 여기서부터 다시 모순이 시작된다. 글에서 마음을 발견하는 건 좋은데, 자꾸 보게 되면 그때부턴 별로라고 느끼게 된다. 이렇게나 단어 선택에 있어 빈곤해서야, 쯧쯔. 특히 남성 작가들의 글을 읽을 때 더욱 그렇다.

  나에게는 이상한 습성이 있다. 남성 작가가 한두 번 '마음'을 보이면 꽤나 괜찮은 작가라고 받아들인다. 남자가 마음이라니, 이렇게나 감성적이고 낭만적이라니. 그러나, 여성 작가들이 상대적으로 섬세하고 감정에 예민해서(일반적으로) '마음'을 자주 드러내도 그러려니 한다 해도, 남성 작가가 마음을 자주 내보이면 여지없이 실망한다. '마음'을 쓰고 세 번째 줄 아래에서 다시 마음을 운운하고 네다섯번을 더 '마음' 어쩌구 하다가 '마음이 찬란히 부서지는'이라고 마무리하면 좁혀진 미간을 펴지 못한 채 일어나 건조기로 향하고 마는 것이다. 건조기 안에서 손길을 기다리는 그들을 구원할 겸 심하게 촉촉해져서 축축해져버린 내 마음도 건조하기 위해서다. 남자가 이리도 헤퍼서야, 한숨을 마구 쉬면서. 모순이 나를 보면 '아이고 모순계의 황제폐하 납시셨소' 할 판이다.


  글에 표현되는 마음에 대한 마음의 부침 중에 며칠 전 남성 작가의 수필 한 편을 필사했다. 필사를 다 하고 다시 읽다 '어?' 하면서 놀랐다. 두 번을 읽고 필사를 한 번 하면서까지 발견하지 못한 '마음'을 본 것이다. 마음이 그렇게 한 번 숨어있었 아니 숨지 않고 당당히 있었는데 내가 보지 못했다. '마음 한쪽이 아려왔다'*. 신기해서 다시 읽어 보니 사실 '마음'은 두 번 표기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고  실망조차 하지 않았다.  

  글에 실망하지 않은 나는 그제야 나 스스로에게 실망하게 되었다. 좋은 글이란 '마음'이 몇 번 들어가고 아니고 와는 상관이 없는 글이었다. 글이 품으려는 '마음' 자체가 좋으면 될 것을, 자꾸 글의 종류와 문장의 표현 이런 것들 파고들려니 단어가 어쩌고 몇 번 쓰였고 하면서 혼자 쑈를 벌이게 된다.

  실은 우리는 '마음' 때문에 글을 쓰고 있는 것이었음을, 맨 처음 글을 쓰기 시작한 나를 떠올리며 깨닫게 되었다. 마음이 힘들어서, 마음을 덜어내려, 마음을 꺼내 말리려고 글을 썼다. 그래서 글은 어찌할 수 없이 마음을 실어야 한다. 그 마음을 글에 직접 드러내느냐 꽁꽁 감추느냐는 글 쓰는 이의 마음인데, 나는 그걸 알량하게 재단하고 실망했느니 별로라느니 글을 쓴 지 얼마 안 됐다느니 그러면서 고깝게 보고 있었다.

  당장 이 글만 해도 그렇다, 도대체 마음이란 단어가 몇 번이나 쓰인 건지. 근래의 나의 눈으로 보았다면, 최악의 수준으로 저질스러운 글이다. 그럼에도 쓰고 내놓는 건 내 마음이 그렇게 하라고 해서 쓰고 꺼낼 뿐이다. 쓰지 않으면 마음이 꼬깃꼬깃해질 것이 분명하기에.


  그래서, 마음을 바꿔먹기로 했다. 글을 읽다 마음을 자주 발견하게 되면 미간이 찌그러지는 건 내가 아니라 내 미간이 그러는 거라고, 마음의 발견을 미워하지 말자고. 마치 나의 첫째가 수학하기 싫어지면 '엄마, 나는 공부하고 싶은데 내 머리가 자꾸 집중을 안 해'라고 해서 그 순간은 엄마를 화딱지의 여신으로 만들지만, 딸아이 자체가 미운 건 아닌 것처럼.

  글은 마음이 시켜서 쓰는 것이란 사실을 바탕에 두고, 그 마음이 문장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만 집중하려 한다. 물론 글에서 마음이란 단어가 한 번 혹은 두 번만 나오면 깔끔할 거 같다. 안 나와도 좋을 거 같다. 그러나 진정한 마음을 드러내기 위해 애쓴 글들은 그 자체로 좋다. 결국 글은, 심장이든 머리든 뇌든 호르몬의 작용, 수치, 효과이든 '문자로 나열된 마음' 그 자체이니까.





*최형만 <당신의 생명은 동쪽으로 흐른다> 中

 





두 번도 필요치 않고, 딱 한 번의 마음만으로 이웃에게 따뜻함을 전할 수 있습니다. 저는 직접적인 도움을 드리지 못하지만, 지정수혈 가능하신 분들의 '한 번의 마음'을 애타게 기다리시는 분께 다리가 될 수 있다면 저 또한 큰 기쁨이 될 듯 합니다. 이 작은 글이 결심과 행동으로 옮겨질 수 있기를 바라며, 생명을 살리는 일에 동참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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