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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샤 Apr 15. 2022

피, 땀, 눈물,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집, 안일_주방: 칼질


  햇수로 결혼 10년 차다. 이 정도면 시효(時效)가 다 되지 않았을까. 그러니까 '십 년 정도 살아서 하는 말인데... 이제는 말할 수 있다' 하며 남편에게 말할 수 있을 만한, 그런 비밀이 있는 것이다, 내게는. 남편에게 말 못 하고 남편에게 먹인 '그것'에 대해.





  하늘이 내린 왼손잡이다. 왼손으론 남자도 팔씨름 이겨먹지만 오른손으로는 500CC 맥주잔 하나 제대로 들 수 없다. 극강의 불균형 손 덕분에(?!) 어렸을 때부터 손으로 하는 건 다 못했다.(곰손이라는 핑계를 이렇게 대고 있는 중이다) 엄마 아빠는 이런 나를 억지로 고치려 들지 않았다. 오히려 할머니께서 '왼뱅이가'라며 훈수를 시작하려 하시면 아빠가 '그냥 두시오, 저렇게 태어난 거니' 라며 말리는 지경이었다. 그래서 나는 은연중에 내가 왼손잡이인 것이 전혀 문제되지 않으며 때로는 '자랑스럽게(?!)' 여기며 자랄 수 있었다. 


  내가 왼손잡이인 것을 외부적 자극으로 의식해야 하는 때가 있었는데, 칼이나 가위를 잡아야 할 때였다. 대부분 가위는 오른손잡이 용이다. 나는 처음부터 그러려니 했었어서 별 상관이 없었는데, 미술이나 가정 시간에 가위를 잡을 때마다 친구들이 '불편하겠다'라고 해서 그제야 '이런 게 불편한 일이구나' 싶었다. 

  요리 실습시간은 더 했다. 내가 왼손으로 칼을 드는 것 자체를 친구들은 불안해했다. 넌 이거 해, 라며 다른 일을 부탁했고 나는 순순히 따랐다. 이건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엄마는 평생 나에게 요리를 시키지 못했다. 내가 왼손으로 칼만 잡아도 '됐다, 저 손으로 어예하노, 내가 할게 잘 봐' 하시고는 현란한 썰기를 시전 했다. 네가 아무리 결혼 생각이 없어도 사람 일 어찌 될지 모르니까 밥하고 음식 하는 거 알아는 둬야 해. 차마 왼손잡이 딸에게 시키지는 못하고 엄마는 늘 이렇게 말하며 오징어볶음이나 된장찌개, 고등어찜 하는 걸 보여주었다. 주방 관련된 모든 일에 관심이 없는 나는 심드렁하게 그 과정을 지켜 보았다. 일찍부터 비혼이었던 나는 속으로 '사 먹어야지' 생각하면서도 끝까지 엄마의 손이 하는 일들을 옆에서 보았다. 무엇보다 그땐 칼을 들면 당연히 그렇게 썰기가 되는 건 줄 알았다. 그땐 그랬다.  


   비혼 주의를 끝까지 고수하지 못한 채, 남편을 처음 만난 지 6개월 만에 결혼을 했다. 신혼의 가장 난감한 점은 역시나 '식사'였다. 밥은 밥솥이 해주니 큰 문제 안 되었지만, 반찬은 처음부터 끝까지 초록창이 시키는 대로 해야 했다. 무를 송송송 써세요, 애호박을 숭덩숭덩 썰어놓고, 다진 고추를, 양파를 얇게 썰어... 모든 재료는 '썰기'의 과정을 거쳐야 했다. 

  사실상 처음으로 식칼을 들고 도마 앞에 섰다. 그러니까 얘네를 이렇게 이렇게 썰어야 한단 말이지. 힘 조절, 칼날 방향 이런 것이 필요한 거라곤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칼을 들면 당연히 엄마처럼 되는 줄만 알았다. 아야, 순식간에 빨갛게 물드는 식재료들. 내 손가락들은 잘도 다쳤다. 힘 조절 따위, 칼의 방향 따위 잘될 리가 없었다. 나의 왼손은 늘 그랬듯 힘이 넘쳤고, 직선으로 내려가야 할 칼날은 좌회전, 우회전에 능했다. 칼날의 최종 도착지는 한결같이 나의 손가락이었다. 

  제일 급한 건 역시 손가락이었다. 피가 멎는데도 꽤 오래 걸렸고 연고를 바르고 밴드를 붙여도 한참 동안 쓰렸다.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도마를 보면 무, 양파, 고추에 붉은빛이 들어 있었다. 남편이 집 앞에 차를 세우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에라이, 재료들을 흐르는 물에 대충 씻는다. 엄마는 왜 무 채썰기가 엄청 힘든 일이라는 걸 말을 안 해준 걸까, 왜 양파를 썰 일이 이렇게나 많은지 미리 가르쳐 주지 않은 걸까. 뿌옇게 변하는 시야에 괜히 엄마를 탓했다. 엄마의 칼질이 20여 년 이상된 전문가의 그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나를 탓할 여력이 그때는 없었다. 빨리 남편이 오기 전 그럴듯한 밥상을 차리는 게 먼저였다. 






   '운전면허를 따도 운전을 못할 거 같아요, 무서워요'라는 말에, 10살 많았던 대학원 동기 홍샘은 웃으며 말했다. 그거, 자전거 타는 거 같은 거예요, 어느새 익숙해져요. '자전거 못 타요'라는 말에 홍샘은 잠시 당황했지만 바로 사람 좋은 웃음으로 다시 대답해주었다. '그럼 키보드. 첨에 한컴 타자 연습할 때 버벅대도 지금은 화면만 보고도 몇백 타씩 치잖아요. 그런 거예요' 아하. '세상 모든 일이 다 그래요, 처음에는 힘들고 어려워도 익숙해지면 그것처럼 쉬운 게 없어요. 운전도 마찬가지예요.' 

   간단한 진리이지만 깨치고 익히기 위해 애쓰는 과정은 절대 간단하지 않다. 그럼에도 그 힘든 일을 앞에 두고 미리 겁먹지 않게 해 주었던 홍샘의 말과 웃는 얼굴은 살면서 자주 떠오른다. 이제는 어떤 일을 시작하기 앞서 그를 불러내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세상 모든 일이 다 그래, 처음에는 힘들고 어려워도 익숙해지면 쉬운 일이 되는 거야. 

   칼질도 그랬다. 처음에는 힘들어서 땀도 나고 피도 보고 결국 눈물도 났다. 이러려고 결혼한 거 아닌데, 이런 거로 고생스러울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그러나 해야 할 일이었다. 무상(無想)과 무념(無念)으로 칼을 들었다. 사실, 힘들다고 징징댈 시간도 없었다. 아이는 이유식을 시작했고, 이유식은 유난히 손이 많이 갔다. 매일 밤 아이를 재우고 칼을 들었다. 

   처음에 두 시간 걸리던 이유식 재료 준비가 어느 날 30분 만에 뚝딱 끝이 났다. 깍둑썰기, 채썰기, 다지기, 기타 각종 썰기에 능한 사람이 되었다. 칼질은 익숙해졌고, 그것만큼 쉬운 일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피를 본 게(!) 언제였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나의 엄마만큼은 아니었지만, 내 속에서 자란 엄마의 칼질도 꽤나 '엄마'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당근과 햄과 양파와 오이 같은 오므라이스 재료 다지기도 순식간에 끝내는 지금의 나를 보고 동생이 '상전벽해', '괄목상대', '놀랠노자'라고 놀려도 할 말이 없다. 진짜 그러하기 때문이다. 내 왼손의 눈부신 발전, 그 목격자가 다름 아닌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요리 잘 못한다더니, 울 마눌 잘만 하네요. 웃으며 허겁지겁 먹는 남편의 말에 그저 씩 웃기만 했다. 그래, 그럼 된 거야. 나의 피(!!) 땀 눈물이 들어간 음식이라는 건,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무와 양파가 알고 나만 알면 되는 거야. 진실을 알고 있는 나의 젓가락은 무채와 된장찌개는 피했다. 어머님이 보내주신 김치와 계란 프라이, 김으로 배를 채웠다. 아무것도 모르는 남편이 '왜 이거 안 먹어요'라고 물어도 그저 웃은 건, 그래서였다. 그리고,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남편님, 결혼 초기 내 (진짜) 피와 땀과 눈물이 들어간 음식들 잘 먹어줘서 고마워요. 걱정마요. 지금은 그럴 일 없어요. 이래 봬도 10년 차 주부라고요. 지금 들어가는 건 많은 정성과 약간의 조미료뿐이니 그저 맘 놓고 드시면 되어요.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나의 왼손




코로나 온가족 확진으로 지난 5일 발행은 원치 않게 쉬었습니다. 혹시라도 기다리신 분이 계시다면 늦은 사과의 말씀 올립니다. 
지금은 건강히 일상을 살아내고 있습니다. 글로 만나 뵙는 나날 이어가겠습니다. 늘 찾아주시는 분들께 진심의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집에서 안일한 태도를 가지려는 주부가 쓰는 집안일 에세이입니다. 집안일에 대한 글을 쓰며 그 순간만큼은 집과 나 모두에게 쉼을 주려 합니다. 5로 끝나는 날마다 보잘것없지만 피할 수도 없는 집안일을 늘어놓겠습니다. 집안의 일들이 갖는 소중한 의미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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