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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샤 Mar 25. 2022

엄마의 엔트로피 법칙

집, 안일_청소: 정리



  장난감 정리는 하지 않는다. 이사 오고 6개월이 지났지만 정리 같은 건 하지 않는다. 그런 건 원래 안 하는 거다. 오죽하면 남편이 날을 잡고 하자고 할 정도다. 남편이 몰라서 저러는 거다. 해봤자 아무 짝에 쓸모없는 게 정리라는 걸, 애들 하원하는 순간 도로아미타불이라는 걸. 

  그래도 남편의 심정이 이해는 되어서 '지금부터 시작!'을 외쳤다. 이게 얼마나 고행이고 무의미한 행위인지 보여주고 싶었다. 책장 사이사이에 낀 장난감들과 색종이들과 헤어핀과 부러진 색연필심을 다 쓸어내렸다. 나의 난폭한 행동에 남편은 잠시 '어어'하다가 이내 조용해진다. 쏟아져 나오는 쓰레기급 물체들을 바라보면서. 우리 부부는 그렇게 대화 없이 세 시간을 작업을 했다. 그렇다, 정리라기보다 작업이다. 버릴 장난감은 버리고 쥬쥬 화장품은 화장대에, 콩순이 냉장고 부품은 냉장고에, 햄버거 패티 재료는 햄버거 가게에, 아이스크림 가게 아이스크림 재료는 거기에, 뽀로로 낱말카드가 두 장이 부족하네, 이 헤어핀 리본 붙였는데 또 어디 갔어, 이건 블록이던가 쌓기이던가, 미미 신발 한 짝 어디서 봤는데, 이 피스는 어느 퍼즐 피스인 걸까, 미미의 집 파스타 그릇 아까 어디서 본 거 같은데, 병원놀이 주사 뚜껑 어디 뒀더라...... 남편은 나의 그런 모습을 잠자코 보다가 휙휙 던지는 쓰레기들을 받아 분리수거를 한다. 비닐, 플라스틱, 목재류, 종이. 색연필심은 그냥 쓰레기통이야? 어. 아니 이건 계속 쓸 수 있잖아? 그냥 버려? 어, 버려.

  배가 고파와도 한 번 시작한 작업은 멈출 수 없다. 오전에 시작한 일이 점심시간이 지나 끝난다. 남편은 정리된 책장을 뿌듯하게 바라보지만 나의 눈빛에서는 그 비슷한 감정들을 찾아볼 수 없다. 두세 시간 후 저 녀석들이 어찌 될지 너무 잘 알아서. 


  아이들이 하원했다. 남편은 한 번 소리를 질렀다. '엄마 아빠가 얼마나 힘들게 정리한 줄 알아?' 아이들은 혼나는 순간 조금 울고 다시 열심히 흩트려놓았다. 내가 말했잖아, 정리해봤자라고. 나의 목소리에는 깊은 평정이 묻어 있어서 남편은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열반에 도달한 대선사의 경지에 이르렀다고나 할까, 적어도 장난감 정리에 있어서는 그렇다. 내가 이러한 심리적 경지에 이르게 된 것은 어디선가 '엔트로피의 법칙'에 대한 글을 읽고 난 이후부터이다. 


열과 관련된 물리현상을 이해하는 데에 필수적인 개념이 바로 ‘엔트로피(entropy)’다. 엔트로피를 정의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가장 쉬운 방법은 어떤 계의 미시적 상태에 대한 통계역학적 접근법을 사용하는 것이다. 엔트로피는 흔히 물리계의 무질서한 정도를 나타낸다고 말한다. 매우 엄밀하게 개념을 정의해야 하는 과학에서 ‘무질서한 정도’라는 표현이 다소 애매하게 들릴 수 있다.(중략)
예를 들어, 새 학기를 맞아 깨끗하게 정리해 둔 책상은 십중팔구 일주일 정도 지나면 금세 어지럽혀질 것이다. 연필꽂이에 가지런히 꽂혀 있던 연필이며 온갖 펜들이 책상 여기저기 나뒹굴고, 줄 맞춰 늘어서 있던 책들도 두어 권쯤 자기 몸을 활짝 펼친 채 책상 위에 널찍하게 자리를 차지하기 일쑤다. 여기에 지우개, 책갈피, 메모지까지 가세하면 우리 책상은 난잡하기 이를 데 없이 ‘무질서해진다.’ 이처럼 어떤 물리계가 이전보다 더 무질서해지면 우리는 그 계의 엔트로피가 증가했다고 말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 - 우주의 무질서도는 증가한다 (물리 산책, 이종필)


  그러니까, 정리한 장난감들이 저렇게 보기도 싫게 흐트러지는 건 물리학적으로, 아니 물리학을 들먹을 필요도 없다, 그냥 당연히 저렇게 되는 거였다. 안 그러면 그것이야말로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일이었다. 우리 애들이 별나서도 아니고 정리정돈을 더럽게 못하는 종자들이어서도 아니었다. 순리였다. 그러니 내가 그걸 보며 '저걸 치워야 하는데', '저건 콩순이 부품이 아니고 티니핑인데', '제발 갖고 논 거 좀 제자리에 치워라' 같은 생각을 하며 스트레스받을 일도 없었다. 장난감들이 집 여기저기 널브러지는 건 지극히 정상이요, 물리학적으로 설명 가능한 일이었다. 뭐, 언젠가 한 번은 치우겠지, 계절이 바뀔 때나 기분이 매우 좋은 어느 날이나 이사 가기 전전날. 이러면서 나는 장난감들을 대애충 여기저기 올려두거나 슬쩍슬쩍 버리기 시작했다. 정리를 하나 안 하나 아이들이 갖고 노는 행위 자체는 같으니, 내 마음 하나만 잘 정돈되면 그거로 되는 거였다.






  몇 번을 방문해도 한결같이 깨끗한 친구 집이었다. 친구는 진심으로 장난감 정리를 즐겼다. 

  "어린이집 갔다 와서 애들이 장난감 흩트리면서 노는 걸 보면 기뻐. 애들은 그 맛으로 노는 거지."

  참 모범적인 엄마다. 그 후로 그 친구는 매번 다른 반찬을 해서 아이들을 먹이는 사진, 매주말 캠핑을 나가는 사진, 장난감 정리가 깔끔하게 된 놀이방 사진, 한글과 영어를 병행하는 엄마표 스터디를 준비하는 사진으로 SNS를 꽉꽉 채워나갔다. 나는 더는 그 사진을 웃으며 볼 용기가 없었다. 내가 못난 엄마라는 걸 그 친구의 사진을 통해 확인하는 기분은, 정리안 된 내 아이의 놀이방 같았다. 더럽고 지저분했다. 그 친구가 포스팅하는 SNS 앱을 지웠다. 

  

  오랜만에 집에 오신 시어머니를 맞이한 건, 분명 방금 전 치웠는데도 거실에 늘어진 블록과 인형과 공과 자잘한 장난감들이었다. 

  "애들이 있으니 이렇게 장난감들도 활기차게 돌아다니지. 집에 혼자 있어 봐. 몇 날 며칠이 지나도 물건들이 그대로야. 먼지만 쌓여. 얼마나 쓸쓸한 지 아니."

  어머님, 그 쓸쓸한 집에 제발 하루만 혼자 살아보고 싶은데요, 하려다 꾹 참았다. 하고 싶은 말을 하지 않는 것은 며느리가 갖추어야 하는 미덕이다. 활기찬 건 좋지만 어지럽혀진 건 싫다. 아이들이 잘 노는 것과 별개로 너저분한 건 정말이지 싫다. 쌓이는 먼지만 고상하고 우아하게 닦고 싶다. 

  물리학의 측면에서 보자면 이들은, 엔트로피 법칙을 거스르는 자들이다. 우주의 질서는 기본적으로 무질서로 흐르게 마련인데, 특유의 부지런함으로 이를 거부하는 자들이다. 아, 진리는 존재하고 진리를 거스르려는 자들도 존재하는구나. 이 모든 걸 품는 것이 신의 의도이겠구나, 여기까지 생각하고 말았다. 

  나는 매우 순순히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으로 남을 거다. 이건 나름 확고한 의지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라 자잘한 장난감들이 필요 없어질 때까지 나는 엔트로피 법칙-우주의 무질서는 증가한다-을 한 점 의심 없이 받아들여 실행하려 한다. 장난감들이 널브러지는 것을 우주의 섭리로 받아들이고 내 마음도 우주만큼 넓혀보려 한다. 계절의 변화에 또는 이사철에 한 번씩 정리하다 보면 어느새 아이들은 자라 있을 것이다. 아이들에게 장난감들이 필요 없을 때엔 그들 안의 무질서가 또 다른 차원으로 증가할 것이다. 그건 그때의 일이고 지금은 장난감에만 엔트로피 법칙을 적용하려 한다. 지금의 나에게는 이 정도의 무질서도 감당하기 벅차다. 


  나는 오늘도 정리를 하지 않았다. 그 시간에 열역학 법칙에 대해 검색하고 공부했다. 물리학은 엄마들에게 매우 유용한 분야임을 알게 되었다. 역시 배움은 끝이 없다. 


한쪽으로 밀어둘 뿐, 치우지 않는다. 무질서는 증가하는 법이니까. 




 


집에서 안일한 태도를 가지려는 주부가 쓰는 집안일 에세이입니다. 집안일에 대한 글을 쓰며 그 순간만큼은 집과 나 모두에게 쉼을 주려 합니다. 5로 끝나는 날마다 보잘것없지만 피할 수도 없는 집안일을 늘어놓겠습니다. 집안의 일들이 갖는 소중한 의미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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