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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샤 Mar 05. 2022

가장 햇볕 좋은 곳에서 드리는 기도

집, 안일_청소: 걸레질



  걸레질을 잘 하지 않는다. 힘들어서이다. 허리가 아프고 무릎이 아프고 팔이 아프다. 청소기는 매일 돌려도 걸레질은 큰맘 먹어야 한다. 일주일에 두 번 물걸레 청소기는 돌려도 무릎 꿇고 닦는 걸레질은 싫다. 힘든 건 다 싫다. 피할 수 있다면 피하는 게 상책이라는 걸 나이 들면서 알아가고 있다. 힘든 건 싫어서, 피하고 싶어서 걸레질은 잘 하지 않는다.

  그와 별개로 나는 집을 가장 깨끗하게 하는 게 걸레질 청소라는 걸 잘 알고 있다. 시댁에 갈 때마다 반들반들하고 새 집 같아서 여쭤보았다.

  “걸레로 바닥을 자주 닦아주면 돼.”

  시어머니의 대답은 나를 조금 실망시켰다. 그걸 모르는 게 아닌데요, 하기가 싫은 건 어쩔 수 없네요. 친정엄마도 마찬가지였다. 가끔 우리 집에 오면 꼭 거실만이라도 걸레질을 했다. 애들 키우는 집일수록 깨끗해야지, 바닥이 이게 뭐로, 뭐가 이렇게 많이 묻어 있노. 닦으면서 엄마가 하는 말들은 흘려들어도 괜찮은 그런 말들이었다. 어차피 엄마의 궁시렁이 끝나고 나면 집이 깨끗해져 있을 거니까, 그게 좋아 그런 말들은 유쾌한 심정으로 듣고 흘렸다.

  왜 어르신들은 걸레질을 쉽게 쉽게 하는 걸까, 조금 생각하다 나는 쉽게 그 답을 알아 버렸다. 어르신들의 옛집은 작았다. 그들의 옛집, 그러니까 나의 어린 시절의 집은 단칸방이었다. 방 하나에 네 식구가 누우면 딱 맞았다. 머리맡에 요강 하나 둘 정도의 공간을 제외하면, 마치 4인 가구 맞춤처럼 만들어진 방이었다. 그래서 청소라는 개념이 딱히 없었다. 걸레를 들고 쓸 듯이 닦아내면 되었다. 청소는 금방 끝났다.

  어린 나는 아빠의 걸레질이 좋았다. 아빠가 걸레로 방을 닦을 때 나는 자주 아빠의 등에 올라탔다. 이랴이랴, 아빠의 뒷목덜미를 잡고 등 위에서 펄쩍거려도 아빠의 걸레질은 쉼이 없었다. 조금씩 느려지고 가끔 멈추기도 했지만 아빠는 그저 방을 닦았다. 지금 돌이켜 보니 아빠의 미소를 슬쩍 본 것도 같다. 걸레질에, 딸의 난동에, 쉽지 않았을 텐데 아빠는 웃었다. 아이를 셋을 낳고 보니 그 미소가 품은 뜻을 알 것도 같다.


  며칠 전 막내가 물 한 컵을 다 쏟아 닦아야 했다. 도대체 하루에 몇 번을 이렇게 닦고 치워야 하냐고, 이 짓을 언제까지 해야 하냐고 순진한 얼굴에 대고 울분을 드러내며 걸레로 바닥을 닦았다. 막내의 울먹이는 얼굴은 남의 일이고, 둘째는 갑자기 신이 나서 내 등 위로 올라탔다. 이랴이랴. 어쩜 아이들은 세대를 건너도 이리도 한결같은지. 어이가 없고 옛 생각도 나서 그만 피식 웃어 버렸다. 볼 위로 눈물이 흘렀어야 할 막내는 엄마의 웃음에 눈물을 거두고 언니를 따라 엄마의 등으로 올랐다. 이랴이랴, 그래 니들 거다, 맘껏 부려 먹어라.

  아이들의 목마 타임이 지나고 걸레를 보니, 딱 수치심만큼의 얼룩이 있었다. 이만큼 오래 방을 제대로 닦지 않았었나, 일주일에 두 번씩은 물걸레 청소기 돌리는데, 그 사이 애들이 크레파스칠을 했나, 도대체 이 거뭇함의 정체는 뭐지. 그리고, 딱 그만큼 깨끗해진 바닥. 더러워진 걸레와 깨끗해진 바닥 사이의, 내 무릎.

  이건 도대체 무슨 감정이지, 묻기도 전에 툭 하고 흐른 것이 걸레로 스며들었다. 감성적인 사람의 걸레질이란 이리도 피곤한 것이어서, 바닥을 닦다가 갑자기 흐르는 눈물을 닦는 수고로움을 설명해내야 한다.

  실은, 나도 잘 모르겠다. 그 뜨거움의 정체가 무엇인지. 30여 년도 훨씬 전 내 아빠의 무릎을 내게서 보게 된 이유인지, 그 무릎과 내 무릎이 꽤나 닮았음을 30여 년이 흐른 후에야 알게 된 때문인지, 자신을 더럽히고 자신이 지나온 자리를 밝히는 ‘희생의 본질’을 훔쳐본 까닭인지. 어쩌면 이 모든 것이 버무려진 탓인지도 모르겠다.

  엄마 왜 울어,라고 묻는 아이에게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대답하고 급히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흐르는 물을 만나고서야 자신의 오점을 조용히 흘려보내는 걸레를 보면서 오래 잊고 있었던 두 글자를 떠올렸다. 기도. 걸레와 기도, 두 단어가 갖는 먼 거리가 실은 그리 멀지도 않았음을 이 나이 되어서야 깨달았다. 기도와 걸레를 가깝게 해 준 건 다름 아닌 ‘무릎’이라는 사실 역시, 이 나이 먹고서야 알게 되었다.


  무릎을 꿇는 자세, 기도와 걸레질은 닮았다. 내 어린 시절 아빠는 그렇게 자주 무릎을 꿇었다. 영적 수양을 위한 기도였겠지만, 그 속에 엄마와 나와 동생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긴 기도를 마친 아빠는 걸레를 들고 또 무릎을 꿇었다. 마음을 닦은 아빠는 이번엔 방을 닦았다. 방을 닦으며 딸과 아들의 장난과 웃음 아래 머물렀다.

  아빠의 자세는 늘 그렇게 낮아서 나는 기도나 희생 같은 단어들을 ‘아래에 거하는 가치’로 여겼다. 기도와 희생 위에서만 자라서 나는 무릎 꿇을 일이 없었고 그럴 줄도 몰랐다. 무릎을 꿇는 건 아프고 불편했다. 이런 내 삶에 오랜 기도는 없었고 걸레질은 피해야 할 일이었다. 마음과 내 집 모두 더러워졌지만, 낮아질 줄 모르는 나는 영혼과 일상을 방치하고 지냈다. 아이들에겐 짜증이, 집에는 얼룩과 먼지가 늘어갔다. 무릎 꿇고 낮아지기만 하면 될 일들을 하지 못한 채 살아온 세월을, 걸레를 빨며 되짚었다.

     

  요즈음 나는 걸레를 집에서 햇볕이 가장 잘 드는 곳에 널어두고 있다. 자주는 아니지만 생각날 때마다 걸레를 들고 이곳저곳을 닦는다. 무릎이 아프지 않을 정도만, 그래도 횟수는 예전보다 늘었다. 그 시간만큼은 일상의 작은 것들에 감사 기도를 올리고 있다. 아이들이 크게 아프지 않고 다치지 않고 자라나고 있음에, 무탈한 일상을 보낼 수 있음에, 이렇게 걸레질을 해도 괜찮은 내 무릎에, 걸레질을 하며 마음과 집 모두를 깨끗이 할 수 있음에, 걸레질이 이토록 신성할 수 있음을 깨닫는 요즈음 나날에.

  자신의 본분을 다한 걸레를 빨아 햇볕 좋은 곳에 잘 널어둔다. 햇살이 가만히 내려와 ‘수고했어’라고 걸레와 내 무릎을 다독여주는 것 같다. 걸레는 다음의 일을 위해, 자신을 기꺼이 더럽히는 대신 집이 깨끗해질 그 순간을 위해 천천히 고요해진다. 어쩐지 기도를 하는 듯도 하다.


  꿇어앉은 무릎에, 걸레질에, 부모의 마음에, 모든 낮은 것들에는 기도가 스며있다. 아빠의 기도에 늦게 응답한 내 손에 걸레가 들려 있다. 이제는 진정으로 낮아질 수 있을 것 같다.





이 글은,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게 되는 아래의 글을 읽고나서 태어난 글입니다. 좋은 글 써주신 양윤미 작가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집에서 안일한 태도를 가지려는 주부가 쓰는 집안일 에세이입니다. 집안일에 대한 글을 쓰며 그 순간만큼은 집과 나 모두에게 쉼을 주려 합니다. 5로 끝나는 날마다 보잘것없지만 피할 수도 없는 집안일을 늘어놓겠습니다. 집안의 일들이 갖는 소중한 의미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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