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안일_청소: 무선청소기
‘부부의 세계’, 처음엔 이것만 보였다. ‘김희애 청소기’는 나중에 눈에 들어왔다. 그러니까, 그 드라마 속 그 좋은 집에서 멋져 보였던 그거란 말이지. 그런데 50프로 할인이라 그거지. 고민을 할 이유를 찾을 수 없었거니와 찾을 필요도 없었다. 이것은 운명이자 숙명이었다. 그런 고귀한 단어들을 가지고 와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만남이었다. 지긋지긋한 똥멍청이 보킹과 헤어질 시간은 그렇게 ‘50% 할인’의 명찰을 달고 내게 왔다.
나의 치졸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사건이 바로 ‘무선청소기’였다. SNS에 행복해 보이는 사진을 행복하게 찍어 올리기 위해 태어난 친구였다. 친구는 내가 가지지 못한 것들을 잘 알고 있었고, 그런 나의 결핍 위주로 사진을 올렸다(그렇게 보였다). 그녀의 행복이 그것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그녀의 사진과 사진 속 미소와 하트를 누르는 사람들까지 미워했다. 너의 유일한 특기이자 재능은 ‘행복의 전시’ 뿐이야, 그래서 너의 행복은 가련하지. 비참했던 것은, 그 사진을 보던 나도 하트를 눌렀다는 사실이다. 행복에 동참하지 않으면 불행한 사람이 될 거 같은 불길한 기분 때문이었다.
#드디어장만#ㄷㅇㅅ무선청소기#내돈내산#청소쉽게하자#행복. 샾은 빨래줄에 걸린 팬티마냥 쉽게 쉽게 나열되어 있었고, 사진에는 무선청소기가 친구 집 벽에 나른한 표정으로 붙어있었다. 그 사진을 보고 내가 누른 것은 하트가 아닌 ‘팔로우 취소’였다. 오랜 친구와의 절교는 그렇게 금방 이루어졌다. 내 안의 무의식에 깔려 있던 불편이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거였다. SNS가 남에게 보이기 위한 행복 경쟁의 장인 건 잘 알고 있었지만, 알고 있는 것과 마음이 받아들이는 것은 다른 차원이었다.
사실 나는, 나도 모르게, 언제라도 그녀와 관계를 끊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녀가 내보이는 행복들은 하나같이 내 삶의 영역 바깥의 것들이었다. 육아를 함께 하는 남편, 친한 자매, 육아 중에도 친구들을 마음껏 만나는 여유, 그 여유 속에서만 누릴 수 있는 소란스러운 심정 같은 것들. 이를테면 #남편찬스#육아휴일#친구들과#1박2일#바다#행복#남편고마워 이런 태그들. 그런 행복의 나열을 마주하다 보면, 내 마음이 구석에서부터 녹슬기 시작했다. 내 속의 부식腐蝕을 막는 게 우선이었다. 더는 그녀의 찬란한 행복을 보기를 거부했다. 내가 쉽게 가질 수 없는 걸 쉽게 갖는 그녀의 교만을 차단하기로 했다. 아는 게 힘이라고 누가 그랬던가. 나에게는 모르는 게 힘이요 평화이자 행복이었다.
팔로우 취소를 누른 나의 손가락은 초록창에 ‘무선청소기’를 쳤다. 내 마음의 부식은 막아도 내 손가락이 갖는 미련은 털어내지 못했다. 손가락은 늘 내 마음보다 단순하고 진실했다. 기승전돈. 아무 탈 없이 잘 돌아가는 로봇청소기 보유자인 내가 무선 청소기를 위해 지출할 여력은 어디에도 없었다. 심하게 건강한 저 녀석의 바퀴 하나를 빼버릴까, 렌즈 하나를 빼버릴까 짧게 고민도 했지만 나는 그렇게까지 잔인한 사람은 못 되었다. 그렇게 유약한 내게 구원으로 다가온 것이 바로 ‘김희애’님이었던 것이다.
1화였던가 2화였던가, 드라마 초반 남편을 의식하는 희애님의 손에서 작동하던 그 무선청소기. 희애님의 심리 상태에 몰입을 방해한 게 바로 그 청소기였다. ‘이렇게나 다정한 남편이 설마 바람을?’ 이 희애님의 머리속에 가득 채웠다면 나의 머리속은 온통 ‘저렇게나 멋진 청소기가 혹시 우리집에?’ 뿐이었다. 간절하면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나의 친구가 #드디어장만 했던 청소기보다 훨씬 #행복 한 가격으로 내게 왔다. 나는 그렇게 오랜 친구를 일순간에 끊고 오래 보게 될 친구를 들였다.
새로 사귄 친구는 좋았다. 내 속을 뒤집지도 않으면서, 자기 속만 시커멓게 채웠다. 그 속을 나에게 훤히 보였다. 그러면 나는 그 친구의 속을 뒤집어 투명하게 해주었다. 오로지 나에게만 속을 보이는 친구였다. 그러면서 매일 아침마다 내 손을 잡고 내가 가자는 곳으로만 갔다. 편했다. 다른 누구에게 내 흉을 볼 일도 없었고, 자기의 행복을 나에게 과시하지도 않았다. 그냥 내가 필요로 하는 만큼만 내 옆에 있어 줬다. 얼마만에 그런 관계를 맺게 된 건지 생각하자 괜스레 눈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아이를 낳고 사실상 나의 ‘관계’는 SNS 안에서 결정되었다. 그 안의 숫자가 내 인맥의 전부였다. 그들이 보여주는 #커피와 #카페와 #출근길과 #육아에 하트를 누르면 나와 그들을 맺어주는 온도가 높아지는 거였다. 하트를 눌러야 하는데 아이가 울면 한 손은 아이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 눌렀다. 육아와 관계는 나에게 그렇게 늘 동시적인 일이었고 모두 놓칠 수 없는 것이었다. 육아가 내 몸이 해야 하는 일이라면 내 마음의 할 일은 내 사람들을 챙기는 것이었다. 하트를 누르고 ‘왤케 예뻐?’, ‘어디야? 나도 다음에 데려가’ 같은 댓글을 쓰고 나서 아이의 기저귀를 갈면 어쩐지 아이가 미워 보였다. 아이는 잘못한 것도 없이, 오히려 자신의 본분을 다하며 잘만 크는데 나만 아이를 미워했다. 다들 아이 키우는 건 한때라고 하는데, 나에겐 이 한 때가 왜 이리도 길기만 한 건지. 친구들의 육아는 #제발늦게커#천천히크자#너랑있으면시간이순삭 이라는데, 나는 왜 이렇게 길고 긴 시간 속에 갇힌 기분인 건지.
그런 생각이 가득하던 어느 날, 나는 무선청소기를 보며 ‘친구’를 떠올린 것이다. 몸은 집에만 있고 마음은 폰 안의 친구들 곁에만 있는 가련한 나의 손을 잡아주는(실은 내가 잡고있는 것이지만 그날은 그것이 내 손을 잡아주는 것만 같았다) 그 회색에서, 아이러니하게도 떠올린 단어가 ‘친구’였다.
친구(親舊), 가깝게 오래 사귄 사람. 가깝게 오래 사귄 사람이라니, 나에게 그런 것이 있나, 있긴 했나. 가까운 사람은 있지만 오래지 않았고 오래 사귄 이는 가깝지 않고. 그런 나에게 회색의 청소기가 ‘내가 가깝게 오래 있어 줄게’라고 하는 것만 같았다. 어쩐지 청소기라면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제야 나는 내가 관계에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것은 어려우면서도 간단한 요구였다. 가깝게, 오래. 언제든 얼굴 볼 수 있는 곳에서 함께 늙어갈 수 있는 그런 관계, 친구(親舊)였다. 동시에, 나는 그런 관계를 현실적으로 가질 수 없다는 것 또한 알게 되었다. 계속 이사를 해야 하는 삶과 친구는 친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인정하기는 어려웠고 그래서 한동안 우울했다. 친구는 기대하지 말아야 하는 삶. 그 우울함이, 행복을 티내는 친구와의 ‘팔로우 취소’를 하게 한 진짜 손가락이었다.
어느 정도의 시간을 필요로 했지만, 이제는 나는 나의 삶을 받아들일 수 있다. 오래고 친한 관계를 찾고 유지하려 애쓰는 대신 내 곁에 오래 있을 수 있는 걸 오래 두려 한다. 이를테면 청소기 같은 것. 별말 없이 내 옆에 있어 주고 항상 자신의 속을 보여주고 그와 함께한 시간 뒤엔 후련함이나 개운함 같은 것만 남게 하는 그런 것.
30대 후반에 치졸한 마음으로 친구 하나를 지웠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친구 덕분에 내게 온 청소기가 ‘친구’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해주었다. ‘사랑에 빠진 게 죄는 아니잖아’를 외친 김희애님 극중 남편의 외침이 ‘관계를 정리한 게 죄는 아니잖아’로 들려왔다. 티브이 옆에 청소기가 조용히 서 있었다.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사이를 굳이 ‘친구’라는 관계에 두고 내 마음이 더러워지게 두지 말라고, 언제든 나와 함께 네 마음속 먼지들을 없애버리자고 청소기가 파란 불빛을 깜빡였다. 충전이 다 되었다고, 너의 손을 잡을 준비가 다 되었다고 다시 깜빡였다.
변함없이 나의 손길을 기다리는 무선청소기가 요즘 나의 가장 가까운 친구이다. 그에겐 나의 결핍을 들켜도 편안할 것 같다, 결핍이라는 먼지가 쌓이는 내 속을 깨끗하게 해줄 테니까. 그와는 오랜 친구로 남을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