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안일_청소: 로봇청소기
정확히 2주만 이었다. 조리원에서 돌아온 나는 간간이 작은 이삿짐만 정리할 수 있었다. 빗자루로 바닥을 쓴다거나 걸레로 닦는 행위는 생각도 할 수 없는 몸 상태였다. 젖을 물리고 틈틈이 자고 기저귀를 가는, 기본적인 신생아 육아에 내 모든 것을 쏟아붓고 있었다. 나의 끼니와 잠을 챙기는 행위마저 뒷전이었으니 청소나 설거지 같은 것은 생각조차 하기 힘든 나날이었다.
퇴근한 남편은 쌓인 설거지를 하고 이삼일에 한 번 청소를 했다. 미역국에 만 밥을 김치와 같이, 가끔 참치캔을 옆에 두고 먹었다. 그렇게 군소리 없이 지내던 남편이 로봇청소기를 들여온 것이, 내가 조리원에서 돌아온 지 2주 되던 날이었다. 아기 주변만 물걸레로 쓱쓱 닦고 말던 내가 답답했는지, 갑자기 커진 집을 자주 청소하는 것이 내키지 않았는지(실은 ‘둘 다’였을지도 모른다), 남편은 내게 별말 없이 로봇청소기를 들였다. 검고 네모난 그 물건에 속이 새하얗게 말개진 건 남편보다 나였을 것이다. 이렇게 갑자기, 나는 지금부터 죽는 날까지 청소 노동에서 해방되는 것이구나. 나는 그에게 ‘보킹’이라는 이름을 붙여 줬다. ‘로’씨 가문 출신이었다.
‘신세계’라는 단어는 보킹을 위해 탄생한 말 같았다. 내가 청소를 위해 해야 할 일은 ‘시작’ 버튼을 누르는 것이었다. 아, 하나 더, 청소하기 위해 돌아다니는 검고 네모난 보킹을 유심히 지켜보는 것이었다. 이삼십 분을 집을 탐구하던 그가 ‘배러리 로우’라며 삐삐 거리다 ‘홈’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하면 집은 대충 깨끗해져 있었다. 청소만큼 쉬운 집안일은 없었다.
나는 아침저녁으로 청소를 했다. 정확히 말하면 아침저녁으로 ‘시작’을 눌렀다. 기분이 좋을 땐 ‘직선형’을, 기분이 꼬였을 땐 ‘나선형’을 선택했다. 보킹은 나의 기분에 따라 집을 떠돌아다녔다. 그 어떤 불평, 불만도 없었다. 자신의 소임을 다한 보킹이 쉬는 동안 나는 그의 배를 뒤집어 피부를 벗겨냈다. 하늘색 마른걸레에 회색 먼지들이 수줍게 연행되어 있었다. 아침저녁으로 보킹이 순찰을 돌아도 그 녀석들은 부지런히 잡혀 왔다. 어디 감히 신생아 키우는 집을 더럽혀!
보킹이 우리 집에 온 지 8개월 즈음 그의 강력한 적이 나타났다. 나의 딸은 그의 행적을 유심히 관찰하다가 자신의 곁에 오면 그를 사정없이 팼다(그렇다, ‘때렸다’도 아니고 ‘팼다’이다). 보킹은 어떤 때는 왼쪽 오른쪽으로 잘 피했고 어떤 때는 모든 것을 내려놓은 선승의 자세를 하고 퍽퍽 소리를 내며 맞았다. ‘우리 아가 힘도 좋네’ 하며 아이의 손만 보던 나는, 보킹을 아예 멈추게 하고 옆에서 박수를 쳤다. 지친 아기가 나에게 안으라고 두 팔을 벌리면 그제야 다시 ‘시작’을 눌렀다. 보킹은 추스를 새도 없이 자신의 본분을 행했다. 물론 자신의 운명을 탓한다거나 복수심을 내보이는 등의 표현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보킹을 더 좋아했다. 그의 순수한 검은 행적이 좋았다.
잦은 이사에도 보킹은 자신의 새 작업 환경에 금세 적응했다. 그런 보킹의 수고로움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나, 나는 그가 점점 못 미더워졌다. 집이 커지고 살림과 세간이, 특히 장난감이 늘어날수록 보킹은 멍청해졌다. 자꾸 걸리고 멈추고 삐빅거렸다. 청소를 시키고 외출하고 오면 청소는 안 하고 구석 어딘가에 처박혀 있었다. 인형 옷 풀린 실을 자신의 바퀴에 감고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 경고음을 내는 탓에 자는 아이를 깨운 보킹이 미워 발로 차 버린 적도 있었다. 어찌 그리도 둔하니, 스마트는 개뿔, 어리벙벙하고 구석구석 먼지도 제대로 못 치우면서 걸핏하면 멈추고 걸리고. 손도 많이 가는 주제 무슨 로봇청소기라고.
그즈음 새로 나오기 시작한 로봇청소기 광고를 보다가 보킹을 보면, 그의 몸체보다 더 새까만 한숨이 나올 지경이었다. 집 구조를 파악하고 청소 안 된 부분을 찾아가 청소하고 장애물은 알아서 피하고. ‘야, 저런 게 스마트지 너는 똥 멍청이야.’ 어느 순간부터 뽀얗게 쌓인 먼지 때문에 자신의 원래 색이 블랙이었는지 그레이였는지 잊게 된 보킹은, 충전도 없이 오래 잠을 잤다. 잠을 자는 것 말고 그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지난여름, 이사 준비를 하기 위해 보킹을 다시 자세히 볼 일이 있었다. 새삼 놀란 이유는 다름 아닌 그의 ‘발’ 때문이었다. 스마트한 청소기라 당연히 모든 면에서 스마트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의 발은 다름 아닌 빗자루 형태였다. 양옆으로 달린 솔이 돌아가며 먼지를 ‘쓸어 담는’ 방식이었다. (‘흡입’ 같은 세련된 동사가 놓일 자리가 없었다.)
몸은 스마트한 척해도 본질은 구식이고 아날로그이고 다소 둔감했던, 나의 보킹. 그래서 쓸데없이 멍청했고 빈 틈 없이 다정했던 나의 첫 로봇청소기. 그를 뒤덮은 먼지들을 닦으며 괜스레 눈앞이 흐려졌다. 먼지가 너무 많은가, 하면서, 보는 사람도 없는데 빠르게 눈가를 닦아냈다. 보킹의 검은 렌즈만이 텅 빈 시선으로 나를 볼 뿐이었다.
내 첫 아이와 나이가 같은 보킹이었다. 한결같이 내 육아의 옆에서 청소를 도맡아준 보킹이었다. 첫째가 자기를 패면 이유도 모르면서 그냥 맞던 보킹이었다. 좁은 집인데도 한 차례 돌고 나면 먼지통 가득 먼지를 뱉어내던 보킹이었다. ‘변함없다’라는 수식어를 좋아할 만한 보킹이었다.
‘변함 있다’ 아니 ‘변함 많다’라는 수식어의 주어 자리는 내가 차지했다. 보킹이 처음 집에 오던 날 ‘청소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을 외치던 자, 보킹의 운행을 그저 바라본 자, 보킹 폭행사건 가해자의 어머니였던 자, ‘멍청해, 바보 같아, 제대로 좀 해, 바꾸고 싶다’라고 웅얼거린 자, 그를 발로 걷어찬 자, 바로 ‘나’였다.
우리 집에 온 날부터 한결같았던 보킹과 그를 바라보는 나 사이에 존재하는 단 하나, 그것은 바로 끊임없이 변하는 나의 마음이었다. 어쩜 이리도 쉽게 변하고 쉽게 사라지고 쉽게 생겨나는지, 마치 먼지처럼 내 마음은 가벼이 날아다니고 생기고 없어졌다. 물체 하나와 행위 하나에도 이렇게나 변덕스러운 내 마음인데, 나는 그것을 마치 내가 알아서 조절할 수 있는 것이라고 여겨왔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비등점까지 들끓는 마음에 비하면, 차라리 보킹은 시작과 정지, 충전이라는 단조로운 구동 방식으로 스스로를 컨트롤할 수 있었다. ‘배러리 로우’가 되면 알아서 홈으로 가는 지혜로움이 있었다. 내 마음 하나 어쩌지 못하는 멍청한 내가 충전이 필요한 때를 스스로 아는 보킹에게, 멍청하다고 비아냥거렸다. 보킹은 그마저도 나무라지 않고 그저 잠을 자는 외향을 하고 때를 기다렸다. 보킹에게 미안해서, 내가 너무 멍청해서 그날은 이사 정리를 하다 말고 조금 울었다.
지금 집이 좁은 탓에 보킹은 기약 없는 휴식을 취하고 있다. 그에 대한 글을 쓰기 위해 오랜만에 로봇청소기를 꺼내 보고는 피식 웃었다. 많이 익숙한 몰골, 다름 아닌 ‘나’였다. 몸은 갈수록 구식이 되어가지만, 어쨌든 ‘스마트’하다. 내 손에도 스마트폰은 계속 들려 있으니까. 하는 짓은 멍청하지만 어쨌든 기본은 한다. 어느 정도 움직이면 반드시 쉬어줘야 한다. 충전의 시간은 다음을 위해 필수이다. 우리는 이렇게 조금씩, 함께 늙고 있었다.
그와 함께 한 시간을 떠올리면 끝도 없이 다정하다. 내 아이들의 성장이 함께 하기 때문이다. 그 시간 속에 멍청함도 섞여 있다. 청소기의 청소는 어설펐고 그 곁의 나 또한 지혜롭지 못했다. 그때를 떠올리면 설익은 시간들이 못내 아쉽다. 나와 청소기 모두가 못나서 추억(醜憶)으로만 남을 것 같아 안타깝다.
그러나 지나고 나면 우리가 - 로봇청소기와 내가 - 함께 했던 찐한 육아의 시간 나아가 그 시간을 기억하며 글을 쓰는 이 시간을 모두 추억(追憶)할 날이 올 것이다. 그때의 나는 지금보다 조금은 더 낡고 ‘스마트’해져 있을 것이다. 그 옆에 늙은 보킹이 조용히 낮잠을 자고 있었으면 좋겠다. 오래 되고 스마트한 것이 귀한 시대였으면 좋겠다.